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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개론

리트머스이고픈 다큐멘터리스트, 정수웅 -원용진

I. 다큐멘터리 작가론의 정당성

디지털 혁명은 다큐멘터리 제작에 대한 관심의 고조를 가져왔다. 16mm 포터블 카메라가 등장하던 시기의 다큐멘터리 붐과 흡사하다고도 하겠다. 그러나 디지털 기술과 포터블의 등장은 서로 다른 결과, 즉 다른 붐을 낳았다. 포터블 기술은 비판적 기능의 다큐멘터리를 낳았고 다큐멘터리의 가능성을 확장해갈 수 있는 희망을 가져다주었다. 남미에서의 혁명적 다큐멘터리 등장 등이 바로 그 예라고 하겠다. 그러나 디지털 혁명은 리얼리티 TV라는 뜻밖의 장르와 결합해 나갔다. 잠깐의 순간, 미세한 움직임까지 포착할 수 있는 디지털 기술을 모든 것을 가감없이 보여줄 수 있다는 자신감 즉 리얼리티 TV와 접합한 것이다.

디지털 기술에 힘입은 리얼리티 TV는 전혀 예측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지속적인 방송을 위한 정보원(情報源)과의 유착, 지나친 현실감을 기반으로 한 엄격한 동일시 창출, 그로 인한 수동적 수용자의 생산이라는 보수적 결과를 낳고 말았다. 텔레비전 방송이 디지털 기술을 발 빠르게 자신의 품안으로 빨아들여 무한히 확장될 수 있는 표현의 방식을 퇴행적 방향으로 물꼬 틀어 버린 셈이다. 새로운 장르로까지 인식되고 있는 VJ 프로그램들을 보면서 새롭다는 느낌을 갖지 못하는 것도 그런 탓일 것이다.

다큐멘터리의 르네상스기를 맞았다고 말하면서도 전보다 다큐멘터리의 여건이 좋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적 언급이다. 이 모순적인 언급은 텔레비전 권력 탓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텔레비전의 권력을 말하기 전에 다큐멘터리의 가능성을 터놓는 담론들의 부족함이 먼저 언급되어야 할 것 같다. 디지털 기술이 다큐멘터리의 르네상스기와 접목되기 위해서는 전과는 다른 제작방식, 재원의 활용, 다큐멘터리 정신 등등이 논의될 필요가 있다. 텔레비전 권력에만 모든 것을 돌려놓지 말고 새로운 출구를 찾아보자는 것이다. 이는 권력을 단순히 지배(domination)로만 설명하는 것을 넘어 헤게모니(hegemony)로 설명하고자 하는 정치학적 전화(轉化)에서 배워야 하는 지혜이기도 하다. 텔레비전이 다큐멘터리의 감수성을 지배한다고 투정만 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그 틈새를 비집고 갈 것인가, 새로운 감수성을 퍼뜨릴 것인가, 심지어는 텔레비전의 감수성을 바꾸어 놓을 수는 없는가 등등의 논의가 심각하게 이뤄져야 함을 주장하는 셈이다.

다큐멘터리 논의가 텔레비전, 독립영화, 새로운 기술 등과 함께 논의되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새로운 기술이 거저 르네상스기를 가져다주지도 않을 것이고, 텔레비전과 결합하는 수준에서만 머물지도 않을 것이다. 서로간의 역동적 결합에 따라서는 전혀 새로운 국면을 가져올 수도 있다. 텔레비전 내 장르로서의 다큐멘터리를 논의하는 것을 넘어서고자 함은 그런 점에서 분명 의미를 갖는다. 텔레비전이 그을 수 있는 한계적 조건과 부딪혀가면서 자신의 영역을 구축하고자 하는 다큐멘터리 작가나 집단 혹은 전혀 새로운 다큐멘터리 문화에 조명을 가하는 일은 르네상스기를 제대로 맞기 위한 준비작업이 될 수도 있다.

늘 그렇듯이 텔레비전은 바깥의 기운에 가장 민감한 매체이다. 인기(popularity)를 양식으로 하는 텔레비전은 자신의 바깥에 어떤 기운들이 일고 있는지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센서를 늘 작동시켜 놓는 매체다. 외부의 감정구조(structure of feeling)에 쫓기는 수동적 존재인 셈이다. 개인 작가나 창작 집단이 텔레비전 다큐멘터리에 새로운 기운을 전달했거나 전달하는 사실에 대한 관심은 그런 점에서 정당하고 유효하다 하겠다.


Ⅱ. 다큐멘터리와 텔레비전적 한계

텔레비전 방영을 목표로 만들어지는 다큐멘터리를 논의할 때는 몇 가지 한계가 전제될 필요가 있다. 변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변명이 전제되지 않은 채 텔레비전 방영을 목표로 삼지 않은 다큐멘터리와 비교하는 일은 불공정할 수 있다. 실험성이 부족하다 혹은 지나치게 대중적이다 등등의 비평은 텔레비전 방영을 목표로 작업을 벌이는 다큐멘터리에 관한 한 과녁을 벗어난 비평일 수도 있다. ‘푸른영상’의 김동원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텔레비전을 상대로 한 다큐멘터리 제작을 시도했을 때 가질 수밖에 없는 어려움을 잘 토로하고 있다(김동원·심광현, 187∼209쪽).

“… 이 무렵 다큐멘터리가 텔레비전에 진출해야 한다, 다큐의 유일한 배급통로가 TV라는 생각과 또 하나는 극장 다큐멘터리를 해야 한다, 그러니까 필름 다큐가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생각, 그리고 또 다른 생각은 80년대 잔영 같은 건데, 그런 것에 연연하지 말고 변방에 계속 남아서 게릴라적인 활동들을 해야 한다는 식으로 여러 의견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TV 쪽은 사실 시도를 해봤어요. 거기에 대해서는 만약 우리 프로그램을 사줘서 방영한다면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 [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 아무튼 TV쪽 문턱이 높기 때문에 요구 조건이나 간섭이 너무 많아서 자연스럽게 포기했고 그러면서 TV를 상대로 제작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 세워졌고 필름 다큐에 대한 욕구가 커졌습니다.”

김동원은 텔레비전적 한계가 독립 다큐멘터리 작가들에게는 너무 큰 장애로 와 닿음을 고백한 셈이다. 텔레비전이 미칠 사회적 영향력을 고려해 시도를 해보긴 했지만 역시 자신들의 정신을 살리기엔 너무 벽이 높기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김동원이 펼쳐내진 않았지만 어떤 벽일 것인가를 추정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아 보인다. 크게 3가지 정도로 나누어 설명해볼 수 있을 것 같다. 각 한계는 서로 깊게 연관되어 분리시키기 어려운 것이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나누어 설명해보았다.

첫 번째의 한계는 텔레비전 내 다른 텍스트와 너무 차이나는 형식을 채택하기 힘들다는 점이다. 시청자들은 나름의 장르적 관습을 이해하고 있긴 하지만 장르간 교류 탓에 독특한 장르적 형식에 대해서는 관용을 갖지 않는 편이다. 드라마를 비롯한 많은 프로그램들이 빠른 화면 전환, 뮤직 비디오적 분위기를 채용하고 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화면이 빨라지고, 공간을 압축하는 편집이 타 프로그램에 보편화되어 있음에 비추어 다큐멘터리에서 롱 테이크나 지독히 느린 분위기를 창출하기란 어렵다. 윌리엄스(R. Williams)가 텔레비전 매체의 특성을 흐름(flow)에 빗댄 것도 그 같은 이유일 것이다. 텔레비전 안에는 이질적인 장르들이 공존하고 있는 것 같지만 실상 하루하루의 편성 안에 짜여진 프로그램들은 하나의 큰 흐름을 이루고 있다는 지적이다. 텔레비전은 그런 점에서 ‘동해물과 백두산이 …’로 시작해서 ‘… 우리 나라 만세’로 끝나는 일종의 큰 텍스트(super-text)로 보아도 무방하다. 큰 텍스트 안에서 이방인처럼 받아들여질 텍스트를 만드는 일을 하기란 여간 어렵지 않을 것이다. 큰 텍스트의 흐름과 타협이 끊임없이 요청될 것이고 그에 응하지 않는 작가는 텔레비전 방영에 대한 고집을 접고 다른 방식으로 대중들과의 만남을 시도할 수밖에 없다. 이를 텔레비전적 흐름에 조응해야 하는 한계라고 이름 붙여두자.

두 번째의 한계는 제작 조직과 관련된 것이다. 방송사 내 다큐멘터리 작업은 마감시간이라는 한계와 정해진 제작비 내에서 이뤄져야 하는 지원의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이 한계는 일종의 마의 한계다. 마감시간을 어겨가면서, 제작비를 초과해가면서 제작을 할 방송 다큐멘터리 연출자는 없다. 이 같은 한계는 전혀 엉뚱한 결과를 낳게 된다. 판에 박힌 듯한 형식과 내용의 다큐멘터리를 양산하게 되는 결과가 그것이다. 소위 제작 관습과 공식(formula)에 맞춘 프로그램을 만들어내게 되는 것이다. 빠듯한 시간과 경제적 지원의 한계는 충분치 못한 정보 수집, 탄탄치 못한 구성을 초래하게 된다. 이 같은 한계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장엄한 내레이션, 비장한 음향, 과도한 편집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보완의 수단들이 영상을 ‘짓뭉개기도’ 하고 다큐멘터리를 주도하게 되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이를 조직적 한계라고 부르도록 하자.

세 번째의 한계는 앞의 한계와도 맞물린 사안인데, ‘개성’과 관련된 한계를 들 수 있다. 다큐멘터리가 개성을 드러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다. 특히 우리 나라 텔레비전 다큐멘터리의 경우 개성에 관한 한 심한 거부반응을 보여왔다. 다큐멘터리를 저널리즘의 변종 형태로 보는 시각이 강했기 때문이다. 이는 미국의 텔레비전 문화 영향을 강하게 받은 탓으로 짐작된다. 미국의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역사를 살펴보면 대체로 ‘실상의 드러냄’(expose)을 장르 목표로 설정하는 경향이 강함을 알 수 있다(H. Himmelstein 1987, pp. 255-291). 이 같은 경향하에서 다큐멘터리 연출가는 기자에 버금가는 정확성과 객관성 그리고 중립성을 중요한 덕목으로 삼게 된다. 시간의 펼침에 따라 사건 전개를 단선적으로 이어가야 하며 될 수 있는 한 연출자를 숨겨야 한다. 연출 자체가 실종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같은 요청은 저널리즘적 성격 강조라는 다큐멘터리 문화와도 맞물린 것이긴 하지만, 두 번째 한계로 들었던 조직의 한계 탓이기도 하다. 즉 조직적 한계를 프로페셔널리즘(professionalism)으로 위장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정해진 시간과 비용으로 제작하기 위해서는 정해진 규범이 필요하고, 그 규범이 제작에서의 진리적 영역으로 전화된 것을 프로페셔널리즘으로 본다면 이는 일종의 위장이며 개성을 막는 장애인 셈이다. 즉 우리의 - 이식된 것처럼 보이는 - 다큐멘터리 문화 전통과 조직적 한계 등이 어우러져 개성 있는 다큐멘터리의 출현을 막는 것이다. 이를 두고 개성 표출의 한계라고 부를 수 있겠다.
사실 이 같은 텔레비전 다큐멘터리의 한계는 숙명으로 받아들여져야 할 사안은 아니다. 다만 지금 현재 텔레비전 다큐멘터리가 맞고 있는 현실적 한계일 뿐이다. 그러므로 텔레비전 다큐멘터리를 평가함에 있어 적절한 기준이 될 수도 있다. 얼마만큼 그 같은 한계를 극복하려 했는가, 아니면 극복하고 있는가를 중심으로 하나의 프로그램, 혹은 한 연출자를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한계 극복의 노력이 지속적으로 이뤄졌고 뚜렷하게 드러난다면 그것은 분명 다큐멘터리 작가의 반열에 들어서기에 충분하다. 누구나 작가의 칭호를 받을 수 없고, 누구든 작가의 칭호를 받고 싶어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작가란 칭호는 창의성이나 예술성과 관련된 것이기도 하지만 결코 그것이 만들어지는 상황과 동떨어져서 논의될 수는 없다. 특히 텔레비전 다큐멘터리와 같이 조직적 산물이면서 대중적 산물인 경우엔 더욱 그러하다.
정수웅의 다큐멘터리와 그 같은 한계는 묘한 관계를 맺는다. 정수웅이 일종의 점이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독립영화 제작자들처럼 텔레비전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도 아니고 텔레비전 조직 내에 포함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 점에서 조직적 한계를 온몸으로 떠안는 것도 아니면서 완전히 자유스럽지도 않은 일종의 비범주적 위치에 있다고 하겠다. 뿐만이 아니다. 텔레비전 다큐멘터리의 관습과 공식을 완전히 버리지도 않지만 완전히 떠나 있는 것도 아니다. 눈 높이도 마찬가지다. 지나치게 대중적이지도 않고 지극히 실험적인 것도 아니다. 레비-스트로스(C. Levi-Strauss)는 신화의 이항 대립적 구성방식을 논의하면서 그 어느 쪽도 포함되지 않는 중간자적 비범주가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중간자적 비범주는 항상 요란하며(carnivalesque) 소문을 만들어내며(scandalous) 비일상적인 것이 인정되는 범상찮은(anomalous) 영역이라고 말하고 있다. 정수웅에 대해 많은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은 그가 점이적 위치, 중간자적 비범주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라 하겠다.

오해는 말아야겠다. 점이지대에 자리잡고 있는 것에 대해서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것 아닌가 하고 의심을 품을 필요는 없다. 점이지대, 중간자적 비범주적 자리는 어정쩡한 것이 아니라 긴장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맹추위 속 겨울 강가에 비유해보자. 추위를 감지하고 보무도 당당하게 얼음 위로 걸어가다 보면 육감적으로 조심스러워지는 부분이 있다. 발끝의 감촉과 곧추세운 귀 그리고 온갖 신경이 몰린 눈으로 확인하면서 조금씩 나아갈 부분이 그것이다. 물이 보이는 부분과 꽁꽁 얼은 얼음 사이의 그 영역, 몸을 후벼파는 듯한 신경이 요청되는 그 영역. 중간자적 입장은 혹 그런 것이 아닐까. 칼날 위의 영역 말이다. 후에 다시 언급되겠지만 정수웅이 장엄한 내레이션보다는 심약해 보이는 내레이션을 이용하는 것도 텔레비전적 한계와 시청자들의 내면을 긁어 보겠다는 작가적 의도가 힘들여 절충하는 선에서 마련된 지혜일 것이다. 거친 화면, 길게 찍기에 병치되는 과감한 컷 어웨이도 마찬가지로 여겨진다. 통일의 문제를 아리랑의 합창 등과 같은 정서적 통일로 결론짓는 모습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Ⅲ. 정서적 리얼리즘(emotional realism)

[동아시아 격동 100년사]. 정수웅 필생의 작품 제목이다. 그는 이 작품의 시작을 위해 2001년 6월 초 동아시아 여정에 올랐다. 이미 익숙한 여정이긴 하지만 이번의 발걸음은 장중할 수밖에 없다. 그가 어디선가 밝혔듯이 그의 대부분 작품들은 이 작품들로 수렴되기 위한 일종의 준비작업의 일환이었다(정수웅 1999, 16쪽). 만주에서 잉태되어 서울로 왔다가 피난으로 부산을 경험한 일, 본격적 다큐멘터리 제작을 위한 일본에서의 거류, 그리고 아리랑, 북한을 취재하기 위한 중국 여행들…. 이 모든 것들은 격동의 20세기 아시아를 다루기 위한 운명의 전초전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필생의 작품을 어떻게 다룰지 설명한 적은 없다. 다만 몇 가지 그가 역사를 그리는 방법을 통해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사람을 통한 역사 보기, 동아시아를 한 묶음으로 보기, 사해동포적(四海同胞的) 애정으로 다큐멘터리를 버무릴 것으로 예상된다. 일본의 역사, 중국의 역사가 곧 우리의 역사임을 그려내고, 그 나라 민초들의 경험이 결코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보여줄 것 같다.

이 같은 추정은 정수웅의 동아시아에 대한 여러 작품으로부터 받은 느낌에서 비롯된다. 정수웅의 작품은 한 사건을 추적함에 있어 기원에 머물지 않고 산포되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한국 음악의 삼박자가 과연 어느 지역까지 가족적 유사성을 지니고 있는지를 찾으러 몽고, 시베리아 지역까지 찾는 것은 물론 일본과 중국 등을 샅샅이 뒤진다([삼박자]). 우리 불상의 미소를 찾기 위해 일본, 중국, 파키스탄, 인도 그리고 아시아를 넘어서 그리스까지 찾아 나선다 ([미소의 실크로드]). 이 같은 긴 여정에서 정수웅은 민중들의 정서 속에 얼마나 공통점들이 있는지를 살핀다.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하진 않는다. 민중들의 정서를 깎고 다듬으려 기획한 검은 속셈의 권력들에 대해서도 일침을 가한다. 검은 속셈의 권력은 가능한 한 서로 다름을 드러내며 차이를 통해 통치를 용이하게 하려 했다. 정수웅은 그 같은 검은 속셈이라는 굴절에도 불구하고 다른 민족이지만 문화적 흐름과 교류를 통해서 지니고 있는 보편적 정서를 읽어내려 하는 것이다. 예전의 작품들을 통해 무리스럽게 추정해볼 용기를 내 본 것은 그가 전에 비해 더욱 정교하게 사람을 통해 역사를 읽으려는 의지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사람을 통한 역사 읽기, 동아시아를 묶어 보편적 정서를 찾아내는 일, 그리고 사해동포적 애정으로 인해 그의 작품은 묘한 정서를 자아낸다. 흔히 사람의 마음을 긁어 눈을 시큰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는 다큐멘터리를 휴먼 다큐멘터리라고 말한다. 텔레비전 속 휴먼 다큐멘터리에는 대체로 역사가 실종된다. 현재의 삶에만 주로 초점을 맞추어 대상의 내면을 그려내고 동의를 구하는 방식을 택한다. 정수웅의 작품들도 대상의 내면을 그려낸다는 점에서 일반적 텔레비전 휴먼 다큐멘터리와 비슷하다. 하지만 그 속의 주인공들을 통해 역사가 두드러지게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정수웅의 작품은 개인의 정서를 밝혀내면서 역사를 그려내고 수용자들이 정서적으로 동의하기를 요청한다. 이 독특한 역사 그려내기, 개인 드러내기에 대해 정수웅에게 질문했다. 혹 정수웅의 다큐멘터리는 정서적으로 리얼리즘을 수행해낸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고.

질문의 내용인 ‘정서적 리얼리즘’에 대한 정의는 대체로 이렇다. 논리적 정연함이 어필하는 것이 아니라 정서적 유사성이 시청자에 어필하고 시청자가 적극적으로 동의하는 프로그램의 장치를 말한다(I. Ang 1985). 정서적 리얼리즘을 추구하는 다큐멘터리 안에서 개인은 역사의 증언자가 되고, 역사는 개인과 함께 어우러진다. 문화주의적(culturalist) 접근과 비슷한 이 경향성은 역사의 큰 흐름에 억눌린 인간 존재가 아닌 힘들게 그 안에서 삶을 영위하며 역사를 기억하고 있는 존재들로 인간을 파악한다. 민중 한 사람, 한 사람의 기억이 바로 역사가 되고, 카메라는 그 역사를 찍어내고 편집해낸다. 결국 그의 작품은 정교하게 분석되고 설명될 수 없는 일종의 아포리아(aphoria)가 되고 만다. 가슴으로 읽어낼 수 있으며 가슴으로 설명될 수밖에 없는 작품인 셈이다.

그의 작품에는 헤어짐과 만남의 장면이 유난히 많다. 공동체가 역사에 의해 찢기지만 그 역사를 딛고 다시 만나려 하는 모습들에 정수웅은 애정을 갖기 때문이다. [압록강에서 만나는 사람들], [망향의 사람들], [멀고도 먼 아리랑 고개] 등은 어설프게 헤어진 사람들이 겪은 고초와 새롭게 만남을 이뤄보고자 하는 노력들을 그려낸다. 굴곡의 20세기 동아시아에서 헤어짐과 만남의 경험을 갖지 않은 이가 몇몇일까. 정수웅의 작품은 그 많은 이들에게 헤어짐과 만남의 장면을 전하며 정서적 일치감과 동의를 구해내는 것이다. 물론 그 속에 포함된 역사에 대한 증오와 안타까움의 정서도 함께 말이다.

정서적 리얼리즘의 독특한 다큐멘터리는 과연 역사를 전달할 수 있는가라는 심각한 질문을 자아낸다. 개인의 심리를 통해 역사를 용해함으로써 오히려 역사가 개인의 정서에 묻혀 버릴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1992년의 [시베리아 한의 노래]에서는 이규철이라는 할아버지를 통해 일제하 조선 청년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의 역사를 전한다. 이규철 할아버지는 자신이 전전했던 러시아 땅 이곳 저곳을 찾아다니며 나라 잃은 슬픔과 역사를 같이했던 사람들과의 만남을 전해준다. 간간이 역사 자료를 활용했지만 프로그램에서 이규철 할아버지는 역사의 한가운데 선다. 그의 입을 통해 역사가 펼쳐지고 역사는 그 안으로 용해된다. 다른 작품에서도 이 같은 역사 그려내기는 마찬가지로 연출된다. 영화 [아름다운 시절]에서도 역사는 이와 비슷하게 그려진다. 감독은 작은 역사인 사람들의 기억을 더욱 중요한 것으로 드러내기 위해 개인사적 사건을 설명하는 자막에서 큰 글자를 사용하고, 기억과 비슷하게 벌어진 정치적 사건들을 설명하는 자막에서는 작은 글자를 사용한다. 소위 큰 역사인 정치적 사건을 작게, 작은 역사인 민중들의 기억을 크게 그려낸 셈이다. 그 영화의 역사 그리기에 대해선 많은 이들이 말을 아꼈다. 비교적 성공했다는 평가 때문이리라. 하지만 [아름다운 시절]은 픽션이고 정수웅의 작품은 다큐멘터리이다. 정수웅은 기록화면 몇 개와 인터뷰 몇 개로 만들어내는 역사 다큐멘터리를 만들지 않는다고 여러 인터뷰에서 밝히고 있다. 개인을 추적하면서 그 안에서 역사를 그려내겠다는 의지다. 그는 그렇게 계속 갈 것이지만 비평가들에게는 약간의 숙제가 남는다.1)그의 정서적 리얼리즘이 어떤 사회적 효과를 자아낼지에 대해서는 더 많은 논의들이 요청된다. 그 같은 다큐멘터리도 역사를 오롯이 전달할 여지가 있는 것일까 등에 대한 논의가 요청되는 것이다.


Ⅳ. ‘거친’ 다큐멘터리

압록강변으로 여러 이산가족과 함께 여행을 떠난다([압록강에서 만나는 사람들]). 이산가족들은 압록강변에서 아들을 찾고, 여동생을 찾아낸다. 한 노인은 강을 건너온 조카와 상봉한다. 정수웅은 그들의 얼굴을 - 모자이크 처리 등으로 - 가리지 않고 잡아낸다. 만남의 기쁨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싶은 탓이다. 한 인터뷰에서 북한 주민들이 텔레비전에 등장한 다음 불이익을 당하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그는 당당히 “북한으로 가야죠. 미안하다는 말을 전해야죠.”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저널리즘에 자주 비유한다. 그러나 일반적인 저널리즘과는 차별을 둔다. 무한 책임의 저널리즘으로 자신의 작품을 규정한다. 어려운 역사를 살아온 이들의 한을 달래주고, 그들의 한풀이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며, 만약 그러지 못했을 때는 끝까지 책임을 지는 그런 저널리즘으로 자신의 작품을 풀이한다.

타임 캡슐 다큐멘터리. 그의 설명을 듣고 그렇게 정의해보았다. 후일 타임 캡슐을 열어보고 자신의 다큐멘터리를 상영한 후 ‘정수웅이 얼마나 책임있는 발언을 했으며 작품에 나타난 사람들의 한에 접근했으며 풀려고 노력했는지’를 평가하는 작업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2)그래서 그의 작품 속 등장인물들은 유난히 그와 가까워 보인다. 정수웅이 피사체로 하여금 그를 신뢰하도록, 마음을 열도록 노력했기 때문이다. 정수웅과 가까운 동료 다큐멘터리 작가 윤동혁은 “그는 인간에 대한 기본 애정을 가지고 있다. 애정을 어떻게 표현할까, 그것이 그의 작업정신이다. 우리는 멋떨어지게 하려고만 한다. 그는 늘 인간에 대한 애정을 어떻게 뽑아낼까에 관심을 보인다. 그래서 품격이 있다.”고 말한다.3)그래서 그의 작품에는 유난히 롱 테이크가 많고 음악과 내레이션이 한정된다. 카메라를 열어 놓고 피사체에 가까워지려 노력하고 그들이 한을 스스로 말하게 하고(let them speak themselves) 그리고 책임지려 한다.

정수웅은 자신의 다큐멘터리가 저널리즘이되 개성의 저널리즘이길 원한다. 정수웅이 조직을 벗어나 개인으로 작품을 하게 된 동기도 그런 점에서 비롯된지도 모른다. 1982년 전두환의 전기를 다큐멘터리로 만들 것을 거부하면서 KBS를 떠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다른 속내를 전했다. “물론 그 이유도 있었지만 정말 훌륭한 다큐멘터리를 영원히 만들고 싶었다. 영국의 스왈로우(Norman Swallow)가 쓴 [Factual Television]을 읽고 정말 그처럼 살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컸기 때문에 미련없이 회사를 떠났다.”고 밝혔다.4)자신의 작품을 만드는 데 조직이 장애가 될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장애로 여겨지던 것을 털어 냈던 그 해 일본의 기록영화센터(NAV)로 떠난다. 일본에서 본격적인 다큐멘터리 수업에 들어가면서 자신만의 개성 있는 저널리즘을 만드는 계기가 된다. 그가 대학시절 다큐멘터리 작가가 되겠다고 꿈꾸게 만들었던 책인 [다큐멘터리 극장]의 저자인 우시야마 준이찌(牛山純一)와 함께 할 수 있었고, 많은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만의 개성을 드러낼 준비를 할 수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민족의 한이라는 일생의 주제를 찾아내는 개가를 올린다. 일본에서의 2년을 기점으로 그의 작품 주제는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작품 연보 참조). 민족문화를 그려내는 작업에서 민족의 한을 그리는 작업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그 전환을 기점으로 책임지는 저널리즘으로서의 다큐멘터리라는 개념이 그에게 형성되었을 것이고, 작업이 진전되면서 그의 개성이 형성되었으리라.

그의 저널리즘 아니 다큐멘터리에는 정말 그만의 개성이 들어가 있는 것일까? 그의 작품에는 버려질 만한 화면들이 많이 들어가 있다. 전혀 구도가 제대로 잡히지 않은 장면이라든지, 정식으로 하자면 엉터리 같아 보이는 숏들도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한마디로 그의 작품은 거친 편이다. 해를 거듭하면서 거친 정도는 더해간다. 끊임없이 연출을 배제하려는 욕망이 그를 더욱 강하게 짓누르기 때문일 것이다. [망향의 섬]에는 40여 년 전에 가매장하고 온 어머니의 무덤을 기억을 더듬어 찾아내는 한 사내의 장면이 있다. 어머니의 무덤에 소나무가 자라고 있는 것을 보곤 그는 미친 듯이 뿌리를 뽑으려 하다 이내 지쳐 쓰러지고 만다. 장면은 컷 어웨이 없이 그의 미친 듯한 모습, 쓰러져 방백하는 모습을 잡아낸다. 정말 거칠기 짝이 없는 그림이다. 그러나 그는 작품 안에 이를 고스란히 포함시켜 놓았다.

일본의 다큐멘터리를 어떤 분위기로 일괄할 수 있을까를 물었다. ‘잘 짜여짐, 그러나 연약함’이라는 대답을 얻어냈다. 일본통으로 불리우는 정수웅이 일본의 다큐멘터리를 그렇게 말하고 있다는 사실과 자신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거칠음을 종합해보면 그의 개성은 ‘거칠음’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결코 연출하지 않으며 피사체에 많은 주문을 하지 않는 그야말로 저널리즘적 속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연출하지 않은 채 그가 남이 좀체 포착하기 힘든 것을 잡아낼 기회를 가졌던 것은 - 그는 인터뷰 내내 행운이라고 말했지만 - 마음과 카메라를 연 채 인내심을 발휘한 탓이리라. 그의 개성 있는 저널리즘은 그가 늘 입버릇처럼 말하는 인내심과 꾸밈없는 화면으로5)인한 것으로 보인다.

정수웅이 카메라에서 손을 뗐을 때 타임 캡슐에 어떤 작품을 넣을지는 자신이 없다. 그도 망설일 것 같다. 늘 만들고 난 후엔 꼴도 보기 싫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해왔으니 말이다. 하지만 선택하는 나름의 원칙은 있을 것이다. 그가 그토록 소중히 여겼던 따뜻한 마음으로 책임 있게 발언하고, 그의 색채가 듬뿍 담긴 것으로 선택하지 않을까. 그 자신도 따뜻하고 책임지는 작가일 뿐 아니라 개성 넘치던 작가, 저널리스트로 기억되기를 욕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방송사에서 결코 그려내지 못했던 쪽으로 선택의 손이 가지 않을까. 아무래도 그는 방송사가 해내는 저널리즘적 다큐멘터리와는 차이를 두려하기 때문이다. 우주에서 파견된 스파이임을 자부하는 그는6)지구를 늘 모순된 역사의 연속으로, 그러나 그 안에는 어려운 생활을 영위해가는 사람들의 장소로 여기고 있다. 우주로부터의 스파이 손에 잡힌 카메라는 그것들을 결코 피해가지 않을 것이며, 지구의 진실을 파헤치는 저널리스트의 펜이 될 것이다.

Ⅴ. ‘홀로’ 다큐멘터리

그는 장비를 매우 아끼며 늘 새로운 장비에 관심을 보인다고 말한다. 특히 혼자 제작할 수 있는 여건을 더욱 살려줄 수 있는 장비에 늘 관심을 갖는다고 한다. 모든 제작과정을 혼자 해내며 개성을 살리는 데 있어 제작장비는 매우 중요한 기반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하는 셈이다. 사실 디지털 기술로 인한 새로운 장비들의 등장이 없었더라면 정수웅의 일인 제작 시스템이 제대로 성사되지 못했을 수도 있다. 혼자 기획하고, 구성하고, 촬영하고, 편집하는 작업이 가능했기에 작품 안에 그의 정신을 불어넣는 일이 가능했던 것이다.

정수웅은 현재의 방송 시스템은 그 같은 장비의 진전을 기반으로 한 개성있는 다큐멘터리 연출자의 탄생을 막는다고 파악하고 있다. 텔레비전 방송사 조직은 다큐멘터리를 혼자 창의적으로 제작하는 풍토를 조성하고 있지 못하다고 말하는 셈이다. 다큐멘터리 PD에 가해지는 노동강도를 감안한 판단이다. 정수웅은 내내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프로듀서가 연출에만 전념하는 제작 시스템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수달 사건’을 매우 창피하게 여기면서도 원인을 시스템에 가져가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가 현재의 시스템을 안타깝게 여기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역량이 엿보이는 후배들이 많다고 그는 말한다. 그리고 방송에 아무런 지장이 없는 깨끗한 화면을 제공하는 작은 카메라와 편집장비의 등장 등을 목도하고 있음을 말한다. 영상 세대 후배들의 약진, 일인 제작을 가능케 해주는 기기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방송사의 제작 시스템은 요지부동이다. 현재의 제작 시스템은 새로운 젊은 역량을 배려하지도 못하고, 디지털 기술을 활용하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는 언제나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

정수웅은 섣불리 자신과 같은 길을 걷기를 동료나 후배들에게 권하진 않는다. 그 길이 얼마나 어려운 길인지를 너무도 처절히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은 - 여러 번에 걸쳐 자신을 행운이 넘치는 사람이라고 말했듯이 - 일본을 경험할 기회가 있었고 그 기회를 통해 일본의 도움을 여러 번 받았기에 방송사 조직을 떠났어도 작품을 제대로 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방송사를 떠난 유능한 몇몇 후배들은 역량 발휘는커녕 방송사의 주문에 허덕이고 있다며 안타깝게 여기고 있었다. 개성 있는 작품의 제작을 위해 방송사를 떠나고들 있지만 결코 쉽게 개성을 발휘할 기회를 잡지 못하는 현실에 혀를 차는 셈이다. 앞서 말했듯이 방송사 조직과의 결별은 살얼음을 걷는 제작 여건을 선사할 뿐이다. 방송사와 비교적 대등한 입장에서 협상을 해내고 있는 그가 그런 긴장을 늘 가지고 있을진대 독립 프로덕션을 세워놓고 방송사로부터 프로그램 한두 개를 수주받아야 하는 입장의 다큐멘터리스트들의 경우는 더욱 심한 긴장관계에 놓여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정수웅은 작품으로 자신을 말하는 작가이면서 중요한 산업적 모델로 여겨질 수도 있다. 홀로 다큐멘터리를 만들 수 있는 제작 시스템으로서의 정수웅 말이다.

방송법의 개정으로 앞으로 방송사의 외주 비율은 점점 더 높아갈 전망이다. 외주제작 비율이 높아감에 따라 방송사들은 심각한 문제들에 봉착한다. 앞으로 더 높아질 비율까지 감안한다면 제작 인원의 대폭 삭감이라는 특단의 조처를 내리지 않을 수 없다. 몇몇 방송사들은 신규 인력 채용을 비켜가며 계약직 사원으로 모자라는 인력을 채우고 있다 한다. 결국 인력 수급의 원활함이 깨지기 시작한 셈이다. 그로 인해 생기는 폐단은 많지만 무엇보다도 후속 인력을 위한 교육문제의 심각성을 들지 않을 수 없다. PD - AD, 사수 - 조수로 이어지는 교육 시스템이 붕괴하기 시작한 것이다. AD 인력을 계약직 사원으로 대신하다 보니 제작 노하우의 전수가 방송사 내에서 이뤄지지 않게 된다. 물론 기존의 사수 - 조수의 도제 시스템이 지속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논의의 요지는 방송사 내부에서의 제작 노하우의 파급, 전수가 어렵게 되고 있다는 점이다. 외주 제작 비율이 높아지고, 그로 인해 방송사들이 제작 인원에 대한 조정을 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새로운 인력의 방송사 진입이 줄어듦으로써 제작 현장에 새로운 인력이 공급되지 않고, 제작 노하우가 전수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결국 방송사로서는 제작 시스템과 외주방식을 개선하는 지혜를 발휘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정수웅이 온몸으로 그 실마리가 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정수웅의 일인 밴드(이는 일본인들이 붙여준 이름이라 한다)가 지금의 제작 시스템을 바꾸고 역량있는 젊은 다큐멘터리스트를 육성하는 완전한 모델일 수는 없다. 오히려 그의 일인 밴드를 타산지석으로 삼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일인 밴드라는 제작 시스템을 통해 국제적으로 명성을 올리고 있는 점을 인정한다면, 우리 작품의 해외진출을 여전히 소중히 여기고 있다면, 그의 제작 시스템을 분명 연구대상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끊임없이 소재를 고민해야 하고, 글을 적어내고, 혼자 여행하고, 심지어는 재원(fund)까지 걱정해야 하는 고생을 조금이라도 덜고 연출에만 전념할 수 있는 다큐멘터리 제작환경을 만들기 위한 아이디어를 내기 위해 정수웅을 타산지석으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가 만들어낸 부가가치를 정산해 본 후 과연 그와 비슷한 다큐멘터리 제작 시스템이 얼마나 효율적인지를 따져보는 속물적 지혜도 필요할 것 같다.


Ⅵ. 에필로그

그를 작가라 부르기 위해, 다큐멘터리 제작을 위한 환경 개선을 위한 실마리임을 드러내기 위해 여러 길을 에둘러 왔다. 그가 지닌 개성을 말하기도 했고, 그의 작품 색깔을 짐작하기도 했고, 그의 욕망을 들추어보기도 했다. 그러나 글월로 정수웅을 다 구성해낼 수는 없다. 이미 그는 그 이상의 존재임에 틀림없다. 그를 기술하기 위해 나누었던 이야기들은 정말 정수웅의 말대로 지구를 살펴보는 우주에서 온 스파이의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더 이상 한 맺힌 일들이 없어 스파이의 역할이 사라지길 원하는, 자기존재 부정을 욕망하는 허수룩한 스파이의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정수웅이 카메라를 메고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님은 아직 태평 성월이 오지 않았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세상의 평화와 모순을 지표하는 리트머스인 셈이다.

다큐멘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다. 방송가에서도 다큐멘터리는 누구나가 꿈꿔보는 종착 장르로 여겨진다. 하지만 누구도 섣불리 자신을 진정한 다큐멘터리스트라 부르지 못한다. 그 길이 너무 힘들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 아닐까. 리트머스가 되어야 하고, 우주로부터의 스파이 역할도 해야 하고, 먼길을 홀로 고통스럽게 걸어야 하고, 그러면서도 축하의 박수와 스포트라이트가 없는 길. 그것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 아닐까. 아직은 누구도 가보지 않았던 길을 갔었고, 이제 어느 정도 그 길의 험난함이나마 알려준 정수웅. 그가 이 페이지에 올라 작가로 대접받는 일에 누구든 동의할 것이라 믿는다. 오히려 적은 찬사에 분노하지는 않을까. 필생의 역작을 위해 다시 짐을 꾸려 먼길을 떠나는 정수웅에 무운을 빌어본다.


정수웅 감독의 작품 연보


  • 1974 : [거북의 나라] (KBS)
  • 1975 : [강화도] (KBS)
  • 1977 : [초분] (KBS 및 세계 24개국 방영)
  • 1978 : [불교 문화의 원류를 찾아서] (KBS)
  • 1979 : [비구니의 세계 석남사] (KBS)
  • 1980 : [신라의 신비 대왕암] (KBS)
  • 1982 : [사자의 결혼식], [기적의 손] 등 6편 (일본 NTV)
  • 1985 : [잃어버린 범종을 찾아서] (MBC)
  • 1986 : [해녀의 고향 우도] (일본 NTV)
  • 1989 : [중국 기행 - 아리랑 환상곡] (KBS), [남태평양의 원혼들 - 포로감시원] (MBC, NHK)
  • 1990 : [송화강, 한인의 숨결] (MBC)
  • 1991 : [쓰루가의 아리랑 환상곡] (MBC)
  • 1992 : [시베리아 한의 노래] (MBC)
  • 1993 : [노예 소년 안토니오 코레아] (MBC)
  • 1994 : [3박자] (KBS), [망향의 섬들] (NHK)
  • 1995 : [애환의 반세기] (MBC, NHK), [휴전선의 아이들] (MBC), [잃어버린 50년, 캄차카의 한인들] (MBC), [21세기를 향하는 일본의 텔레비전] (MBC)
  • 1996 : [압록강 두만강 3300리] (MBC, NHK), [일본의 여성 21세기] (MBC)
  • 1997 : [멀고도 먼 아리랑 고개] (KBS), [압록강에서 만나는 사람들] (MBC, NHK)
  • 1998 : [어느 축구 감독의 투혼] (KBS), [미소의 실크로드] (KBS, NHK)
  • 1999 : [태평양 전쟁 최후의 외무대신 도고 시게노리] (KBS, NHK)

참고문헌


  • 김동원·심광현, “작가와의 대담 - 다큐멘터리의 여정 : 공동체라는 화두 풀기”, 《문화과학》, 16호, 1998, 187∼209쪽.
  • 정수웅, 《일본 역사를 바꾼 조선인》, 동아시아, 1999.
  • Ang, I., Watching Dallas: Soap Opera and the Melodramatic Imagination, London : Methuen, 1985.
  • Himmelstein, H., “Television News and the Television Documentary,” in H. Newcomb (ed.), Television : The Critical View, New York : Oxford University Press, 1987, pp. 255-2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