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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기획] - 고향이야기

            고향이야기

당신의 고향은 ‘어디’에 있습니까?

고향은 ‘삶에 대한 사랑’의 또 다른 이름 고향은 그리움이다. 우리는 항상 무엇인가를 그리워하며 살고 있다. 무엇에 대한 그리움인가? 지금 여기 없는 것에 대한 그리움이다. 그 때는 있었는데 지금은 없는 것, 거기에는 있었는데 여기에는 없는 것, 그때는 가졌었는데 지금은 갖지 못한 것들…. 마음이 쓸쓸하고 허허로울 때, 일이 힘들고 사는 게 고달퍼 세상이 강팍하고 인정 없다 여겨질 때, 우리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러나 그렇게 찾아간 고향에는 이미 ‘그 때의 고향’은 사라지고 없다. 오직 뭉그러지고 흉물스런 문명의 껍데기만 있을 뿐, 우리를 포근하게 감싸 줄 따스한 고향의 알맹이는 없다.
이제 그 그리움의 알맹이를 찾아 떠나고 싶다. 따스하고 포근한 고향의 이미지들… 노란 은행나무길, 휘어진 철길과 빛 바랜 간이역, 눈 내리는 처마 밑의 고드름, 굴뚝에 피어나는 연기를 다시 보고 싶다. 덜컹거리는 완행 열차 안에서 까 먹으라며, 싫다 해도 어머닌 삶은 계란을 안기셨지. 뙤약볕에 비료 뿌리던 손 도랑물에 씻고 아버지가 따 주시던 개구리 참외의 맛. 그것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가난한 두메 산골로 시집간 누이가 방학 때 찾아간 내게 쥐어 주던 꼬깃 꼬깃한 돈들. 누이는 다시 오라며 젖은 눈으로 말했었는데… 길 가던 내가 형의 발등 위로 올라선다. 눈 감고 “어디까지 왔나~?” 찬찬히 들려오는 형의 목소리 “아직 멀었~다.”… 이제 고향엔 그것들은 없고 내 마음에 남은 그리움만 있다.
고향이란 이미지 속에는 삶을 여유롭고 윤택하게 해 주는 따스함과 포근함이 있다. 배고프고 춥고 구질 구질했던 시절, 그 때의 찌들린 삶에서 피어 오르던 인간애야말로 어려움 속에서도 서로 도우며 열심히 살게 했던 생활의 원동력이었을 게다. 궁핍해도 사는 게 행복이라는 믿음, 그것이 삶에 대한 긍정성이고 진정성이 아니겠는가? 어떤 어려움과 고단함도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든든하게 지탱해 주었고 피끓는 젊음의 열정과 노력과 사랑은 어려움을 이겨 내게 했다. 그렇듯 어려운 여건을 탓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그리고 치열하게 살았던 모습들은 아름답다. 가난했어도 정신적으로는 풍요로웠던 그 시절이야말로 어쩌면 진짜 ‘화려한 시절’이었는지도 모른다.
[화려한 시절]을 제작하면서 고향의 의미, 그리움의 실체를 영상에 담아 보려 애를 쓴다. 하지만 이제는 너무 많이 망가지고 변해서 그 시절의 모습을 제대로 담아 낼 수 없음에 아쉽기만 하다. 고향은 있지만, 이제 고향은 없다. 그러나 고향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순수한 의미, 곧 삶을 열심히 살고 사람을 사랑하라는 것만 가슴에 담고 산다면…. 고향은 그것을 그리는 사람의 마음 속에 언제나 있을 것이다. 그 때, 찾아가도 없는 고향은 우리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있을 것이다.

 

고향, 내 몸이 기억하는 세상의 모든 곳
지난 1월 9일, 펑크록 그룹 <황신혜 밴드>가 벌인 ‘신명 대 부흥회’라는 재미난 이름의 콘서트가 열린 날이었다. 공연 후반부의 앵콜 무대. 언제나 그렇듯 ‘잘 살아 보세 잘 살아 보세’ 합창으로 이어져야 할 순서에 왠 ‘쾌지나 칭칭’이 나오더니, 이내 ‘강강 술래’로 넘어가 버리는 게 아닌가. 그 애드립에 젊은 관객들이 어리둥절,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 때 혜성같이 나타난 사나이가 있었으니, 그 이름은 진도 맨! 어린 시절부터 혹독한 강강 술래 수련을 쌓은 그는 전혀 흔들림없이 관객들을 이끌어 족히 20분은 이어진 강강 술래판을 만들어 냈으니, 그가 누구냐? 누구긴 누구겠는가. 나지.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내 ‘공식적인’, 그러니까 글쟁이로서 소개란에 실리는 출생지는 전남 진도다. 행정적인(우리 삶에는 왜 그리 행정적인 절차들이 많은지!) 편의를 위해 본적지를 서울로 옮겨 왔지만, 고향을 묻는 사람들에게 나는 언제나 ‘진도’라고 말한다. 부모님 고향이 그 곳이므로 원적지야 당연히 진도지만, 그러나 그 곳이 내 고향일 수 있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어머니가 나를 거기서 잉태하고 서울로 올라오셨다는 것. 곧 내 생명의 시작처이기 때문이다. 내 몸의 고향, 진도.
물론 자주 가 보지는 못했다. 부모님의 직계 가족들은 모두 고향을 떠났고 일가 친척들만 남아 있었으니. 초등 학교 6학년 여름 방학 때 한 달쯤 살아 본 것이 사실 내가 진도에 대해 갖고 있는 유일한 유년 시절의 기억이다. 그렇기에 왠만한 나이가 되었어도 한 번도 진도를 내 고향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러다가, 입대를 얼마 앞두고는 아버지의 엄명에 따라 진도의 할아버지 묘소를 찾은 적이 있었다. 인사를 끝내고 무덤에서 돌아오던 길, 옆의 비탈밭에서 김을 매고 계신 아주머니 몇 분과 눈길이 마주쳤다. 엉겁결에 인사를 드리자 한 아주머니가 물으신다. “아가, 니가 혹시 서울 기승 씨 아들 아니냐?”
열세 살 초등 학생 때의 나를 보았다 하더라도, 그 때 난 이미 스물세 살 장성한 청년이었다. 그런데도 아주머니는 10년 만에 본 나를 한눈에 알아 보셨던 것이다. 핏줄이란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고향은 또 얼마나 피처럼 면면히 내 몸을 흘러왔던 것인지를, 그 날 처음으로 깨달았다.
<황신혜 밴드> 공연장의 강강 술래판에서 내 몸은 정말 ‘본능적으로’ 반응했다. 어릴 적 여름 방학 한 달을 보내지 않았더라도, 그 곳의 기운과 문화는 여전히 내 몸 안에 기록되어 있었다. 때문에 설령 몸은 그 곳을 떠나왔지만 고향은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마치 유전자 부호처럼 내 몸 안에 각인된 진도 땅의 기운과 문화… 그것들은 거기, 바로 ‘이 몸 안에’ 담겨 있었다. 그렇다면 고향은 결국 몸의 기억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설령 다시는 돌아가지 못한다 해도, 몸이 기억하고 있는 한 사라지지 않는 것들….
가만, 내 몸이 기억하는 땅이 고향이라고? 그렇다면 잠시라도 내 몸이 머물렀던 모든 곳이 다 내 고향이 될 수 있겠다. 독일 외틀링엔 숲 속의 오솔길, 인도 캘커타의 쓰레기투성이 골목길, 네팔 안나푸르나의 눈 덮인 산길, 그 모든 땅의 기운이 다 내 몸 안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가? 어쩌면 내 ‘공식적’인 고향을 바꿔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내 몸이 가 있었던 세상의 모든 곳’으로….

 

내 고향집 주소는 ‘5학년 7반’입니다!
남들보다 하루 이틀 빠른 오늘을 살고 있다. 24절기, 발렌타인 데이, 로즈 데이에 엘로우 데이까지, 무슨 날이든 꼬박 꼬박 챙기는 습관도 생겼다. 특히 명절이나 성탄절이면 ‘어떤 특집을 준비할까’로 항상 고민한다. 한 달에 한 번꼴로 돌아오는 특집이지만 그러나 이 달은 조금 더 특별하다. 왜냐고? 라디오 1년 농사를 가늠하는 결정적인 특집, 바로 ‘설’ 특집이니까. 올해도 나는 또 고향에 관한 사연을 보내 달라고, 기억나는 설의 비밀스런 추억들을 끄집어 내 달라며 주파수를 맞추고 있는 많은 이들에게 얘기할 게다. 그리고 아마도 나는, 그러다 또 나만의 비밀스런 기억 속에 빠져들 게다. 홀연 떠오르는… 내 아련한 기억이 돌아가는 그 때의 얼굴들에게….
얼마 전 초등 학교 친구가 메일을 한 통 보내 왔다. 동창회를 했었는데 꽤 많은 아이들이 모였단다. 당연히 지난 추억들을 떠올리며 즐거워했을 테고, 그러다 보니 그 때의 내 모습에 대해서도 얘기를 나누었나 보다. 친구는 문득 내가 생각나 메일을 보내게 됐다고 했다. 그렇다, 생각해 보니 내게 있어 ‘고향’이라는 거창한 단어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장소는 바로 초등 학교였던 것 같다. 5학년 7반.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할아버지 선생님이 계셨고 장난끼로 똘똘 뭉친 개구쟁이 남학생들, 그리고 그 중 내 마음을 홀딱 빼앗았던 그 큰 키의 남학생도 있었다. 우리 중 가장 고무줄을 잘 했던 정옥이, 훌쩍 훌쩍 잘 울었던 정애, 얼굴이 까맣던 미혜… 언제 기억해도 입꼬리가 자꾸만 올라가는 나의 친구들이 있었다. 어느 때 찾아가도 반가이 맞아 줄 것 같고 아무리 미안한 짓을 했어도 한 번 씨익 웃고 나면 다 용서해 줄 것 같은 그들. 나는 그들에게서 고향을 느끼곤 한다.
사람들은 고향에 참 많은 의미를 부여한다. 꼭 성공해서 고향에 돌아가겠다고, 그렇지 않으면 다시는 그 곳을 찾지 않겠다고. 이런 다짐과 부담은 아마 나의 모든 모습을 기억하는 이들이 있어서일 것이다. 그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것, 그리고 그들에게 좀더 좋은 모습으로 나를 기억시키고 싶다는 것, 아마도 그런 마음이 아닐까 싶다.
올해 설 연휴에도 나는 스튜디오에 남아 아름다운 사연과 행복한 음악으로 귀성길을 밝히고 있을 게다. 고향을 향해 연어떼처럼 추억의 시간을 거슬러 오를 그들을 보며, 그러나 나는 혼자 남은 서울이 외롭지만은 않을 듯하다. 나는 그 때 그 친구들과 함께했던 5학년 7반의 기억으로 귀성하고 있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