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꺼(德格)는 쓰촨성의 마지막 마을이다. 마을 앞으로 흐르는 진샤강(金沙江-창강의 상류) 건너편은 바로 티베트의 장다현(江达县)이다. 아주 드물게 들르는 여행자나 장거리를 운행하는 트럭 운전수를 제외하면 세상과 교류가 거의 없을 정도로 한적하다. 새로 지은 집들이 몇 채 있지만 여전히 티베트식이다. 티베트 경계와 가까운 곳이라 일말의 긴장감도 기대했으나 지나온 여느 마을과 다름없다. 잔잔한 호수 같은 마을에 파문을 일으킬까 두려워 서둘러 라싸를 향해 길을 재촉한다.
동부 티베트의 캄(Kham)지구의 교통요지이자 중국 내 소수민족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참도에 도착한다.
참도(昌都 또는 창뚜-티베트어로 '물이 모이는 곳'이란 뜻)는 쓰촨(四川)과 윈난(雲南), 티베트가 만나는 교통의 요지이자 물의 도시다. 지류인 란추하(染楚河)와 어무추하(鄂穆楚河)가 마치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어루만지듯 참도에 들어와 도시 남단에서 합수되어 란창강(瀾滄江)이 된 것이다. 참도에서 힘을 받은 강은 거침없이 메콩강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인상적이다. 이 강은 옌징, 쿤밍 등 중국 서남부를 지나 캄보디아와 베트남까지 흐르고 흘러 인도차이나의 젖줄이 된다.
촨짱북로를 달려 왔던 우리는 참도에서 촨짱남로로 갈아 타기로 한다.
리오체(類鳥齊) ⇨ 나취(那曲) ⇨ 라싸로 이어지는 촨짱북로(川藏北路-317번 국도)와
빵다(邦達) ⇨ 팍쇼(八宿) ⇨ 랸냐오(然鳥) ⇨ 린즈(林芝)를 통해 라싸로 가는 촨짱남로(川藏南路-318번 국도) 중 남로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참도 시내를 가로지르는 란창강을 건너 고개마루로 향한다. 계곡이 깊어질수록 노도 같던 물은 유장해진다. 첫 번째 고개 랑라산(浪拉山, 4572m)을 지나자 지난날 차(茶)를 말에 싣고 라싸로 향하던 마방들이 걷던 빵다대초원(邦达大草原)이 펼쳐진다. 란창강과 누강(怒江) 사이에 우뚝 솟은 초원으로 풍부한 물과 풀이 아름다운 녹음지대를 만드는 곳이다.
파란 하늘과 산 능선마다 여인의 어깨에 숄처럼 걸쳐진 구름과 햇살이 신비롭다.
빵다대초원은 칭커(青稞, 쌀보리)밭과 운무 그리고 초원이 주인인 평화로운 지대다. 차장을 스치는 초록빛 칭커의 살랑거림이 싱그럽다. 그 아름다움이란...
... 그 시절 다시 돌이킬 수 없다 해도,
서러워하기보다 차라리 처음 설렘 그대로 간직해 이토록 굳세어지리니...
윌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 는 ‘초원의 빛 Splendor in the grass’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그렇다. 이 길을 지나면 다시는 이 초원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초원의 빛도 꽃의 영광도 일장춘몽인 걸. 아무리 찬란한 연애도 마찬가지다.
세월이 흐르면 풀잎도, 꽃도 스러진다. 하지만 이곳 빵다초원에서 만난 칭커밭은 첫사랑의 싱그러움이다. 그 잔상(殘像)만큼은 잊지 않고 가슴에 새기리라 마음먹는다.
달리는 차는 남의 속도 모르고 비단 같은 내리막을 쏜살같이 미끄러진다.
빵다대초원을 130여 킬로미터를 달려서 도착한 빵다진(邦达镇).
띠앤짱꽁루와 촨짱남로(滇藏公路 + 川藏南路-214번, 318번 국도가 만나는 곳)가 만나는 곳으로, 318번 국도를 타고 서쪽으로 가면 ‘라싸(拉薩)’에 이른다. 지세(地勢)는 평탄해서 주변에 비행장(昌都邦达机场 4334m, 라싸와 쓰촨성 청뚜를 잇는 국내노선)도 있다. 하지만 워낙 추워서, 상시 통행하는 이들은 이곳에서 숙박을 꺼린다고 한다.
오히려 망캉(芒康), 참도, 라싸 세 방향의 길이 만나는 빵다삼거리가 북적인다. 교통의 요지답게 적지 않은 식당과 차량수리점, 그리고 가수점(加水店)라고 쓰여 있는 간이 물장수가 보인다. 가파른 고갯길을 다니는 대형화물차들이 고개를 오르기 전 탱크에 물을 채우는데, 내리막길에서 과열된 브레이크에 물을 뿌려 식히기 위함이다.
삼거리를 지나 오르기 시작한 이에라산(業拉山, ‘감마라산’이라고도 함)도 해발 4658미터로 만만치 않지만 이 산을 넘어야 커브길이 많기로 유명한 누쟝산(怒江山) 72고개 꼬부랑길을 만날 수 있다.
가파른 고개를 오르는 차량은 희박한 산소 때문에 완전연소를 시키지 못하고 ‘가르릉 가르릉’ 천식환자처럼 쿨럭거린다. 옛날 차마고도를 다니던 마방(馬幇)들은 이 길을 어떻게 올랐을까 싶다. ‘새와 쥐만 다닐 수 있는 길’이라고 조로서도(鳥路鼠道)라고 했듯이 천애 낭떠러지에 홈을 낸 좁은 길이었을 것이다. 등짝에 찻잎을 잔뜩 실은 말의 거친 숨소리, 채찍소리, 마방들의 고함이 들리는 듯하다.
마침내 고갯마루에 서면 몰아두었던 한숨이 탄성과 함께 탁 터진다. 실타래를 사려 놓은 것처럼 배배꼬인 꼬부랑길이 표고차 800m 넘는 곳까지 길을 냈으니 오죽하랴.
중국인들은 이 길을 ‘天路 72拐’라고 표시한다.
과이(拐, bend)는 구부러졌다는 뜻이니 하늘 길을 적어도 72번은 돌고 돌아야 한다는 뜻이다. 아름답기도 하고 기묘하지만, 내려가자니 한숨이 절로 나는 길이다.
옛날 차(茶)를 싣고 라싸를 향하던 마방들의 걱정과 감동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는 낭떠러지에 목숨 걸고 교역하던 마방은 사라지고 , 조로서도(鳥路鼠道)는 신작로가 되어 대형화물차와 관광버스가 차마고도의 주 고객이 되었다.
다시 내리막이다. 해발 4,600m 쯤 되는 고갯마루에서 서서히 미끄러져 내려간다.
짙어 가는 가을 단풍과 다랑이 논밭이 어우러진 토담집들이 비탈에 서있는 모습이 위태롭다. 지난 2010년도에 아스팔트포장이 된 굽잇길은 노면상태가 아주 좋으나 좌우로 연이은 회전으로 어지러울 지경이다. 약 12km의 ‘天路 72拐’ 구절양장의 길을 내려오는데 걸린 시간은 20분 정도. 차를 돌려 다시 한 번 올랐다가 내려오고 싶을 정도로 흥미롭고 아찔한 길이지만 아쉬움을 뒤로 하고 길을 이어간다.
고개 하단부에 이르자 협곡이 보이고 그 사이로 강이 흐른다. 칭짱고원에서 발원한 누강협곡 위에 반듯하게 놓인 누강대교를 따라 터널이 연결된다.
그 왼쪽으로는 협곡을 잇는 또 다른 출렁다리가 보인다. 사람만이 건너는 자그마한 규모로 봐서 오랫동안 이 협곡에 사는 원주민들이 만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삶은 참으로 끈질기고 치열하다, 출렁거리는 다리를 건너는 아이들의 표정이 해맑다. 그들에게 다리는 삶의 질곡이 아닌 그네와 같이 재미있는 놀이기구일지도 모르겠다.
누쟝산을 내려오면 이내 협곡이 시작된다. 협곡 사이가 좁아 하늘이 잘리고, 산의 정상을 보기란 더더욱 어려울 정도로 좁고 깊은 협곡이다.
민둥산 계곡에서 흘러내린 물은 황토 빛이 되어 유유히 흐르고 길 아래 협곡의 까마득한 벼랑은 오금이 저리다. 동굴을 반으로 쪼갠 듯이 벼랑 허리에 낸 길을 아슬아슬하게 지난다. 그 옛날 산맥 너머 외부 세계와 소통과 교역을 위해 만들었을 것이다. 협곡 낭떠러지에는 변변한 안전장치 하나 없지만 수백 년 동안 길에 내려앉은 푸얼차(普洱茶) 향기와 수많은 사람의 이야기가 집어 삼킬 듯 거친 강물과 뒤섞이고 있다.
누강(怒江)은 이름처럼, 흐르는 물살이 마치 성난 것처럼 급하다고 하여 지어졌다는데 상류지역이라 그런지 마치 호수처럼 잔잔하여 72고개를 돌아 내려 온 우리에게 평온함을 준다. 하지만 이 강은 티베트 동부의 탕굴라산맥(唐古拉山脈)에서 발원하여 남쪽의 윈난(雲南)성과 미얀마 동부를 지나 약 2천400㎞를 흐른 후 미얀마의 안다만해(Andaman Sea)로 빠지는 동남아시아의 대하천이다. 어느 강과 마찬가지로 누강(미얀마에서는 살윈강 Salween River)의 시작도 미미한 것은 똑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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