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후예 고선지
약속한대로 오늘부터 <고구려 후예 고선지>라는 제목으로 몇 회에 걸쳐 고선지의 일대기를 여기 게시판에 필자는 올릴 것이다. 이전부터 고선지에 관한 프로젝트를 필자 나름대로 구상하고 있었으나 개인적인 사정과 또 역스에서 2001년도 원단특집으로 고선지 스페셜이 나간다는 소식을 듣고 이맘때쯤 필자의 글을 내보내는 것도 뜻깊은 일이라고 생각하여 이제서야 고선지에 대한 글을 쓰게 되어 감회가 남다르다.
고선지는 이미 우리에게도 꽤 친숙한 인물이다. 다만 우리가 알고 있는 고선지는 단편적인 면모에 그치는 것으로서 그의 진면목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 물론 역스에서 고선지에 대해 자세하고 색다르게 다루겠지만 필자의 글은 일종의 사전 예비지식 차원에서 역스에서 방영할 고선지 일대기에 대한 가벼운 안내 지침서 역할만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필자가 단순히 고선지에 대한 지식이나 정보의 나열에 그치면 이것은 다른 자료에서 단순히 글만 퍼온 것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에 필자는 필자가 모은 자료에다 필자 나름대로의 역사적인 해석을 가미하여 나름대로 정성스럽게 고선지에 대한 해석을 추구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번의 이 고선지에 대한 필자의 시리즈는 앞서 필자가 내보낸 <나의 유목민족제국사>와 <대백제제국사> 시리즈와 거의 대동소이한 형식을 취하게 될 것이다.
고선지의 진가에 대해서는 이미 세계적인 고고학자인 스타인이나 샤반느(혹자는 이들을 문화재 약탈자, 문화 제국주의자등으로 혹평하기도 한다)도 인정하고 있다. 그들은 모두 입을 모아 고선지를 인류 역사상 거의 전무후무한 장군으로 극찬하고 있다. 그들은 다만 고선지를 중국인으로 보는 데에 그쳤지만 우리의 입장에서는 과연 그가 누구의 피를 이어받았는지에 더욱 큰 의미를 둘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고선지 자신이 얼마나 고구려의 후예라는 자긍심을 갖고 살았는지는 미지수이지만 그것은 중국 기록의 한계에서 연유하는 것일수도 있다. 일설에는 그도 나름대로 고구려인의 왕국을 개창할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나 어쨌든 오늘날 우리가 우리의 혈통을 이어받은 외국의 자랑스러운 한국인의 후예들을 자랑스러워 하듯이, 약 1300년전에 당시 오늘날의 미국과 같았던 당나라에서 대활약했던 고구려 후예 고선지에 대해 우리는 충분히 자랑스러워 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는 일찌기 최남선이 <조선역사>에서 고선지를 크게 다룬 연장선상에 있음과 동시에 필자가 이 시리즈를 쓰는 기본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누군가가 한국사에서 가장 세계사적 중요성을 지닌 인물이라고 했던 고선지에 대해 필자는 이제 본격적으로 다루어 보고자 한다. 게시판 여러분의 많은 호응을 바란다.
고선지가 고구려인의 후손이라는 사실은 거의 정설처럼 되어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구당서>, <신당서>, <자치통감>에서 고선지에 대해 비교적 자세하게 다루고 있고 심지어 필자는 고선지가 고구려인의 후예라 지칭하고 있지만 이들 기록에서는 아예 '고구려인'이라고 못박고 있다. 그만큼 고선지가 태어나가 약 50여년쯤에 '멸망'당한 고구려의 잔영이 이들 중국 기록들의 서술 방식에서도 확연히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선지가 고구려인이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고구려인'이라 기록에 적힌 고선지는 어떻게 하여 머나먼 중국 당나라에서 '이방인'의 인생을 개척하게 된 것일까? 이의 이해를 위해서는 고구려의 '멸망'후 고구려의 유민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중국대륙에 흘러들어 왔는가를 먼저 살피지 않을 수가 없다.
이전에 필자는 역스 게시판에다가 '676년에서 734년 사이에 만주대륙에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적이 있었다. 그 글들의 요지는 현재 엉성한 고구려의 지리 고증에 기반한 역사사실과는 달리 한때 신라가 당나라를 격파하고 만주의 상당부분을 점령한 적이 있었으며 훗날 '발해'의 반격으로 다시 한반도로 쫓겨 들어왔다는 것이었다. 물론 일개 가설에 불과한 글이었지만 당시 고구려와 백제의 '멸망' 이후 얼마나 당시 동북아시아의 정세가 복잡다기했는지를 여실히 반영한 글이었다. 거기서 또한 필자는 고구려가 사실 668년에 멸망했다기보다는 황도인 평양성만이 당나라에게 함락된 것에 불과했으며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고구려 복국운동'은 사실 새로운 고구려, 즉 '발해'가 세워진 역사의 축소된 표현이라는 논지를 펴기도 했었는데, 결국 대부분의 고구려인들은 당나라의 침략에 굳게 맞서 투쟁해 배달겨레의 중심지인 만주대륙울 지켜내는 데에 성공했다는 요지였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당나라는 고구려의 황족들을 비롯한 많은 백성들을 본토인 중국대륙으로 끌고 가 그 고구려인들이 본국인 '발해'등과 교섭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산산히 분리하여 일부는 중국의 서남 지방으로, 일부는 동남 지방으로, 또 일부는 지금의 중국 신강 자치주에 해당하는 중앙 아시아 일대에 흐뜨려 놓았다. 마치 1930년대에 스탈린이 연해주 일대에 살고 있는 조선인들을 강제로 중앙 아시아로 이주시킨 상황과 흡사하게, 그러한 위치로 고구려의 유민들은 전혀 외딴 곳에서 험난한 삶을 재개척해야 했던 것이었다. 당나라로 끌려간 고구려인들이 20여만명이었는데 이들을 아무리 나누어 분산시켰다 하더라도 이 서역 일대에도 수만명이 정착했다는 말이 된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연히 동족을 중심으로 뭉쳤을 것이고 거기에서 하나의 응집된 고구려인들의 세력권이 형성되었을 것이다. 여기서 고선지의 아버지인 고사계가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예전에 1992년 kbs 대하드라마 <삼국기>에 이 고선지의 아버지인 고사계를 등장시킨 적이 있었는데 8세기의 인물인 고사계를 7세기 중반에 한참 왕성하게 연개소문의 휘하에서 활동하는 장군으로 설정하여 필자가 실소를 금치 못한 적이 있었다. 역사적 기록에 부합하려면 연개소문의 시대에는 아무리 올려 잡아도 고사계가 아직 어린 아이에 불과했을 것이고 아마도 고사계 자신은 이 머나먼 이역 땅에서 태어나 성장한 고구려인 2세였을 가능성이 더 농후하다. 다만 그의 성이 고씨인 것으로 보아 그는 고구려의 황족 출신으로서 다른 고구려 유민보다 더욱 고구려인으로서의 혈통과 자긍심을 갖춘 집안에서 자랐을 것이고 고구려 황족 3세인 고선지에게도 이러한 고구려 황실의 후예로서의 자긍심은 그대로 이어졌을 것이다.
고사계가 성장하던 당시 8세기 초반의 당나라는 그야말로 현종의 치세에 접어들어 '개원의 치'라 일컬어지는 당나라의 황금기를 맞고 있었다. 당시는 동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다투던 고구려도 이미 '발해'라는 또다른 이름으로 계속적인 위협이 되고 있었으나 발해의 명장 장문휴의 당나라 정벌 시도 이후 비교적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미 당나라는 당태종의 시대로부터 북방의 돌궐족을 제어하는데도 성공하여 북방과 동방은 별로 걱정거리가 없었던 형편이었다. 오히려 당현종 시대의 가장 큰 우환거리는 서쪽으로 당시 지금의 티벳 지방에서 발흥한 토번과 엄청난 기세로 동진하던 이슬람 세력이 더 부각되는 실정이었다. 이로써 고사계가 있던 서역지방의 중요성이 한층 더 강화되기에 이르렀다. 바야흐로 흑치상지의 활약상을 우습게 만드는 대영웅 고선지의 시대가 서서히 개막되는 것이었다.
앞서서도 이미 언급한 바 있지만 고선지의 아버지 고사계는 고구려의 황족 출신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 인물로 이러한 출신 성분과 개인적인 능력 때문에 당시 서역 지방에 분포해 있던 고구려인들의 세력권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냈다. 여기다가 당나라의 팽창주의로 인해 일찌기 고구려인들의 용맹성을 몸소 뼈저리게 체험한 적이 있는 당나라는 이제 자신들의 영향력하에 있는 고구려 유민들을 조직화해 자신들의 제국확장에 활용하려고 했다.
고사계가 자리잡고 있던 지역은 좀더 자세히 말하면 오늘날 타림 분지 근처의 신강-위구르 자치주 일대로 사막이 많고 주로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형성된 도시들이 있던 황량한 곳이었다. 모국이었던 옛 고구려의 중심지로부터 만여리나 떨어져 있는 이 척박한 땅에서 고사계는 다시 고구려인의 기상을 휘날리며 재기를 도모했던 것이었다. 또 하나 당나라가 서방으로의 팽창을 추구한 중요한 이유로는 바로 당나라의 황실과 깊은 연관이 있었다.
역사책에는 당나라를 처음 세운 당고조 이연과 당태종 이세민등이 모두 선비족, 또는 '농서의 적인'(흉노족) 출신이라고 적혀있는데, 이들 흉노족과 선비족들은 후세로 내려오면 점차 부분적으로 융화되어 하나의 세력을 이루게 된다. 이들 종족들, 특히 선비족이 중심이 되어 세운 나라들중에 하나가 바로 토욕혼으로 바로 고사계가 있던 지역을 포함하여 당시 토번이 장악하고 있던 티벳 지역까지 세력을 떨쳐 한때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그런데 선비족의 후예였던 당나라가 옛 선조들의 본거지를 새로 발흥한 토번국에게 유린당하자 가만히 두고 있었을 리가 만무했다. 말하자면 당나라 자신들의 '다물'정책의 일환으로 서방진출을 꾀한 것이었다. 그러나 마침 그 길목에 자신들을 몇번이나 혼내주었던 고구려의 유민들이 있었으니 당나라 입장으로선 당연히 중국인들이 즐겨쓰는 이이제이 정책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당나라는 이 지역 고구려인들의 우두머리격인 고사계에게 '사진교장'이라는 벼슬을 주어 이 지역을 관할하게 하였다. 말하자면 고사계는 안서 '사진'(네개의 진이라는 뜻으로 '진'은 당시 당나라 변방의 군사적 행정단위)의 장군 자리에 오른 것이었다.
이렇게 고사계가 당나라로부터 공식적으로 지위를 인정받고 서역경략의 임무를 받게 될 무렵 고선지가 태어났다. 고선지의 탄생 연도는 미상이지만 그가 죽을때 40대라는 기록을 역추적해보면 대략 710년대가 된다. 이때는 당나라 현종이 측천무후 이후의 혼란을 수습하고 '개원의 치'로 나라의 안정에 힘쓰던 때였다. 고선지는 어려서부터 부친으로부터 무예를 전수받아 연마했으며 그를 따라 안서군에 있으면서 군인의 길을 익히면서 성장했다.
기록에 의하면 고선지는 외모가 수려하고 영민, 용감대담하며 넓은 도량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또한 고구려의 후손답게 활과 말타기에 능해 어린 나이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이러한 뛰어난 자질과 부친의 배경에 힘입어 고선지는 약관 20세에 안서도호부의 유격장군이 되어 부친인 고사계와 동렬에 오르는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또한 고선지는 이 과정에서 2천명으로 천산산맥 서쪽의 유목세력인 '단해부'를 정벌하는 데에 혁혁한 전공을 세워 일찍부터 군사적인 능력을 인정받게 된다. 이는 말하자면 장차 그가 세차례에 걸쳐 실행하는 대서역 원정의 신고식인 셈이었다. 이리하여 그는 20대에 서역의 부사령관이라는 지위에 오르게 된 것이었다.
당시 당나라의 서쪽에는 토번(티벳)국이 크게 강성하여 한때는 당나라의 수도 장안을 위협할 정도였다. 그래서 당나라는 선조 때부터의 오랜 원한도 있고 해서 토번을 장차 정벌할 계획을 추진하게 되는데 이의 전초기지가 바로 안서도호부였던 것이었다. 더구나 당나라는 일찌기 북방의 오랜 숙적인 돌궐을 공략함에 있어 이슬람 세력과도 충돌할 조짐을 보였다. 7세기 초반 지금의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신기루처럼 발흥한 이 이슬람 제국은 폭발적인 기세로 온 세계를 정복하러 나서 숫적으로도 압도적이었던 사산조 페르시아를 단번에 무너뜨리고 이집트, 비잔틴 제국을 꺾는등, 욱일승천하며 동진하고 있었다. 그래서 8세기 중엽에는 이미 페르시아를 지나 중앙 아시아, 인도에까지 그 세력을 뻗어오고 있었는데 이들도 장차 당나라와의 충돌을 대비해 당나라의 적들인 돌궐과 토번등과 연계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특히 당시 서방의 강국이었던 토번국은 이슬람 세력과의 연대에 고무되어 당나라에 예속되어 있던 중앙 아시아의 여러 소국들을 정복하러 서진하기 시작했는데 토번군은 지금의 파미르 고원 남단에서 힌두쿠시 산맥에 걸쳐있던 서역의 와칸(호밀국), 길기트(소발률국-인도 서북부 카시미르 북쪽), 발레치스탄(대발률국)등을 장악하는 데에 성공했다. 이는 곧 당나라의 입장에서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으로 서쪽 변경의 역학관계를 통째로 흔드는 대사건이었다. 특히 당나라는 소발률국의 당나라 배반에 큰 충격을 받았었는데 여기다가 토번과 이슬람 제국(우마위야조)이 동맹을 맺고 당나라를 압박해오자 더 이상 사태를 좌시할 수가 없는 형편에 직면했다. 이리하여 고선지 장군의 대망의 제 1차 서역 원정(747)의 막이 오르는 것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고선지가 장군이 되어 대서역원정에 나설때 즈음에 이 '서역'이라는 공간적 범위에 대해서 좀더 친숙해지고, 또한 고선지의 정복전의 스케일이 어떠한 것이였는지를 좀 더 자세히 알 필요가 있다.
대체로 '서역'이라 함은 중국을 기준으로 지금의 돈황 석굴 일대에 있는 옥문관을 동쪽 끝으로 하여, 서로는 지금의 아랄해와 카스피아 해, 북으로는 시베리아와 발하시 호수,남으로는 지금의 아프가니스탄과 이란(페르시아)까지의 지역을 이름하는 것으로 그 전체적인 크기는 거의 중국에 맞먹을 정도로 엄청났다. 오늘날 구소련의 붕괴 이후 독립국가연방의 일원인 '-스탄'으로 끝나는 나라들이 대체로 여기에 해당된다. '서역인'이라 함은 대체로 이란족과 터키족(돌궐족으로 몽골족의 한 분파), 또는 이들의 혼혈종족을 뜻하는 것으로 자고로 이 지역은 동서남북 문명의 교차점에 있던 관계로 실로 국제적인 모습의 전형이라 할 정도의 역사를 지니고 있었다.
중국은 간간히 고대부터 이 지역과 교역을 했었는데 그곳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것은 기원전 2세기 말엽 한무제때였다. 당시 서역지방은 흉노에게 복속되어 있었다. 혹자는 어떻게 흉노가 이 머나먼 중앙 아시아까지 진출했을까하고 의아해 하겠지만 지구가 둥글다는 만고의 진리를 상기시켜보면 오히려 중국지역보다 몽골초원에서 이 쪽으로 오기가 지형상으로나 거리로나 더 수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쨌든 중국 한무제때의 장건이나 후한의 반초등은 거의 맨손으로 서역땅을 한나라에 소개하는 역할을 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그들 개인의 무용담에 속하는 것이었고 국가적인 차원에서의 서역경략은 바야흐로 당나라 시대에 들어와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었다. 당시 그곳은 서돌궐의 영토였는데, 서돌궐이 내란으로 약해지자 당은 재빠르게 옥문관 서쪽 일대를 장악해 앞에서 말한대로 안서 사진을 설치했다. 다시한번 강조한다면 안서 사진은 4개의 성곽도시를 뜻하는 것으로 언로(카라샤르), 구자(쿠차), 소륵(카시가르), 우탄(호탄)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 사진을 통괄하는 '안서도호부'가 구자에 있었던 것이다.
쿠처(庫車)는 한나라 이래 줄곧 ‘구자(龜玆)’로 불리웠다
사실 대고구려제국도 그 전성기때에는 이미 중국보다도 더 왕성한 서역과의 교류를 하는 당나라를 능가하는 국제적인 면모를 훨씬 일찍부터 과시하고 있었다. 그 단적인 증거로서 고구려 고분벽화에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서역인들과 여러 유물들, 그리고 사마르칸드에서 발굴된 아프라시압 벽화등에서 상호간의 활발한 교류의 일면을 엿볼 수가 있다. 더구나 광개토대제때는 이미 몽골의 초원일대까지 석권하여 이른바 '초원의 길'까지 확보하게 되자 고구려와 서역간의 문물교류는 더욱 더 활발히 전개되었다. 심지어 돈황의 벽화에서도 고구려풍의 벽화가 발견되어 당시 고구려의 막강한 영향력을 짐작케 해준다. 이러한 '세계화'된 자신들의 우수한 문명에 익숙해있던 고구려인들과 그 후예들이 고선지로 상징되는 대대적인 서역진출에 나서게 된 것도 반드시 우연이라고만은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앞서 이미 언급한대로 당나라로서는 토번국이 자신들의 속국이었던 서역의 여러 나라들을 차단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형편이었고 토번국은 이슬람 세력을 끌어들이면서까지 당나라의 자신들에 대한 야심을 막아야만 하는 실정이었다. 더우기 이들 사이에 완충적인 역할을 해주던 서돌궐마저 크게 약화되자 당나라와 토번-이슬람 세력간의 충돌은 불가피하게 되었다. 특히 중국 사람들이 대식국이라 부른 사라센제국(이슬람 세력)은 8세기 중반때쯤에 와서는 그 중앙왕조가 우미워야 왕조에서 압바스 왕조로 바뀌었고 이미 서역의 서쪽 끝인 아무다리야에 이르렀다. 원래 사라센제국은 지중해지역으로 진출하려고 했다. 그러나 718년에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다 실패했고, 이집트를 거쳐 북아프리카와 스페인을 파죽지세로 정복하던 사라센 제국은 732년에 프랑스의 투르 싸움에서 샤를르 마르텔(Charles Martel)에게 패배해서 유럽으로의 진출이 좌절되었다. 그러나 이들이 서역에서 뜻밖의 성공을 거두자 사라센제국의 무게 중심이 상당히 동쪽으로 움직였다. 수도가 지중해에 가까운 다마스커스에서 동쪽의 바그다드로 바뀐 것은 상징적이다.
토번국이 선제공격을 하여 파미르 고원 서쪽에 있는 20여개국을 복속시키면서 가장 중점을 두었던 서역의 나라가 바로 소발률국(길기트국)이었다. 앞서 말했듯이 소발률국은 지금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에 영토분쟁으로 시끄러운 캐시미르 지역의 북쪽 언저리에 있었으며 세계 최고의 산들이 구름처럼 모여있는 히말라야 산맥의 서쪽 끝과도 맞닿아있는 험준하기 이를데없는 왕국이었다. 그러나 이 곳은 당나라나 토번국으로서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전략상의 요충지였으며 특히 당나라로서는 서방세계의 창구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그러므로 고선지의 제 1차 대서역원정의 목표도 단연 이곳이었다. 토번국으로서도 아랍제국과의 통로 역할을 하는 소발률국을 수호하기 위해 소발률 서북쪽의 요지인 연운보(連雲堡-치트랄)라는 곳에 대군을 주둔시키고 있었다.
고선지는 747년 행영절도사(行營節度使)에 발탁되어 토번족의 정벌 임무를 띠고 제 1차 서역원정의 대장정에 올랐다. 이 때 그가 이끌고 떠난 병력은 보기 1만명으로 혹자는 당나라의 병력이 너무나도 적은 것에 의아해 할 것이다. 그러나 중국왕조의 전통적인 서역경략에 있어서 1만의 병력은 오히려 사상 최대의 병력이었다. 그것은 이 일대가 대군이 활동하기에는 적합한 환경이 아닌 데다가 또한 군수 물자의 수송 문제도 고려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본거지인 구자를 떠난 고선지 원정군은 100여일 만에 힌두쿠시 산맥의 북쪽 기슭인 오식닉국(五識匿國: 지금의 Shignan지방)을 거쳐 파미르 일대인 소발률국 국경에 도달했다. 이 지역에는 이미 토번국의 세력권으로써 언제 어디서 그들의 측면공격이 있을지 모르는 위험을 안고 있었다.
고선지와 파미르 고원의 인연은 747년 제 1차 대 서역원정이 처음은 아니었다. 이미 7년전인 740년에 당시 안서도호부절도사였던 부몽영언이 주도한 달해부(천산산맥의 서쪽 끝에 있던 투르크, 즉 돌궐족의 일파) 정벌때도 당시 언기진수사라는 직함을 맡고 있던 고선지가 파미르 고원의 북쪽에 있던 능령을 넘은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고선지로서는 비교적 다시한번 파미르 고원을 넘는 것에는 자신이 있었다고 해야겠으나 세계적으로 악명을 떨치던 험준한 지형을 그때보다도 5배나 많은 병력을 거느리고 훨씬 강력한 적들과 싸워야 하는 전혀 판이한 상황에 그는 직면하였던 것이었다.
오식약국에서 전열의 정비를 끝낸 고선지군은 역으로 동쪽을 향하여 파미르 고원을 넘으면서 연운보(파미르 고원 남단부에 위치한 현 아프가니스탄 동변인 Sarhard)로 접근했다. 여기 파미르 고원에서 힌두쿠시 산맥에 이르는 지대는 백설과 빙하로 뒤덮인 무생물의 세계로 높은 고지대인 까닭에 행군하는 군사들은 호흡 질환과 두통등의 고산병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선지가 이러한 난코스를 고집한 까닭은 토번군의 방심을 노려 전략적으로 그들의 허를 찌르기 위함이었다. 이는 이미 7년전 달해부 정벌때 파미르 고원의 주요한 요로를 점검해 놓아 지름길로 연운보를 급습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고선지는 군사를 동, 서, 중의 세갈래로 나누어 행동한 후 7월 13일 새벽 파미르 정상 가까이에 위치한 요새 중의 요새인 연운보에서 회합하기로 약정하였다. 동쪽 길은 소륵수착 조숭비가 3천 기병을 인솔하고 북방으로부터 진입하고, 서로는 발환수착 가숭권이 적불당이라는 곳에서부터 입성키로 하고 고선지와 감군(천자에게 지휘관의 작전과 거동을 살피고 보고하는 일종의 감시정보관) 변영성은 호밀국을 거쳐 연운보로 들어가기로 작전을 짰다. 이 변영성이라는 자야 말로 후일 고선지를 죽음으로 내모는 악역을 맡게 된다.
당시 연운보 요새는 토번군 1천명과 성의 남쪽 15리의 지점에 따로 8-9천의 대군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다. 게다가 연운보성은 남쪽의 높은 산맥과 북쪽의 파륵천(현재 Pandj 혹은 와칸 강)으로 둘러싸여 천연적인 요새를 이루고 있었다. 게다가 고선지가 공략할 당시에는 우기라 강물이 크게 불어 고선지군은 난관에 봉착했다. 당군이 도하에 어려움을 느끼자 이를 얕본 토번군과 소발률국이 연합해 덤벼왔으나, 오히려 고선지는 적의 방심을 이용해 군사들로 하여금 3일간의 군량을 휴대케 하고 이들을 물리치며 도하에 성공했다. 뜻밖에 밀리기 시작한 토번-소발률 연합군은 후퇴하여 유리한 자연지세에 의존해 석포와 나무 등으로 완강히 저항했다. 그러나 때마침 들이닥친 동서군이 고선지의 중군과 합세해 연합군은 5천명이 도륙을 당하고 천여명이 당군의 포로가 되었다. 이때 고선지군의 낭장이던 고구려인들인 고릉과 이사업등의 활약이 지대했다. 막대한 피해를 입은 연합군은 붕괴되어 당군은 이윽고 연운보를 점령했다. 고선지의 첫 승리였다.
고선지가 연운보를 장악해 토번군과 소발률국의 작전에는 결정적인 타격을 주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이윽고 다시 지형에 익숙한 그들이 전열을 재정비하기 전에 속전속결로 소발률국의 수도 아노월성(阿弩越城)을 함락시켜야 하는 급박한 상황에 직면하였다. 더구나 고선지군이 아노월성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마지막 장애물인 공포의 담구령(또는 탄구령 - Darkot로 힌두쿠시 산맥의 큰 봉우리 중 하나)을 넘어야 했다. 불굴의 용기로 무장한 고선지는 진군하기를 원했으나 변영성과 위사 한이영이 겁에 질려 극렬하게 반대했다. 아군의 사기 저하를 크게 우려한 고선지는 할수 없이 그들과 군사 3천여명을 연운보에 남겨놓고 나머지 군사로 다르코트로 향했다.
이 다르코트는 험난하기로 이름이 높은 힌두쿠시 산맥에서도 직하 40여리의 가장 험준한 곳으로서 빙하와 빙하 사이를 줄로 몸을 칭칭 매달고 건너야 하는, 실로 전문적인 산악인도 목숨을 걸고 등반해야 하는 그러한 곳이었던 것이다. 해발 15000 피트, 즉 약 4000M의 이 준산험로는 백전백승의 용장 고선지의 지휘를 받는 장병들조차 전진하기를 주저하였다. 왜 아니 그러했겠는가! 전쟁터에서 싸우다 죽는 것도 아니고 자칫 경험 미숙으로 천길만길 낭떠러지로 추락하여 개죽음을 당하기 다반사인 이러한 무모하기 짝이 없는 전진을 누가 두려워하지 않았겠는가? 그럼에도 고선지가 이를 강행한 데에는 이미 파미르 고원에 익숙하던 그로서는 이보다 더 평탄한 곳곳에는 토번군이 함정을 파놓고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이 위험한 작전은 그대로 진행되었다. 급전직하의 절벽 밑으로는 인더스강의 격류가 혀를 날름거리며 장졸들을 위협하고 있었다. 어지간한 고선지의 장병들도 점차로 공포에 떨며 위축되기 시작했다. 여기서 고선지는 실로 그만이 창출해 낼수 있는 기막힌 계책을 만들었는데 즉, 진군에 앞질러서 군사 20여기를 공격목표인 아노월성의 적병으로 가장시켜 산 밑에서 고선지를 영접하는 체하며 군사들을 크게 고무시킨 것이었다. 고선지는 이같은 뛰어난 지도력으로 절벽 내리막길을 3일동안에 내려오는 데에 성공했다. 적군의 허를 거듭 찌르면서 단숨에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하다고 여긴 자연에 도전하여 성공한 고선지군 앞에는 이미 다른 곳에 모든 전력을 배치시킨 무방비의 아노월성만이 노출되어 있었다.
'세계의 지붕'이라 불리우던 파미르 고원을 거뜬히 넘어 제1차 서역원정의 최종 목표인 소발률국의 왕도 아노월성(길기트)에 다다른 고선지군은 기적을 일구었다는 기쁨으로 사기가 충천해졌고, 반면에 전혀 예상치도 못한 당나라의 군대를 맞이한 소발률국의 국왕 소실리(파톨라사히 왕조의 데바스리찬드라왕)는 사색이 되어 급히 연운보에서 대패한 나머지 잔여군과 토번군을 부르기 위해 사신을 급파했다. 고선지도 이같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을 충분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지원군이 다가오기 전에 빨리 도성을 함락시켜야만 했다. 이 거친 중앙아시아의 오지에서 당군은 혼자였던 것이었다. 어느정도 전열을 정비하자 고선지는 재빨리 무방비의 아노월성을 공략하여 함락시켰다. 이미 이때는 토번군이 주력이 된 지원군이 당군보다 숫적인 우세를 앞세우며 아노월성에 거의 다다르고 있을 때였다.
아노월성을 함락시킨 고선지는 승리의 기쁨을 제대로 맛보기도 전에 다시 토번군을 막아야 될 긴박한 처지에 처했다. 그는 우선 토번에 협조한 수령들의 목을 베고 즉시 아노월성 남방 12리 지점에 있는 계곡 절벽에 아슬아슬하게 걸려있는 등교(등나무 덩쿨의 허궁다리)를 꾾도록 명하였다. 이 다리는 소발률국이 1년을 들여 가설한 '일전도'(화살 한 바탕의 거리로 약 2리, 1km)로 인더스강계의 길기트강을 이어주고 있었다. 이 다리는 또한 토번과 대발률국 사이의 교통로상의 중간지점에 위치해 있으므로써 이 교량의 차단은 대발률울 통하여 소발률의 원조를 얻으려고 하던 토번군의 작전계획에 일대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고선지군은 토번군의 일부가 막 이 다리를 건너려고 할때에 완전히 꾾어버려 몇몇 토번병이 비명을 지르며 천길만길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졌다. 마치 영화 <인디애너 존스> 2편의 그 유명한 다리 장면을 연상케 하는 광경을 연출하였던 것이다.
이로써 고선지는 토번이 서역의 다른 나라들과 교통하는 것을 완전히 꾾어버렸으며 토번은 한동안 당나라에 대한 공격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된다. 토번군은 발을 동동 구르며 분해했으나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토번원병이 일전도인 등교의 단절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되돌아가자 고선지는 소발률국왕과 시집온 토번공주를 포로로 하여 소발률국을 완전히 장악하고 이 나라의 병력 일부를 '귀인군'으로 개편하였다. 이 해(747) 8월 고선지는 소발률국왕과 토번공주를 대동하고 개선의 길에 올라 약 반 년에 걸친 원정을 성공리에 완수했다. 길기트왕 데바스리찬드라는 장안으로 끌려왔다가 다시 본국으로 돌아가 751년까지 재위하다가 그 왕조는 끝이 난다. 왜 이 왕조가 이렇게 끝이 나는지는 의문이나 당시 이 소발률국은 인도의 여러 나라들 중의 하나였던 것으로 추측되고 왕의 이름에도 '찬드라'라가 들어가는 것으로 보아 일찌기 멸망한 마우리아 왕조의 후예가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제1차 서역원정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의문이 든다. 앞에서 보았듯이 첫번째는 왜 당나라 조정에서 고선지에게 거의 무모한 이같은 작전을 맡겼을까이다. 물론 고선지의 지명도가 워낙 높아 어려운 임무를 맡겼다고 볼 수 있으나 이번 정벌전은 거의 불가능의 수준에 맞먹기 때문에 고선지 자신으로서도 매우 당혹해 했을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추측해 볼 수 있는 것은 당시 안서절도사로 있던 고선지의 상관 부몽영언의 농간이다. 그는 역사기록에 의하면 고선지에게 짙은 열등감을 느껴 상관으로서 고선지에게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붓곤 했다 한다. 이를 태연히 받아넘긴 고선지의 그릇에서 우리는 또 한번 탄복하지만, 제1차 서역원정이 당현종의 칙명으로 이루어졌음을 볼 때 이 칙명을 실행시키는데에 적지않은 역할을 했을 부몽영언이 고선지를 은연중에 제거하려고 이 임무를 맡겼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또 한가지 의문은 바로 이 정벌전에 나선 '당군' 1만의 정체이다. 앞서서도 말했듯이 고선지가 기반을 둔 안서 지역에는 많은 고구려 유민들이 정착했을 가능성을 필자는 일찌기 지적한 바 있다. 특히 당나라때 와서 변방의 이민족을 상대할때는 거의 중국 한족이 아닌 출신의 장군들을 주로 썼다. 물론 중국사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볼 수 있겠지만 당나라 자체가 선비족이 세운 나라이기 때문에 자신들과 어느 정도 친연성이 있는 종족들을 전쟁에 동원하는 것은 충분히 수긍이 가는 상황인 것이다. 특히 당나라와 고구려와의 싸움 때 이같은 당나라의 '이이제이' 정첵이 보다 확연히 드러난다. 이렇게 놓고 본다면 당시 서역에 정착한 고구려 유민들을 대거 고선지의 정벌군에 포함시켰을 여지도 충분하게 된다. 특히 고선지를 보좌하는 막료들 중에 고구려인들이 많다는 점도 이러한 가능성을 뒷받침해 준다. 한나라때만 해도 서역에서의 전쟁때 1-2천 병력을 동원하는 데 불과했던 중국이 갑자기 이때와서 1만의 '대군'을 동원하게 된 계기도 한번 생각해 볼 문제인 것이다.
어쨌든 본거지인 구자로 귀환한 고선지는 이 1차원정에서 서역의 72개국의 항복을 받고 사라센제국의 동진을 저지한 공으로, 홍로경어사중승(鴻卿御史中丞)에 오르고 이어서 특진겸좌금오대장군동정원(特進兼左金吾大將軍同正員)이 되었다. 이어 고선지는 당시 당나라의 서쪽을 총괄하는 반독립적인 위치인 대망의 '안서절도사'(747-751)에 부임하게 된다. 이제 고선지는 서역의 정복자로서 당나라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중의 하나로 급부상하는 것이었다.
고선지 장군이 소발률국을 사실상 멸망시키고 사라센과 토번등의 강대국에게 복속했던 서역 72국의 항복을 받은 것은 고선지를 앞세운 당나라가 다시 지리적으로 그들을 제압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했기 때문이었다. 즉, 이들은 토번이 그들과 당나라와의 교통로를 꾾어버렸을 때에는 현실적인 세력들인 토번과 사라센에게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었고, 역으로 당이 토번을 격파했을 때에는 다시 당나라에게 머리를 조아릴 수 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자고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강대국들 틈에 끼어 사는 약소국들의 비애가 아닐 수 없었다.
각설하고 고선지가 이렇게 제1차 서역대원정을 성공리에 완수할 수 있었던 요인들은 첫번째로 고선지 개인의 탁월한 능력이겠고, 두번째로는 그의 지지 기반이었던 안서의 고구려 유민세력들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이들 중 고선지에게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그의 부장이었던 봉상청이다. 봉상청은 어려서부터 집안이 가난하여 체구가 왜소하고 게다가 절름발이었으나 냉철하고 과감하며 지략이 뛰어난 재사여서 외조부를 따라 안서군에 종사해 고선지와 인연을 맺게 된다. 나이 30이 되도록 가진 재능에 비해 출세를 못하던 봉상청은 사람을 알아볼 줄 알았던 고선지에 의해 발탁되어 고선지의 종관(일종의 책사)이 되었다. 이때부터 봉상청은 고선지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출정의 고비마다에서 출중한 지략으로 고선지를 보좌하여 전승에 크게 기여하였음은 물론, 그와 생사고락을 같이 하는 오른 팔이요 평생의 동지가 되었던 것이다.
고선지가 봉상청을 얼마나 신뢰하였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있다. 고선지는 친모처럼 모시던 유모의 아들인 낭장 정덕전이라는 자와 친형제처럼 지냈는데 이 정덕전이 점차 교만해져 군내에서 고선지의 위세를 등에 업고 안하무인격으로 행세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런데 정덕전의 행패를 보다못한 봉상청이 곤장 60대로 정덕전을 벌하는 과정에서 그만 그를 죽이고 말았다. 정덕전의 처와 유모가 땅을 치며 구명을 애원했으나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급보를 받고 달려온 고선지는 봉상청을 나무라기는 커녕 오히려 담담한 표정으로 "이미 죽었느냐"란 말 한 마디만 남기고는 공정하게 행동한 봉상청을 만나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이는 고선지가 얼마나 도량이 큰 인물이며 공사를 구별할 줄 아는 진정한 대장부의 풍모를 지녔는가를 잘 보여주는 이야기인 것이다. 고선지는 자신의 충직한 부장인 이사업, 단수실에 대해서도 항상 신뢰와 우정을 베풀면서 그들과 생사고락을 같이 하고 전심협력하였다. 요컨대 고선지는 무장다운 용맹과 지략을 겸비함과 동시에 군내에서의 인화와 단합을 도모하여 바로 이것이 전투력으로 집결되어 승전의 원동력으로 승화되었던 것이다.
고선지의 그릇을 보여주는 일화는 더 있다. 고선지가 소발률국을 점령하고 돌아와 안서사진절도사가 되자 앞에서 말했듯이 고선지에게 온갖 모욕을 주었던 부몽영언이 자신의 지은 죄가 두려워 그를 피하려 하였으나 고선지는 부몽영언을 종전과 조금도 다름없이 깎듯이 존대했다. 또한 고선지의 출세로 그동안 그를 시기해왔던 변영성등도 불안에 떨자 고선지는 그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제공들은 얼굴은 사나이 같으나 마음은 계집과 같으니 어찌된 일인가?"하고 한바탕 꾸짖고 나서 몇 사람을 채찍으로 갈기는 시늉을 하고는 다시 "제공들이 회개하니 이로써 다 풀렸다"고 하면서 "제공들이 품고 있는 근심에 대하여 내가 이렇게 말을 꺼내지 않으면 오히려 걱정할 것이 아닌가. 이제는 할 말을 다 하였으니 속이 후련하다"라고 태연자약한 자세로 말을 하였다.
이러한 고선지의 뛰어난 용인술과 덕망으로 인해 그가 안서절도사로 있는 4년 동안에는 주변에서 당나라에 반항하는 세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서기 750년이 되자 당나라의 위력 앞에 주춤하던 토번과 사라센 제국이 다시 슬슬 세를 만회하며 당나라를 재차 압박하기 시작했다. 특히 소발률국을 당에 뺏긴 토번은 절치부심하며 그동안 또다른 통로를 확보해 힌두쿠시 산중에 있는 알사국이라는 나라를 수중에 넣게 된다. 이 알사국은 오늘날 사마르칸드 일대로 아무다리아와 시르다리아 두 강 유역에 위치하고 있었다. 토번은 고선지가 미처 손을 쓰기도 전에 박차를 가하여 지금 아프가니스탄 북부의 토화라국(토카라)에 압력을 가하게 된다. 그러자 이미 당나라의 속국을 자처했던 토화라국이 당에 원병을 청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이 무렵 사라센 제국의 강자로 이름이 높았던 이븐 무슬림이 아랄해 남방에 위치한 호라즘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장차 고선지와의 대결에 대비해 당나라에 복속한 서역제국 중 가장 배반할 가능성이 높은 석국(石國: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Tasuhkent 인근 지역)을 꼬드겨 동방진출의 일환으로 이 석국 방면과의 군사적 연결을 석국왕에게 넌지시 내비쳤다.
석국은 741년에 이미 사라센 지역의 혼란을 틈타 자신들의 영역을 넓힐 요량으로 당나라의 힘을 빌리려 했다가 거절당하자 은연중에 당에 대한 반심을 품어왔다. 이븐 무슬림은 이같은 틈새를 노려 고선지의 제1차 서역원정으로 단절된 토번국과의 제휴를 다시금 추진하기 위한 방편으로 석국의 당나라 배반을 갖은 묘수를 써서 충동질해왔고 이슬람 세력의 유혹에 입이 함박만해진 석국왕은 마침내 당과의 관계를 끊어버리려 하였다. 석국의 이러한 기회주의적인 줄다리기 외교에 고선지는 분노했으나 그는 토번이 점령한 알사국과 토화라국을 구해야 하는 임무와 동시에 사라센의 조종을 받는 석국을 토벌해야 하는 이중적인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아랍사서에 의하면 750년 고선지의 제2차 서역원정은 무려 1차원정의 10배가 되는 10만 대군으로 단행되었다고 한다. 그것은 고선지의 성공적인 1차 원정의 여파로 더욱 강력한 군사력을 갖추었기 때문이며 1차 원정의 성공에서 오는 자신감의 표출이라고 할 수가 있다. 어쨌든 이것은 중국의 서역경략사상 초유의 대군이었는데, 석국의 배반을 미리 포착한 고선지가 첫번째로 기수를 돌린 곳은 뜻밖에도 토번이 점령한 알사국이었다. 당연히 배신한 석국을 먼저 응징하는 것이 순서이겠으나 석국왕의 애매모호한 태도를 고선지는 오히려 시간을 벌 수 있는 기회로 역이용해 더욱 급박한 알사국과 토화라국을 토번에게서 구하는 방향으로 작전방침을 정한 것이었다.
고선지의 10만 대군은 재차 파미르 고원을 넘어 알사국에 들이닥쳤다. 먼저 석국을 칠 것으로 알고 방심하던 토번군은 또다시 허를 찔려 대패했고, 고선지군은 알사국을 완전히 탈환하여 그 왕을 포로로 하였다. 특히 이번에 동원된 10만 대군은 고선지의 유능한 지휘 아래 그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그 숫적인 우세에도 힘입어 배후에서 토화라국을 공격하던 토번군을 격멸하고 다시 토번 세력을 크게 후퇴시키는데에 성공했다. 고선지는 공세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곧바로 북상하여 실로 전광석화같이 석국에 들이닥쳤다. 고선지가 기수를 알사국으로 향하자 이에 역시 방심하던 석국왕 발특몰은 미처 사라센에 구원을 요청하기도 전에 고선지군에게 짓밟혔다. 10만 대군의 엄청난 공세앞에 석국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급기야 성문을 스스로 열어 항복했다. 고선지는 이렇게 동에번쩍 서에번쩍하는 식으로 경이로운 기동력을 발휘하여 토번과 사라센 양대 세력의 기선을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제압한 것이었다.
고선지의 석국정벌은 굉장히 광범위한 영역에서 이루어졌다. 고선지부하 장무가의 무덤에서 나온 문서에 의하면 당시의 정복은 석국뿐아니라 구국호와 돌기시까지 정벌한 것으로 되어 있어 고선지가 다시금 그의 위력을 서역의 여러나라에게 과시하는 발판으로 이 2차 원정을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고선지는 아프가니스탄 동부 일대까지 중앙아시아 깊숙히 진출해 중국 역사상 가장 서쪽으로 뻗은 영토를 이루게 되는 것이었다. 고선지가 정복한 영역은 당시 당나라의 1/3에 해당하는 엄청난 크기로서 이 때는 바로 고선지 자신의 최고의 절정기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미 중앙아시아는 고선지의 '제국'이었던 것이다.
흔히 역사에서 최전성기에 도달하는 순간 바로 내리막길이 펼쳐진다 했던가...? 벌써 두차례의 서역원정으로 당나라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의 하나로 부상한 고선지 개인에게도 이러한 역사의 철칙은 의외로 뜻밖의 곳에서 이미 적용되고 있었다. 그가 걸사국과 석국을 연달아 격파하며 석국왕을 잡아 장안으로 의기양양하게 호송하며 개선의 길로 접어들때부터 그의 파멸이 서서히 시작되고 있었음을 그라서 어이 알랴...
안서도호부에서 태어나고 거기서 평생 성장하며 이윽고 그곳을 통치하는 신분에까지 오른 고선지 자신이었다. 그런 그가 이제 난생 처음 당시 동아시아의 강국 중 하나인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에 개선장군으로 입성한 것이었다. 당나라는 그간의 고선지의 노고에 대해 종1품의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라는 벼슬로 보답했다. 그런데 고선지 자신에 대한 당나라의 환대에도 불구하고 조정의 석국왕 발특물(차비시)에 대한 처리는 그리 부드럽지가 않았다. 이는 물론 앞에서 보았듯이 기본적으로 그의 기회주의적인 처신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당시 이슬람 세력이 틈을 노리며 동진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러한 서역나라의 군주 문제는 신중히 처리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러나 당시 당나라의 조정은 이미 양귀비에 빠진 당현종 이융기가 예전의 영명함을 잃어버리고 전혀 딴 사람이 되어버려 간신들이 득실거리는 소굴로 변해있었다. 이러한 썩어빠진 당나라 조정에서는 서역에 대하여 무지하기 짝이 없고 실전도 한번 안치뤄본 위인들이 단지 석국왕이 배반한 것이 건방지다고 단세포적으로 그의 목을 베어버리는 크나큰 실수를 저지른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고선지가 항의했을 법도 하지만 자존심만 세고 쥐뿔도 모르는 조정의 소인배들에 의하여 묵살되었을 것이다.
고선지가 우려한대로 사태는 겉잡을 수 없게 악화되었다. 조정의 간신배들이 무책임하게 석국왕을 죽였다는 소문이 금방 서역 전체에 퍼져나가고 당나라에 신하?예를 다하던 서역의 속국들은 당나라가 자신들을 무시하고 모욕했다고 크게 분개했다. 이에 부왕이 당나라에 목숨을 잃자 이를 갈며 복수를 다짐한 석국왕자 '원'(또는 원은이라고도 함)이 서역 여러나라의 공분을 크게 비화시키며 이윽고 당나라가 가장 우려하던 사라센 제국에 도움을 청했다. 여기에 평소 당나라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서역의 여러나라들과 토번까지 가세해 서역의 여론을 완전히 당나라와 대결하는 쪽으로 몰아갔다. 당나라의 어리석은 간신배들은 토번과 이슬람 세력들이 여러해를 두고 추진해도 이루지 못한 상황을 단번에 만들었던 것이다. 그동안 고선지로서도 서역의 민심을 잡는데 전력을 다했으나 이번 사태로 그동안 기울여왔던 모든 노력이 허사로 돌아갔다. 고선지도 다시 서역인들의 마음을 돌리려 했겠지만 이번만은 그로서도 역부족이었다. 바야흐로 당나라와 고선지의 눈앞에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펼쳐진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동안 이슬람 세력의 내부 사정은 어떠했을까? 사실 고선지가 1-2차 서역원정을 성공리에 마칠 수 있었던 요인 중의 하나는 바로 사라센 제국의 복잡한 정세(우마위야조-압바스조 교체기)에 힘입은 바도 없지 않았다. 즉, 이슬람 세력 자체가 내부의 정쟁등으로 통일적인 동방정책을 추구하지 못했기 때문에 고선지의 서역원정에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바로 아랍(사라센)제국의 통제하에 있던 서역제국을 관할하는 후라싼 총독 이브라힘(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의 숙부직계인 압바스가)이 747년 아랍제국에 대한 반기를 들고 이라크에 돌입해 아랍제국군과 격전을 벌이다가 전사하자 그의 동생인 아부 압바스(Abu Abbas)가 형의 뜻을 이어 드디어 750년에 아랍제국을 멸망시킨 후 이라크의 쿳파에 도읍을 정하고 이슬람제국(압바스조)을 건립하였다. 이어 압바스조가 대대적으로 우마위야조의 왕족들을 살육하는 과정에서 한 왕족이 스페인으로 도망쳐 코르도바 왕국을 건설한 사실은 유명하다.
이와 같이 후라싼 일대에서의 압바스인들의 반란으로 말미암아 '하외지역'(Oxus강 이동지역)에 대한 아랍제국의 통제가 마비되고 당군의 서정에 대한 대비책도 강구할 수 없는 공백상태가 일시적으로 조성된 것이었다. 이것은 이 지역에로의 원정에 유리한 객관적 여건을 제공해 주었다. 그 결과 고선지의 1-2차 서역원정에서 아랍군과의 접전은 한번도 없이 전황은 순조로웠다. 압바스 왕조가 혼란을 수습하고 다시 서역에 돌아왔을때는 이미 고선지가 사실상의 서역의 지배자로 군림하고 있었으니, 그들의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억울했을 것이었다.
그런데 다시 전세가 역전되자 새 후라싼 총독 이븐 무슬림은 이 황금의 기회를 절대로 놓치지 않았다. 그는 장수 지야드 이븐 싸리흐(Ziyad Ibn Salih)를 석국에 파견해 고선지의 세력들을 급히 몰아내는 한편, 천산산맥 북쪽 기슭에서 유목하던 동돌궐족의 일족인 카를루크에도 '석국의 대당보복전'에 동참하도록 하는데에 성공했다. 말이 '석국의 대당보복전'이지 이는 사실상 사라센-토번-돌궐-서역제국 연합군 대 당나라의 싸움의 양상이었다. 고선지로서는 생애에서 원군 하나없는 가장 어려운 전쟁에 직면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기사 그는 항상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외로운 싸움을 항상 성공으로 이끄는 천부적인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했던 고선지로서는 이번 싸움에도 기적이 일어나리라고 스스로 굳게 믿었는지도 모른다.
이리하여 서기 751년 7월, 폭염이 내리쬐는 대평원인 탈라스에서 고선지의 7만 대군과 연합군 30만은 5일동안 세계사적으로 중요하고도 유명한 그 '탈라스 전투'를 벌인다. 탈라스는 탈라스 강 일대로 석국의 동북쪽 그리고 안서도호부의 서북쪽에 위치한 지금의 서키르키스탄 서북부지역에 해당된다. 고선지의 7만에는 그동안 서역원정의 베테랑들이 총출동하였고 물론 고구려인들도 대다수 참여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연합군은 실로 여러 잡다한 세력들을 긁어모아 그 군세가 어마어마했는데, 이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서역의 안서도호부, 즉 고선지의 본부를 궤멸시키고 당나라를 옥문관과 돈황 동쪽으로 몰아내는 것이었다. 실로 양쪽은 서역의 주도권을 좌우하는 이 중대한 일전에 사활을 걸고 격돌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탈라스 전투는 고선지의 입장으로서는 앞서 그가 행한 서역원정과는 엄연하게 상황이 판이하였다. 서역원정은 고선지가 치밀한 계산과 계획을 세우고 추진했던 데에 비해 이번 탈라스 전투는 연합군의 30만 대군이 안서도호부를 목표로 삼고 진군해오는 것을 막는 수세적인 상황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모든 서역제국이 고굽熾“?비협조적이어서 고선지는 정보 부족과 지원의 미달로 그만 군사들의 준비에 있어서 충분한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적군이 안서도호부까지 쳐들어 오는것을 고선지는 묵과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고선지는 7만 대군을 이끌고 북서쪽으로 향하며 강행군을 펼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빠지고, 이같은 사정을 포착한 연합군 측에서 이번에는 일찌기 내응하기로 약속했던 동돌궐의 카를루크족을 이용했다.
카를루크족은 고선지에게 도와주겠다고 약속했고 이는 사기가 저하되어 있던 고선지군을 크게 고무시켰다. 당시 정보와 모든 상황이 폐쇄적이었던 고선지는 일단 카를루크를 믿기로 하였는데 과연 고선지가 왜 이를 순순히 받아들였는지는 앞으로의 연구과제가 될 것이다. 다만 동돌궐의 일족이던 카를루크는 은연중에 고구려 출신인 고선지와 돌궐의 역사적 관계를 상기시키며 그에게 접근하였는지도 모르고, 또한 고선지는 자신의 뿌리를 상기하며 은연중에 카를루크의 포장된 호의를 받아들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쨌든 고선지가 카를루크족을 믿음으로써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실책을 범하게 된 것이다. 이는 실로 이 탈라스 대전의 향방을 판가름하는 결정타였다.
고선지는 이슬람의 대군을 맞아 무려 5일동안 온갖 지략과 용맹을 발휘하며 잘 버텨냈다. 그러나 연합군의 의도대로 곧 돌궐족인 카를루크의 배반이 터졌고 그들은 난데없이 연합군과 대적하기 바쁜 고선지군의 배후를 강타했다. 이어 기선을 돌린 돌궐군은 북쪽에서 내려오고 사라센 군대는 남쪽에서 올라왔다. 그들에게 협공을 당한 당군은 탈라스강 계곡에서 그들과 대치하다가 차츰 비참하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일설에는 고선지가 불리한 처지에서 벗어나려고 밤중에 군대를 후퇴시켰는데, 야간작전의 혼란 때문에 후퇴가 패주로 이어졌다고 한다. 어쨌든 이 돌발상황으로 당군은 여지없이 무너지며 고선지는 카를루크를 믿은 것을 통탄해했을 것이다. 고선지는 이윽고 진퇴양난의 위급한 상황에 빠졌으나 부장 이사업과 단수실이 임기응변적인 전술로 백석령에 퇴각해 몇천명의 패잔병들을 재편성하여 고선지의 퇴각을 엄호함으로써 그는 간신히 구사일생으로 안서도호부로 쫓겨왔다.
이 역사적인 탈라스 전투에서 당군 7만은 겨우 수천명만 목숨을 보존하여 돌아왔고 나머지는 전멸되거나 연합군의 포로로 끌려갔다. 이들 포로중 일부는더 서쪽으로 끌려가 결국 유럽에까지 제지술을 전하게 되는 일화는 주지하는 바와 같다. 뜻하지 않은 돌궐족의 배반으로 고선지는 피눈물을 뿌리며 난생 처음 패배를 경험했다. 그러나 그 유일한 패배는 또한 그에게 있어서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의 전조가 되는 것이었다. 이제 고선지의 무적불패의 신화는 더 이상 없었던 것이었다.
751년 세계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전투중의 하나로 기록되어 있는 탈라스 대전에서 참패한 고선지를 또한 가슴아프게 하였던 사실은 바로 그의 지지기반이었던 고구려 유민세력의 대부분이 이번 전투로 몰살당했다는 것이었다. 이로써 그동안 그에게 적지않은 힘이 되었던 서역지방의 고구려 유민세력이 붕괴되어 고선지 장군의 실질적 기반이 와해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슬픔도 잠시, 안서도호부의 중심인 구자로 후퇴한 고선지는 당장 이곳을 공략할 사라센 연합군에 대처해야 할 문제가 급선무였다. 그런데 기록상의 부실로 분명치는 않지만 이때 고선지는 안서도호부를 보존하는 데에는 성공한 듯이 보인다. 아마도 이슬람 세력이 공략을 포기했거나 아니면 우리는 역사에서 지워진 고선지 장군의 또다른 대첩기록의 존재 가능성을 깨닫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탈라스 전투가 벌어진 다음해인 752년부터 이슬람-당간의 해빙 분위기는 이를 반증해 준다 하겠다.
그러나 고선지 자신은 이러한 정세의 안정에도 불구하고 패전의 책임을 지고 정든 안서도호부를 등질 수 밖에 없게 된다. 패장은 말이 없다 했는가...당나라 조정은 그동안 고선지의 눈부신 전공에도 불구하고 탈라스 전투 하나만으로 그를 안서절도사에서 해임하여 후방으로 소환한 것이었다. 이로써 부패한 조정의 파렴치한 면목이 서서히 그 마각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고선지는 구자에서 훨씬 후방이 되는 지금의 감숙성 무위의 태수로 좌천되었다가, 당나라 현종이 그를 다시 하서절도사(河西節度使)에 전임시키고 우우임군대장군(右羽林軍 大將軍)에 임명하였다. 755년에는 밀운군공(密雲郡公)의 봉작을 받았다.
탈라스 전투가 벌어진 751년을 기준으로 앞의 4년동안 고선지는 개인적으로 최전성기를 구가하였으나, 뒤의 4년동안 과연 그는 위의 관직을 거치?무슨 생각들을 하였을까? 아마도 지난날의 자기의 영광된 모습을 그리며 회한에 잠겼을 수도 있고, 절치부심하며 재기의 나날을 보냈을 수도 있었겠다. 혹자는 탈라스 전투에서 패전한 고선지에 대한 당나라의 처리가 너무 인색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오히려 너무 관대한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보충설명을 간략히 하고자 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고선지가 활약할 당시 당나라는 세계적인 초강대국이었다. 동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자웅을 겨루던 강대한 대고구려제국이 사라지자 당나라의 이와같은 번성함은 더욱 극에 달했다. 이러한 당나라의 번영은 적지않은 고구려, 백제 유민들과 신라인들의 현실참여를 자극하기에는 충분했던 것이다. 이로써 이미 잘 알려져 있듯이 새로운 세계에서 새롭게 시작하려는 능력있는 배달겨레의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중 일부는 당나라 지배층으로까지 진출하여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기도 하였고 일부는 바로 고선지나 흑치상지와 같이 당나라의 제일가는 장군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또한 심지어 고구려 유민 출신인 환관 고력사는 현종의 총애를 받아 막후실세로 등장하기도 하는 등, 이미 고선지가 활동할 즈음에는 당나라의 조정에도 배달겨레의 후예들, 특히 고구려 유민계통들의 입김이 알게 모르게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마치 고려말기 많은 고려인들이 원나라로 진출해 심지어 황후가 된 사람도 나왔듯이 바로 그러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고선지를 키워주려고 해도 거기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최종 결정권자인 당현종이 점차 총명함을 잃어갔고, 그의 총애를 받게되어 정권을 농단하는 간신 이림보(양귀비의 사촌)같은 이들이 날뛰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배달겨레의 후예들이 고선지를 비호하려고 해도 위와같은 결과에 만족해야만 했다. 고선지는 755년이 될 즈음에는 당나라의 수도 장안에 체류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고도호의 총마'라는 당나라 시인 두보의 칠언고시를 보면 고선지가 아껴오던 늙은 한혈마(아라비아 말) 조차도 장안에서 크게 화제로 되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정으로 미루어보건대, 당나라 조정이 고선지의 원체 드높았던 명성 때문에 감히 그를 해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고선지가 비교적 마음의 평정을 찾을 때즈음, 전혀 엉뚱한 곳에서 그의 몰락을 재촉하게 된다.
755년 11월, 안녹산이 범양(范陽)에서 난을 일으켰다. 이야말로 약 백년후의 황소의 난과 더불어 당나라를 사실상 멸망시키는 그 유명한 '안사의 난'이었다. 이 '안사의 난'은 안록산과 그의 부장으로 뒤를 이어 계속 난을 주도한 사사명의 성만 따서 붙인 것인데 약 10년동안 당나라를 공포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대사건이었다. 그런데 이 '안사의 난'은 여러모로 당시 당나라를 호시탐탐 노리던 발해(후고려)와 적지않은 연관성이 있는 것 같다. '안사의 난'에 관해서는 의혹투성이가 한두가지가 아닌데 중국사에서 막연히 돌궐 출신으로 치부하는 범양절도사 안록산이 사실은 당나라를 뿌리채 뒤흔들려고 마치 고구려 장수제가 백제에 보낸 도림과 같이 발해의 첩자였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하필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킨 곳이 발해와 당나라 국경이라는 점도 뭔가 석연치가 않은 것이다. 이러한 가능성들을 인정한다면 발해는 불과 20여년전에 무황제가 보낸 장문휴가 산동반도를 점령하고 당나라를 거의 멸망 직전에까지 몰고갔다 실패한 경험을 되살려 이번에는 문황제가 다시 당나라를 멸망시키려고 안록산을 앞세워 대대적인 공격을 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안록산의 진격과 더불어 이때 다시 발해의 막강한 수군이 다시 산동반도에 상륙해 수륙양면으로의 협공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어쨌든 안록산의 난으로 다시 한번 위기에 몰린 당나라 조정은 이용가치가 없어지자 내버린 절세명장 고선지를 다시 찾는 몰염치를 내비쳤다. 바야흐로 고구려의 후예인 그가 또다른 고구려의 후속세력인 발해제국과 한판승부를 펼쳐야 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전개되는 것이었다. 어쨌든, 장안에서 세월을 보내던 고선지 장군에게 다시한번 기회이자 위기가 찾아왔던 것이다.
755년 11월에 대발해제국 변방인 지금의 북경 일대인 범양에서 거의 모든 병력을 동원하여 반란을 일으킨 안록산은 급히 5만 기병을 이끌고 장안으로 남하했다. 앞에서도 필자가 언급했듯이 이 중국사에서 세칭 '안록산의 난'에 발해가 깊숙이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이 여기서 또한번 드러나는데, 그것은 마치 일찌기 О낵拈??당태종 이세민의 꽁무니를 쫓아 장안까지 급습해 이세민의 항복을 받은 것과 똑같은 전략인 기습전을 안록산이 구사하고 있다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또한 보통 반란을 일으키면 그 거점지를 중심으로 서서히 세력을 확대해가는 경향인데, 안록산은 오히려 전방의 군사들을 총동원하여 발해국경의 방위를 포기하고 대대적으로 남쪽으로 향한 사실이 그 배후세력으로 발해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심증을 더 확실하게 해준다.
더구나 불가사의한 점은 이 안록산의 반란군이 거의 중국 내부를 무인지경으로 짓밟으며 불과 며칠 사이에 이미 황하를 거슬러 상류로 올라가 낙양 근방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었다. 이는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당나라를 정벌할때 대륙백제의 도움을 얻어 수륙 양면으로 공략한 전술과 매우 흡사한 것이었다. 다만 안록산의 경우에는 이미 그의 거병에 맞추어 산동반도에 상륙한 발해수군이 내륙으로 진격해 들어가며 그를 도왔기 때문에 이중전선으로 저항하던 당나라의 방어선이 급격히 무너진 데에서 이러한 안록산의 기습이 가능하지 않았나 한다.
다행히 안록산의 전광석화같은 남하보다도 대란의 사실을 먼저 알리는 전령이 아직도 정신을 못차리고 있던 현종에게 먼저 도착해 급보를 알렸다. 그때까지도 양귀비에만 빠져 안록산을 믿고만 있던 현종은 기절초풍하며 비상대책을 강구했으나 이미 적은 너무나도 가까이 근접해 있어 다른 지방에서 군사를 긁어모을 시간적 여유마저 부족했다. 위급에 빠진 당나라 조정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에서 장안에 머무르며 세월을 보내던 고선지에게 다시 구원을 요청했다. 이때 고선지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하는것은 대충 우리로서도 짐작이 가는 바이지만, 어쨌든 장군은 명을 받들어 토적부원수(討賊副元帥)가 되어 출전하였다. 이 와중에 안록산은 이미 낙양까지 함락시키고 장안을 향해 진군하고 있었다.
고선지는 그의 명성을 듣고 이 난리중에도 모여든 10만 대군을 장안에서 모병하여 출정했다. 이때 그가 거느린 병력은 비기(飛騎), 확기와 삭방(朔方), 하서(河西), 농우등의 군대였다. 이는 역시 당시 고선지의 명망을 실증해주는 좋은 예라 하겠다. 물론 당나라 조정으로서도 이같은 효과를 노려 고선지를 재등용한 것이었겠지만 한편으로는 지난날 고선지에 대한 푸대접으로 인한 자격지심으로 그의 위력에 속으로는 또 한번 그를 의심하게 된다. 이러한 경계의 연장선상에서 조정은 고선지를 토벌군의 부사령관으로 임명해 총사령관인 당나라 왕족의 감시를 받게하는 옹졸한 측면을 다시 노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종은 고선지의 출진을 크게 반기며 친히 이것을 전송할 정도로 그에게 기대하는 바가 컸다.
고선지는 우선 자신의 책사인 봉상청(封常淸)을 먼저 보내 탐색전 겸 선발군으로 발탁해서 낙양의 서쪽에 있는 '삼문협'을 지키게 했다. 그러나 천하의 봉상청으로서도 사실상 안록산을 앞세운 대발해제국의 위력 앞에는 속수무책이었던 것 같다. 봉상청이 패전하여 장안 쪽으로 쫓겨오자 고선지는 봉상청을 구하기 위해 무단으로 방어 담당 지역을 벗어나 일단의 군사를 이끌고 방어선을 이탈했다. 이것이 아마도 그렇지 않아도 고선지를 못미더워한 총사령관에 의해 조정에 보고되었는데, 여기에다 고선지가 증원군을 더 보충하기 위하여 경사(京師)로 가 5만명을 뽑아 선발군으로 나가 패전한 봉상청과 교대한 것이 또한 조정에게 삐딱하게 받아들여졌다. 고선지는 봉상청이 패퇴한 삼문협을 수복하려고 재차 군사를 이끌고 서진했으나 안록산의 대군을 막기에는 역부족이라는 후퇴하는 관군의 보고로 이 지점을 고수할 수 없음을 알고, 다시 삼문협 서쪽인 동관(潼關)으로 후퇴하여 이 곳을 지키기로 결정하였다. 사실 그렇게 짧은 시간에 10만이라는 대군을 모은 고선지로서도 어느 정도의 전열정비는 필수적이었던 것이었다. 그것은 병법과 작전상 충분한 이유가 있는 일이기도 했다.
그런데 고선지와 봉상청의 패전으로 반란군이 동관으로 향하여 쳐들어오자 그렇지 않아도 고선지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던 조정의 소인배들은 고선지를 심하게 질책하고 추궁하기 시작했다. 이틈을 노려 일찌기 고선지와 같이서역원정때도 종군한 부관 변영성(邊令誠)이 터무니없는 모함으로 고선지와 봉상청을 참소했다. 변영성은 앞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서역원정때도 시종일관 고선지를 헐뜯다가 나중에는 고선지의 용서를 받은 인물이었는데, 제 버릇 개 못준다고 다시 고선지에게 금품을 요구했다가 퇴짜를 맞은 것에 앙심을 품고 있던 와중이었다. 변영성의 과장된 밀고의 내용은 고선지가 방어 담당지역인 합주(陜州)를 떠나 동관으로 무단이옳?사실을 반심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 그 하나요, 둘째는 고선지가 사졸들에게 양곡과 군수품을 나누어주는데 부정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물론 다 터무니없는 모함에 불과했지만 항상 고선지에 대해 의혹의 눈길을 견지하던 썩어빠진 조정으로서는 변영성의 밀고는 고선지에게 죽음을 내리기에 충분한 사유로 작용했다. 이미 조정은 더 서쪽 땅인 촉 지방으로 도망치기로 결정한 상태였고, 그렇지 않아도 평정을 잃고 있던 현종은 여기에 동조하여 고선지와 봉상청에게 참형을 명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과연 고선지가 반란을 계획하여 당나라 조정을 뒤엎으려 했을까하는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다. 일찌기 먼 변방으로 끌려온 고구려 황족의 후예로 그는 자신이 항시 고구려인임을 잊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태어나고 성장한 배경이 항상 강렬한 고구려인으로서의 자부심을 잃지 않고 있던 고구려 유민의 세력권이었다는 것과, 그가 크나큰 업적을 이루는 데에 항상 옆에 있었던 그의 고구려인 막료들에 기인하는 것이기도 했다. 당나라는 언제나 그를 이용하기에만 급급했고, 심지어 다 이루어놓은 고선지의 서역정복을 무책임하게도 좌절시킨 실질적인 장본인이기도 했다. 그래서 당나라 조정은 고선지에 대해서 알게 모르게 자격지심을 지녀왔고, 막상 자기들의 코 앞에서 자신들이 '수상쩍다'고 판단되는 행동을 고선지가 하자 이제 더 이상 이용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고 미련없이 그를 제거해 버린 것이었다.
사실 여러 사서에 전해 내려오는 고선지에 대한 기록은 산발적이고 때로는 많은 진실을 감추고 있다는 인상도 준다. 중국측 사서에는 심지어 당나라 역사상 가장 눈부신 전공을 세운 고선지 장군의 나이조차도 추정하기 어렵게 생년도 남기지 않았다. 이러한 의혹은 혹여 고선지 장군이 무언가 당나라에 해가 되는 행동을 했기 때문이 아니었나하는 생각을 가질 수 있게 한다. 고선지의 입장으로서 보면 기껏 충성을 다한 당나라에 수많은 무시를 당하는데서 오는 반발감으로 자신이 새로운 고구려의 제국을 일으켜 보겠다는 야심을 적지아니 가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물론 당나라 조정에서도 고선지의 심중을 어느정도 간파하고 탈라스 전투에서 돌궐족을 믿은 것 하며 돌궐족인 안록산과 제휴하여 당나라를 무너뜨리려는 음모를 고선지가 강구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고선지가 자신이 아끼던 고구려인들까지 희생시키며 돌궐족을 받아들였다는 가정도 우습거니와 더구나 돌궐족의 배반으로 피눈물을 흘렸던 탈라스 전투의 기억이 엊그제인데 다시 돌궐인인 안록산과 내통하여 반란을 획책했을 것이라고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물론 안록산의 난이 발해제국의 사실상 당나라 침공이라 설정하면 이야기는 또 달라지지만, 어쨌든 기록상 분명한 것은 고선지는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다는 것이다.
비록 고구려 세력과의 연계 가능성에 대해서는 앞으로 역사가 밝혀낼 것이지만, 변영성이 참소한 부정 운운은 전혀 사실이 아니었다. 그러한 측면에서 고선지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때 <신당서> 고선지전에 남긴 말은 그의 비장한 심경을 잘 보여준다. 고선지는 임종에 즈음하여 "내가 후퇴한 것은 죄이니 죽음도 감히 마다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나를 도적으로 몰아 물자와 양식을 가로챘다 하는 것은 무고에 불과하다"라고 자신의 입장을 당당히 밝혔다. 고선지는 이어 휘하의 장병들을 돌아보며 "나에게 죄가 있거든 그대들은 죄가 있다고 말하라. 그렇지 아니하거든 무죄라고 말하라"하니 군중이 모두 '무죄'라고 외치는 소리가 땅을 진동케 하였다고 한다. 이 때가 서기 755년 12월이었다.
고선지는 이렇게 허무하게 이승을 하직했다. 현종으로부터 정토군부원수(우금오대장군)로 임명되어 10만의 '천무군'을 조직, 변병과 합류했을 때만 해도 그는 다시한번 재기의 다짐을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당시 낙양을 지키고 있던 범양평로절도사 봉상청이 안록산에게 패전하고 후퇴해오자 고선지는 옛 우정을 잊지 못하고 그를 구하러 나서게 된 것이였으며, 역시 봉상청으로부터 적의 정세를 들은 후 역전의 맹장인 그는 군사적으로 합당하다고 여겨 적을 막기에 가장 적합한 천애의 요새인 동관까지 작전상 후퇴를 한 것이었다. 사실상 만일 고선지의 이 동관수비책이 없었더라면 현종의 서촉 지방으로의 피신 조차 불가능했을 것이다. 고선지는 후퇴하면서 적 수중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창고를 열어 여러 물자를 장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이것이 후일 안록산과 일전도 하지 못하고 억울한 누명을 쓴 채 세상을 하직해야 했던 죄 아닌 죄가 될 줄은 생각지도 못하였다. 백의로 고선지의 진중에 머물고 있던 봉상청은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조용히 형을 받았다. 고선지 역시 바깥 일로 외출하였다가 돌아 오는데 백여명의 병졸을 이끌고 기다리고 있던 변영성이 어명을 제시하자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고선지 장군은 발버둥치며 울부짖는 부하들을 위로한 후 다시 부하였으며 전우였던 봉상청의 시체 앞에서 우애에 넘치는 말을 남겨놓고 무장으로서 당당한 일생을 마쳤다.
고선지의 죽음은 사실상 당나라의 멸망을 뜻하는 것이었다. 현종은 백성들을 버린 채 장안에서 서쪽으로 도망쳤으며 이윽고 안록산이 장안을 점령해 발해제국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곧바로 안록산은 발해제국에 대한 배반을 감행했으며, 그 자신의 정권도 부장 사사명에게 넘어가는 등 10여년만에 소멸되고 만다. 그러나 이 '안사의 난'으로 해서 당나라는 급속히 쇠퇴해 갔으며 이 틈을 노려 지방을 다스리던 절도사들이 할거해 각각의 독립된 정권을 세우는 등, 중국사는 사실상 춘추전국시대로 후퇴했다. 고선지가 그토록 애쓰며 개척했던 서역 지방도 이후로 중국은 다시는 중앙아시아에 발을 들여놓지 못했으며 이 지역은 급속히 이전의 불교지역에서 이슬람권으로 변모해갔다. 다만 고선지의 활약으로 인해 중국과 서역, 나아가 유럽 지역과의 교류가 더욱 활성화 된 것은 특기할 만 하다 하겠다. 이는 몽골의 칭기스칸 보다도 수백년 앞선 고선지의 역사적 유산이라 할 만하다.
앞에서 어떤 분이 고선지의 위업이 앞선 당나라의 돌궐 정벌 수준에는 못미친다고 언급했는데, 이는 큰 착각에 불과하다. 세계사적 의미로도 비교가 안되지만, 영토면에서도 결코 비견될 수가 없었다. 이미 돌궐은 수나라 때부터 어느 정도 당나라에 우호적이었으니, 다만 고선지가 서역정복에 나서는 데에 기초가 되는 안서도호부등의 설치는 봐줄만 하다 하겠다. 프랑스의 동양학자 샤반느(Chavannes, Ed.)는 종래의 중국문헌 이외에 새로이 서방과 아랍 등의 문헌을 섭렵하여 고선지가 세운 탁월한 사적을 발굴해 내어 밝힌 《서돌궐사료 Documents Sur les Tou―Kiue Occidentaux >를 발표하였고, 영국의 유명한 탐험가 스타인(Stein)은 고선지의 전적지를 직접 답사하였다. 이들은 모두 고선지를 '한니발이나 나폴레옹의 알프스 돌파'를 능가하는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천재적인 전략가로 평가하였다. 일찌기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도 아프가니스탄과 인도 지역에까지 정복전을 펼치어 '간다라' 문명을 일으켰지만, 고선지의 업적 또한 그에 필적하거나 능가하는 것이었다.
당나라에서 활약했던 고구려인의 후예들도 고선지의 죽음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고구려계 혹은 발해계 사람들이 크게 당나라에서 활동한 예는 많았는데, 왕사례, 이정기 등은 절도사에 올랐고 고우, 고원유 등은 절도사를 걸쳐 상서에까지 올랐다. 배달겨레 중 꼭 고구려 유민이 아니더라도 최치원처럼 빈공과에 합격해서 벼슬한 이들도 있었고, 원측처럼 당에서 활동한 불승들도 많았다. 고선지 말고도 당나라의 병권을 쥔 장군들이 있었으니 안사지란 뒤에 절도사가 된 후희일은 모계가 고구려 후예였고, 그를 몰아내고 절도사가 되어 정기란 이름을 하사받은 이회옥도 마찬가지로 고구려 후예였다. 백제의 항장 흑치상지도 상당한 지위에 올랐다. 그러나 일찌기 흑치상지 등도 모함을 받아 여지없이 제거되고 이제 그들의 우상이자 '성공한 영웅'으로 여겨지던 고선지마저 숙청되자 이제 특히 고구려 유민들은 자신들의 정체성과 당나라의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정책을 더 이상은 좌시할 수 없는 입장에 처한다. 그래서 고선지의 죽음 이후 극도의 혼란기를 틈타 안사의 난으로 급부상한 이정기 등은 배은망덕한 당나라 조정을 믿는 대신, 발해와 연계하여 새로운 고구려 왕국을 산동지역에 세워 두고두고 당나라를 괴롭히게 된다. 발해 또한, 고구려의 정통성을 이어받아 계속 중원을 도모하려고 했으니 당나라는 907년에 '공식적'으로 멸망할 때까지 고구려의 후예들에게 계속 빚을 갚아야만 했던 것이었다.
그렇다면 고선지의 활동은 결국 '중국사'의 일부분에 불과할까? 어떻게 보면은 고선지의 영웅적인 정복전도 결국은 당나라의 장군으로서 이루어진 것으로 한국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게 보일 수도 있다. 적어도 사서를 그대로 믿으면 그렇지만, 필자가 누차 앞에서도 문제를 제기했듯이 이 기록들 자체에서도 고선지를 평가하는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에 일단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 한가지 예를 들자면, 고선지 관련 중국사료들에서는 '당객향'(당나라에 있는 다른 지방출신)이라는 문구가 적지아니 보인다. 당나라에서도 이렇게 적고있는 것을 보면 당시 당나라는 이미 황족이 한족이 아니었듯이 오늘날의 '중화주의'적 관점에서 본다면 적어도 한족의 세상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는 어쩌면 고선지를 비롯한 당시의 고구려 유민들의 인식을 반영하는 것으로 그들 스스로가 강하게 고구려의 후예임을 자랑스러워 했다는 표현의 일부일지도 모르겠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만약 그 시대, 그 상황에서 고선지가 아니었더라도 중국의 다른 누구가 서역정복이라는 큰 역사적, 세계적 위업을 달성할 수가 있었을까? 필자가 보기에는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고선지가 당시 직면했던 상황보다도 중국이 서역으로 더욱 수월하게 진출했을 가능성은 즐비하게 있었다. 그런데도 중국이 고선지 이전과 이후에도 다시는 중앙아시아를 차지하지 못한 것은 분명 고선지 장군 자신의 뛰어난 능력에 있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역사는 상황과 배경에 크게 좌우된다 하지만 실제로는 한 사람의 뛰어난 영웅에 의하여 바뀌게되는 경우가 더 많았다. 결국 중국사에서 최전성기를 구가했다는 '대당제국'의 실체는 바로 고구려인 고선지의 역사적 산물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는 결국 고선지로 표상되는 우리 선조들의 위대함을 오늘날에까지 느끼게 해주는 역사적인 교훈이다. 분명 우리의 핏속에도 고선지와 고구려의 기백은 살아있고 언젠가 다시 때를 만나면 그 잠재력의 발산이 세계를 놀라게 할 것이다. 아무리 험난한 조건에서도 우리겨레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수많은 기적을 연출해 온 겨레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자랑스러운 선조 고선지는 어려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새로운 용기와 희망을 주는 한 상징이 되기에 충분한 것이다.
이로써 필자의 '고선지 시리즈'는 그 막을 내린다. 전폭적으로 이 글을 아껴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하고 특히 이 지면을 빌어 과분한 관심을 주신 역스 '고선지' 제작진께도 다시한번 감사를 드린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도 필자의 글을 참고로 역스에서 새해특집으로 하는 대작 '고선지'편을 꼭 보시기 바란다. 끝으로 필자는 역스 흑치상지편에서 유인촌님이 마지막으로 언급하신 멘트를 약간 변형하여 이 대미를 장식하고자 한다.
"고선지는 고구려인이었다"
역사스페셜의 [고구려를 위하여]님의 글이었습니다. |
http://blog.naver.com/yeongun52/80003180753
사 달서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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