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일을 제쳐두고 쉰새벽에 도착한 '방송노조연합회'사무실.
처음 내 눈과 마주친 '정파 800일'이라는 피켓이 갑자기 폐부를 푹 후빈다.
피켓을 쓰고 있는 박현 사우는 심한 감기로 연신 쿨럭거리면서도 벌써 수십장의 피켓을
만들고 있었다.
그랬다.
경인TV방송은 1,300만 경인지역 시청자들이 방송 주권을 찾기 위해 2년여의 투쟁의 결과로
탄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업자 선정이 된 이후 1년여가 넘도록 개국을 하지 못하고 있다.
컨소시엄 동업자였던 CBS의 추악한 음모론과 이에 좌고우면하는 방송위원회의 갈지자
행보 때문이었다.
이런 처참한 상황에 직면한 희망조합 사람들의 마음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참담 그 자체다.
그리 기세 당당하던 젊은 PD들도 상식과 법이 통하지 않는 현실이 도저히 믿겨지지 않는
모양이다.
너무 화가 나고 속상해서 울었는지, 눈동자가 붉게 충혈된 신하연 PD는 얼굴을 가린다.
그렇게 속절없이 눈물을 보인 자신이 부끄러웠는지도 모를 일이다.
결국 피켓 제작을 마친 박현 동지는 얼굴에 돋아난 열꽃만큼 지쳐 이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정말이지 이런 조끼를 또 다시 입으리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고, 또 입기도 싫었건만...
비상총회를 위해 모여든 희망조합 식구들.
반가운 얼굴에 손을 부여잡아 보지만 마음은 싸늘하다.
이것이 진정 마지막 투쟁이 맞아? 하는 비감함마저 든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허가추천 쟁취! 희망조합 농성단'이라고 쓴 조끼를 입을 수 밖에 없다.
세상에 힘있는 자들의 횡포에 맞서기에는 이 방법 외에 달리 무엇이 있겠는가?
3년째 방송민주화를 위해 희망조합을 이끌고 있는 이훈기 위원장.
세상은 그를 가만히 두질 않았고 그 결과 그는 180명에 이르는 조합원 앞에 죄인이 된
심정으로 서있다.
그도 그럴 것이 상식과 법이 통용되지 않는 사회가 그를 쉬이 내려앉지 못하게 한 것이다.
처절한 반성과 질책을 할 수 밖에 없는 비상시국이라는 현실.
상황을 설명하는 사람도 애렵고 그를 듣는 사람도 애렵게 됐다.
그것이 지금 백척간두에 서있는 모두에게 절박한 상황으로 마음에 들어왔다.
한 시민운동가 출신의 여자가 어느날 변절을 했다.
너무도 뜻밖의 상황이라 모두가 놀랄 틈도 없이 혼란스럽기만 하다.
어제까지 방송민주화를 얘기하고 그 숭고한 투쟁에 앞장섰던 우리의 안위를 걱정해주던
그녀가 오늘 바로 우리 가슴에 비수를 들이대고 있는 것이다.
찔린 것도 아프지만 그녀의 지난 삶의 궤적을 아는 우리들이 느끼는 배신감의 충격은
달리 표현하기가 힘들다. 어찌됐든 그녀는 변절을 했고 그 변절의 깊이 만큼 우린 고통을
당하고 있다. 우린 그녀를 가만둘 수 없다는 것에 동의했다.
이런 상황이 어느날 갑자기 만들어졌다고 믿을 수 없다.
그녀가 변절한 것도 청와대의 개입이 있었기 때문에, 또는 개인의 치명적인 결함이 있는
것은 아닌지하는 것이 세간의 인식이고 보면 뭔지 모르지만 흑막이 따로 있지 않을까하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그러나 그건 별로 우리에게 위협적인 것이 못된다.
'사필귀정'을 믿기 때문에.
어느누구도 사회정의와 방송민주화를 위해 희생을 감내했던 자들의 생존권을
위협할 수 없다. 우리는 전선을 하나로 통일하는 것에 동의했다.
CBS라는 언론사는 이미 스스로 사형선고를 내린 찌라시로 변질했으니 더 이상 재론의
여지가 필요없다. 그들은 스스로 자학하고 거꾸러지면 된다.
그러나 정말로 세간의 풍문처럼 청와대 비서관들이 장난하고 그 하수인 노릇을 하는
한 시민운동가 출신의 인사가 해괴망측한 내용을 가지고 본인의 변절을 정당화
시키려한다면, 그래서 1,300만명의 경인지역 시청자들의 권리를 침해하고 180명의
희망조합원과 그 가족들의 생존권을 박탈하게 된다면 어느누구도 우리의 서슬퍼린 칼날을
피해갈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무지몽매하고 정의가 없는 세상이라면 굳이 오래 살 일도 아니기에.
우린 지난밤 방송위원회 로비에서 풍찬노숙을 하며 이미 죽기로 작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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