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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세상- 너희가 트롯을 아느냐

            너희가 트롯을 아느냐
트롯의 삼총사, “곰삭은 노래의 맛을 보여 드립니다!”

트롯(trot)! 원래 4분의 4박자로 강약이 반복된다 해서 ‘뽕짝’이라고도 불리우는 음악. 비교적 쉽고 대중적인 음악이라고도 하지만 요즘엔 장르와 관계 없이 젊은 층의 음악과 구분하기 위한 용어가 되는 듯하다. 하지만 트롯은 멈춰 있는 음악이 아니다. 젊은 음악에 비해 더 긴 호흡으로 숨쉬고 있다. 그렇게 생명력을 갖고 이 땅에 뿌리내려온 트롯이건만 이젠 라디오에서조차 노출 빈도가 희박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트롯을 방송하는 프로그램이 흔치 않은 요즘, SBS 라디오에는 ‘트롯의 전도사’라 자부하는 프로그램들이 있다. 숫제 ‘트롯 브라더스’라고나 할까.

 

추억의 가락, [김태욱의 쿵짝! 노래는 트롯]

“야간에 사우나 카운터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24시간 사우나에서 일하면서 인생을 다시 시작하게 됐어요. 옛 시절 좋아하던 노래 신청하죠. ‘꽃을 든 남자’요….” Love FM(FM 103.5MHz)을 통해 매일 새벽 네 시부터 방송되는 [김태욱의 쿵짝! 노래는 트롯]에 온 사연이다. 청소년 프로그램의 그것과는 다른 색깔의 것들이다.
24시간 사우나뿐만 아니라 화물 트럭 운전 기사, 노인분들, 밤을 꼬박 새우며 일하는 사람, 새벽에 일 나가는 사람 등의 새벽 시간에 깨어 있는 사람들이 이 프로그램의 주 애청자들이다. “이따금 젊은 층도 신청곡을 올리고 사연도 남겨서 놀랄 때가 있죠. 어쩌면 트롯은 특정 연령층만의 음악 장르가 아니란 생각도 들어요.” 불혹의 나이라 믿어지지 않을 만큼 동안(童顔)을 가진 김태욱 아나운서의 말.
[김태욱의 쿵짝! 노래는 트롯]은 1960년대부터 80년대에 이르는 지나간 성인 가요를 주로 선곡한다. 노래는 단지 노래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386세대를 비롯해 다양한 연령층의 추억을 일깨워 주는 촉매 역할을 하는 것이다. “새로 발표되는 트롯 음악에 대해서 아쉬운 점은 과거의 가요처럼 주옥 같은 노래가 요즘엔 그다지 많지 않다는 점입니다.” 최신 트롯에서 뭔가 부족한 점이 있다는 김동운 프로듀서의 말이다. 그래서 선곡은 과거의 노래가 80퍼센트를 차지한다. 물론 진행자의 역할도 중요한 부분인데, 이 점에 대해 김동운 프로듀서는 진행자 김태욱 아나운서를 다음과 같이 평한다.
“목소리가 일단 매력적이고 연령도 그렇고… 진행자로서 이상적인 조건을 갖췄죠. 노래를 참 많이 아는데 한 곡에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까지도 줄줄 꿰는 걸 보고 깜짝깜짝 놀라기도 합니다.”

 

트롯 만물 박사, [태진아의 대한 민국 가요 쇼]

송대관 오빠의 생일을 축하한다는 어느 여성 청취자의 사연이다. “안녕하세요? 태진아 아저씨… 전 대학교 졸업반 학생인데요. 사실 오늘은 송대관 아저씨 생일이 아니라 제 남자 친구 생일입니다. 제 남자 친구가 송대관 씨하고 똑같이 생겼거든요. 이 대 팔 가르마에 꺾어지는 ‘네 박자’ 노래도. 많이 많이 축하해 주세요.”
Love FM(FM 103.5MHz)을 통해 매일 오후 네 시부터 다섯 시까지 진행되는 [태진아의 대한 민국 가요 쇼]는 그 거창한 제목만큼이나 다양한 계층이 찾아오는 프로그램이다. 프로그램 제목을 지은 사람은 박동주 프로듀서. “대한 민국 국민 모두가 사랑하고 참여하는 프로그램으로 만들겠다는 의지로 타이틀을 정했죠.” 진행자인 태진아 씨에게 프로그램 제목에 대해 묻자 한마디로 대답한다. “예술이죠.”
[태진아의 대한 민국 가요 쇼]에는 매일 코너로 ‘태 박사 메들리 한마당’이란 순서가 있는데 네 곡을 한 절씩만 메들리로 듣게 된다. ‘앞마당은 에피타이저이고 뒷마당은 디저트’라는 것이 김영우 프로듀서의 설명. 자칫 긴장이 흐트러지는 시간대임을 감안해 듣는 이들에게 좀더 활력을 주자는 제작진의 의도가 두드러지는 코너이다.
“택시를 탈 때마다 기사님들에게 정말 잘 듣고 있다는 말을 들을 때가 가장 행복하죠.” 왕성한 연예계 활동을 하면서도 매일 오후에 청취자들을 만나는 것이 또 다른 기쁨이라고 말하는 트롯의 일인자 태진아 씨의 행복론이다. 그는 또 강민주, 이혜리, 유지나의 ‘트롯 여인 천하’와 한혜진의 ‘트롯 리서치’, 한용진의 ‘트롯 리믹스’까지, 코너만으로도 트롯에 관한 백한 가지 이야기가 나오게 되는 요소가 바로 [태진아의 대한 민국 가요 쇼]에 담겨 있다고 주장한다.

 

건강한 삶, [김정일의 트롯 하이웨이]

‘가슴을 후벼파는 가사와 멜로디가 좋아서, 트롯은 신이 주신 선물이라 생각’한다는 김정일 아나운서. 조금 과장된 표현이지만 그러나 그의 남다른 트롯 사랑을 알고 나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Power FM(FM 107.7MHz)을 통해 매일 새벽 다섯 시에 문을 여는 [김정일의 트롯 하이웨이]에는 게으른 청취자가 없다. ‘이른 새벽에 방송되는 프로그램답게 모두가 부지런한 애청자들 뿐’이라는 것이 이진규 프로듀서의 주장.
“남해 고속 도로 평사 휴게소에서 일하는 이인숙 씨라는 분이 있어요. 아마 주방에서 일하는 분 같은데 휴게소 사장님이 해외 여행을 보내 줄 만큼 정말 열심히 사는 분이죠. 그런 분들이 단골 손님들이에요.” 그밖에도 고속 도로를 이용해 장거리 출근을 하는 사람, 24시간 편의점 같은 곳에서 일하는 땀 냄새 나는 건강한 사람들이 애청자들이다.
[트롯 하이웨이]에서 검도 유단자인 김정일 아나운서를 이르는 공식 호칭은 ‘위원장님’이다. 인터넷에 올라오는 사연마다 첫 인사가 ‘위원장님’인데, 남북 화해에도 일조하는 것 같아 이젠 본인 스스로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단다.
이따금 아버지뻘 되는 애청자에게서 이런 질문도 나온다. “위원장님이 젊은 거 같은데 그 나이에 트롯을 알면 얼마나 알겠수?” 하지만 김정일 아나운서는 노래방 애창곡이 오기택의 ‘영등포의 밤’과 배호의 ‘돌아가는 삼각지’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천상 트롯 프로그램 진행자다운 자세다.
“사람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가요 장르가 너무 특정 계층에만 고정된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요. 특히 ‘젊은 나이에 트롯을 좋아하는 게 좀 이상하죠?’ 혹은 ‘나이 들어서 최신 가요 신청하니까 주책이죠?’ 하는 청취자들이 많은데, 그런 부담 없이 노래는 그저 노래로서 좋아하면 되는 건데 말이죠.” 요즘은 과거의 금지곡을 소개하는 순서가 있는데, 이미자의 ‘섬마을 선생님’이나 양희은의 ‘늙은 군인의 노래’가 공평하게 소개되는 것을 보면 그 말이 맞다는 얘기다.

 

트롯을 안다는 건 어른이 되어 간다는 뜻
자장면이 싫어지는 대신 문득 곰삭은 어리굴젓에 더 입맛이 당긴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더 이상 어리지 않다는 증거. 음악도 그렇다. 댄스나 발라드, R & B나 록도 좋았지만 어느 날 문득 콧노래로 흥얼 흥얼 트롯이 흘러 나온다면 그것 역시 어른이 됐다는 징후가 아닐까. 젊은 사람들 생각엔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일이겠지만 나이가 들면서 새로 트롯 애호가로 가세하는 잠재적인 수요가 지속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트롯의 앞날을 비추는 가능성이기도 하다. 트롯이라는 거대 유람선의 방향타 구실을 하는 SBS 라디오의 트롯 프로그램들이 있는 한 트롯의 미래는 밝기만 하다.

 

글 | 김성·방송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