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간꺼(馬尼干戈)에 가까워질수록 풍경은 아름다워지고 문득 나 자신이 이미 티베트에 깊숙이 들어와 있음을 느낀다. 마니간꺼는 ‘신비롭고 아름다운 서쪽의 작은 마을’이라는 뜻이 있다.
칭하이성으로 가는 길과 쓰촨성 청뚜(成都)로 가는 길, 그리고 참도(昌都)를 통해 티베트로 가는 길이 갈리는 삼거리에 형성된 마을이다. 예전에는 일종의 역참과 같은 기능을 가진 소읍인 셈이지만 티베트 땅으로 다시 가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할 마을이다.
원래는 캉빠(康巴)라 불렸던 동티베트 지역이었으나 중국의 침략 이후 행정구역 개편으로 쓰촨성에 편입됐다. 마을사람들은 붉은 실타래로 머리를 묶어 여전히 캉빠(康巴-깐쯔(甘孜) 자치주는 티베트 고원(西藏 高原)의 동남쪽에 위치한다. 티베트인들은 캄(Kham- 쓰촨, 윈난지역)이라 불렀고 중국은 티베트어(캄, Kham)를 음역(音譯)해서 캉(康) 혹은 캉빠(康巴)라고 칭한다. 즉, 지금의 쓰촨과 윈난지역인 동티베트를 말한다)인임을 자랑하고 있었다.
티베트(藏族) 남자들은 예로부터 캉빠한쯔(康巴漢子-‘캉빠의 사나이’라는 뜻)라는 말처럼 호탕하고 의리 있는 남자의 대명사로 불릴 정도였다. 지금도 캉빠의 남자들은 한번 친구가 되면 그를 위해서 목숨도 버릴 수 있는 의리를 가졌다고 한다.
1950년 중국의 무력 침공과 문화혁명(1966~1976년)으로 수 천 년 역사와 문화유산이 철저하게 파괴되었지만, 다행히도 ‘티베트 문화의 냉동창고’로 불리는 캄(Kham)은 ‘티베트보다 더 티베트다운’ 문화인류학의 보고로 남아 있는 곳. 캄의 깊은 협곡에는 아직까지 외부의 바람이 닿지 않은 마을들이 있다. 마치 요새처럼 전통 마을을 지키며 살아가는 동부 티베트사람들은 아직까지 캄 문화의 뿌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성냥갑 모양처럼 납작한 집들이 늘어 선 황토 빛 마니간꺼마을 너머 하얀 설산이 다가 올 겨울처럼 늠름하게 서있다. 췌얼산(雀兒山, 6168m -티베트인들은 ‘독수리도 넘지 못하는 산’이라고 한다)이다. 마니간꺼 삼거리에서 만난 317번 국도(촨짱북로)를 따라 우회전한다. 췌얼산고개(5,050m)방향으로 약 16킬로미터 쯤 가면 신루하이(新路海)를 만난다.
해발 4,040m로 주변 경관과 어울린 에메랄드빛 호수는 환상의 색감으로 오감만족이 충분하다. 신루하이의 티베트 이름은 위롱라춰(玉隆拉措-'온 마음을 다해 모시는 성스런 호수'라는 뜻)인데, 중국이 점령한 후 신루하이로 바꿨다.
317번 국도변에 위치해 있지만 신루하이는 조금도 번잡하지 않고 고요하다.
호숫가에는 산뜻한 육자진언이 새겨진 커다란 마니석과 오색의 타루초와 룽다가 신성한 곳임을 알려준다.
신루하이는, 티베트족들이 1000여 년을 사랑하고 의지한 이야기가 얽혀 있다.
티베트에서 전래되어 몽골 민족까지 전해오는 영웅서사시 게사르 왕전은, 하늘로부터 현신해 태어난 티베트의 전설적인 건국영웅 게사르(格萨尔王, King Gesar)왕의 무용담을 담은 이야기다.
게사르는 엄청난 신통력의 소유자로서 천상과 천하를 오가며 온갖 모험을 벌이면서 혼란한 세상을 평정하고 인간세상을 구한다는 이야기가 중심축이다. 1천여 년 동안 캉빠인들의 입을 통해 구전되어 신화가 됐다. 호메로스(Homeros)의 ‘일리어드, 오딧세이’보다 수십 배가 넘고, 40만행의 인도 서사시 ‘마하바라타(Mahabharata)’ 보다 긴, 세계 최장의 서사시로 알려져 있다.
신루하이호수와 연관된 내용은, 아름다운 물빛과 주위의 풍경에 반해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잊었다는 게사르왕(格萨尔王, King Gesar)과 그의 애첩 주무(珠牡)와의 사랑이야기로 유명하다.
차마고도를 따라 이어지는 캄의 계곡과 초원마다 게사르의 전설이 담겨 있고, 캄의 유목민들은 오늘도 게사르의 모습으로 말을 달린다. 캉빠들은 언젠가는 게사르가 다시 살아나 캄을 중흥시킬 것으로 믿고 있는 것은 아닐까.
티베트의 유구한 전설을 담고 있는 신루하이는 췌얼산 빙하(氷河)와 적설이 녹아 만들어진 호수다. 수심은 10~15m이고 주변에 푸른 소나무와 삼나무가 광활한 초원과 에메랄드 빛깔 호수와 어울린 절경에 살짝 감흥에 취할 수 있다.
바다(海)가 붙은 이름에 비해 작은 호수지만 단풍의 반영(反映)이 곱게 물들어 가을이 더 깊어지고 있다. 게사르왕과 주무가 반할 만하다.
아름다운 풍광에 빠져 정신없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을 때 중국감독관이 짜증을 내며 이 지역을 빨리 통과하자고 재촉한다. 뜬금없는 일이라 이유를 물어 보니, 티베트인들은 “외지인에게 적대적이고 술을 먹으면 칼을 휘두르고 강도짓을 한다”는 것.
하긴 그 사이에 동네꼬마들이 열댓 명이 모여들어 우리 차량을 둘러싸고 신기한 듯 만져보고 쓸어보고, 약간은 취해 보이는 아저씨 한 명은 우리 일행을 향해 뭐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정확히 무슨 상황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중국감독관이 우려할 만한 상황이다.
혹시나 해서 재빨리 자리를 뜬다. 그러나 기회 있을 때마다 티베트인들이 난폭하고 도둑이 많으니 소지품 조심하라는 중국감독관의 경고는 어디에서도 확인할 수 없었다. 여전히 티베트인들을 폄하해 바라보는 중국인들의 인식이 씁쓰름하다.
고산지대의 해는 삽시간에 넘어가고 도로변에 드리운 산 그림자는 길어진다. 탐사의 발걸음도 바빠진다. 해발 5050미터인 췌얼산고개를 넘어야 쓰촨성의 가장 변방에 위치한 더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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