쉐저리 호수(Lac des Cheserys, 2211m)에서 나와 TMB코스에 다시 올라서서 노란색 형광펜으로
표시한 길을 따라 플레제르(Flegere) 방향으로 내려간다.
조금만 오르면 돌을 쌓아 만든 케른(cairn, 돌무덤)이 있다. 길은 여기서 세방향으로 갈라진다.
케른을 중심으로 왼쪽으로 내려가면 아르정티에 마을이 나오고, 오른쪽으로 오르면 락블랑 호수 방향이다.
우리는 케른을 오른쪽으로 끼고 내려가 조그만 대피소를 지나 플레제르로 갈 예정이다.
이 고개를 내려가면 메르 드 글래스를 다시 볼 수 없다.
야생화와 어울린 메르 드 글래스(Mer de Glace)와 알프스의 침봉들은 액자처럼 견고하게
자태를 뽐내고 있다.
잘못하면 찔릴듯한 알프스의 침봉들 사이로 패러 글라이더가 하나 떠있다.
어디서 왔지? 아마도 플랑프하( Planpraz)에서 떠 저 멀리까지 활공한 것으로 보인다.
저 공중에서 알프스를 보는 것은 어떨까? 세상에는 참으로 호기심 많고 용기있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조금씩 플레제르 방향으로 이동을 하자. 맨 뒤에 숨어있던 그랑 조라스의 모습이 드러난다.
아직도 몽블랑 정상은 눈썹같은 구름이 앉아 그 신비스런 자태를 꼭꼭 숨겨두고 있다.
에귀 뒤 미디(Aiguille du Midi, 3820m)의 전망대는 확실하게 구름을 비껴갔으나 여전히 몽블랑과
돔 드 구떼까지 심술궃게 가리고 있다.
그야말로 역전의 용사같은 분들이시다. 평균연령이 70세가 넘는 이분들이 12일 동안에 약 170km의 산길을
쉬지 않고 걸어오셨다. 젊은 내가 내내 부끄러워한 철인들이시다.
아쉬움과 함께 하나의 트레일 완주를 목전에 둔 여유로운 표정으로 화답하신다.
이 부끄러운 얼굴도 사진 한장 남기려고 애를 쓴다.
사진 오른쪽, 내 어깨 끝에 플레제르 로프웨이역이 보인다.
자세히 보면 산허리에 희미하게 나있는 길을 따라 그리로 갈 것이다.
거기까지만 가면 이 불쌍한 청춘도 봄 날을 맞을 수 있으리라.
이런 이정표를 보면 앞으로의 일정을 추정할 수 있어 안심이 되지만
아직 가보지 않은 길들에 대한 호기심과 욕망이 뒤엉켜 혼란스럽기도 하다.
우리 일정에 포함되지 않은 아르정티에 마을도, 락블랑 호수도, 몽테고개를 넘어 스위스의 애모송댐도...
모두 가보고 싶은 충동이 들기 때문이다.
세상은 넓고 갈 곳은 너무나 많다.
언덕을 내려 작은 산능을 하나 내려오면 오른쪽 산능은 커다란 암벽으로 이어진다.
병풍처럼 서있는 커다란 암벽 사이로 폭포수가 떨어진다. 폭포수는 떨어져 아르정티에 방향으로 급하게
쏟아져 내리고 있다.
길은 폭포 밑으로 펼쳐진 커다란 광장같은 초원으로 이어지고, 광장의 초지에는 수많은 야생화가
저마다의 자태를 뽐내려는 듯 키재기를 하고 있다.
하긴 이 폭포 앞을 지나는 길이 코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야생화 밭이라 하질 않던가.
몽블랑도 이쯤되면 잠시 기세를 접을만한 넉넉한 아름다움이다.
사진 좌하단에 빨간색 표시로 집모양을 하고 있는 플레제르가 오늘 여정의 마지막.
몽블랑산군과 어우러진 샤모니의 금쪽 같은 풍경을 감상하며 내려간다.
무려 12일 동안 170여 킬로미터를 걸어서 도착한 플레제르.
플레제르는 <꽃의 언덕>이라는 별명처럼 야생화가 유명하고, 패러 글라이딩 천국이기도 하지만
무사히 일주를 마치고 돌아 온 내 다리에게는 바로 우리 집 안방 같은 평온함을 준다.
샤모니가 네팔이나 티베트와 다른 점은 거대한 자연과 인간이 만든 인공물이 잘 조화를 이룬다는 것.
우리나라도 지리산이나 설악산에 케이블 카 설치 논란으로 종종 시비가 있지만 알프스의 경우를 보면
조금 다른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어찌됐든 천혜의 관광자원을 모든 사람들이 쉽게 접근하게 만들었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걸 즐기고 있다.
자연과 인간의 욕망이 잘 조화된 곳이라고나 할까.
로프웨이역에서 케이블 카를 타고 샤모니로 내려가기 위해서 마지막 언덕을 오르고 있다.
그 사이 그랑 조라스도 온전히 모습을 드러낸다. 아~ 그 유명한 그랑드 조라스의 북벽이다.
그랑 조라스(Grandes Jorasses, 4208m)는 북벽이 특히 유명한데 직벽으로 1000미터가 된다.
낙석이 심해서 아주 고난이도의 등반기술이 요구되고, 그래서 여름시즌이 오히려 어렵다고 한다.
저 직벽을 오르는 것은 알피니스트들의 로망. 그러나 나는 멀리서 구경하는 것이 로망이었다.
플레제르 로프웨이역에서 바라 본 테라스와 샤모니.
근대 등반의 효시를 만들었던 몽블랑 정상도 이쯤에서 옷을 모두 벗었다.
12일 동안 이루어졌던 '뚜르 드 몽블랑'의 꿈같은 파노라마가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지난 날의 고통과 불편함은 모두 잊혀진다. 좋았던 그리고 환상적인 알프스의 환상만이 나의 오감을 다시금
자극한다. 이제는 이 몽환을 안고 살아야 할 당분간이 걱정이 된다.
언제 다시 올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조금전까지 천국에 있었던 것을 잊어버리고 벌써 불행해지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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