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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와 나

[헬로! 티베트 24편] 티베트 최대의 불교대학, 세라사원

라싸에 머무는 동안 티베트를 이해하기 위해 무척 애를 썼지만 웨이하이부터 동행한 중국 감독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민 접촉을 가장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충고는 내내 고민거리가 됐다. 티베트 땅에서 달라이라마 사진을 볼 수 없는 것은 알려진 대로다. 그래서 자주 찾은 곳이 사원이었다. 이미 관광지화 됐지만 티베트 사람에게는 비교적 자유로운 공간인 사원에서 그들의 면모를 찾아보고자 했다. 포탈라궁에서 조캉사원에서 또는 길거리에서 그들의 심오한 역사와 신심을 볼 수 있었지만 중국 점령 이후 티베트를 생각하는 티베트 사람들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세라사원(色拉寺)을 찾았다. 다른 사원과 달리 오직 순수한 불교연구에만 정진하는 사원이다. 엘리트 승려가 많아 그 내공이 중국정부를 두렵게 할 만큼 강력했었다는 사원이다. 티베트에 대해 새로운 모습을 발견할 수도 있겠다는 기대로 세라사원을 향한다.

세라사원은 1419년 총카파(宗喀巴, 1357~1419, 티베트불교의 중심세력인 겔룩파의 창시자)의 제자인 사캬 예쉐(Sakya Yeshe, 1354~1435)가 세운 사원으로 티베트 최대의 불교대학으로 알려져 있다. ‘세라’는 티베트어로 들장미라는 뜻이다. 14세기 후반 권력과 결탁하여 타락한 밀교의 종풍(宗風)을 쇄신하여 라마불교를 정립한 총카파(宗喀巴)가 제자들과 산중 동굴에서 수행할 때 산 아래 장미 숲이 있어서, 사원의 이름을 ‘세라사(色拉寺)’라고 명명했다.

총카파가 어느 날 제자들과 함께 산책을 하는데 큰 나무 아래서 말울음 소리가 들려 땅을 파보니 마두금강불상(馬頭金剛佛像)이 나왔다고 한다. 이에 그 불상을 모시고 사원을 세웠으니 이것이 바로 세라사원의 건립설화이다.

한때 5개의 교육기관에 5000여 명의 승려가 거주했던 거대한 사원은 현재 3개 대학에 300 명 정도의 승려만 남았다. 중국의 문화혁명 당시 사원이 대부분 파괴되었을 뿐 아니라 달라이라마가 인도의 다람살라로 망명할 당시 상당수의 승려가 함께 망명의 길을 떠났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정치적으로 많이 숙청당했다.

2008년만 해도 500명이 넘게 승려가 있었으나 그해 일어난 티베트 독립시위 이후 승려수가 줄었다. 당시 조캉사원과 세라사원이 중심이 되었기 때문에 탄압을 받았으리라 짐작된다.

세라사 정문
 

라싸의 3대 사원 중 하나인 세라사원은 라싸 시내에서 북서쪽 5킬로미터 쯤 세라우쯔산(色拉烏孜山)기슭에 자리하고 있어 찾기가 어렵지 않다.

라싸에서 버스로 30분 또는 택시로 15분 정도 갈수 있는 거리다.

2018년 세라사원은 공사 중이었다. 정문 좌우로부터 중장비가 동원된 대대적인 개축공사가 한창이었다. 가로수 길을 100여 미터 올라가야 주요 건축물들을 볼 수 있다.

사원 중앙 통로 양 옆으로 길게 늘어선 울창한 가로수들이 반긴다.

만추의 강렬한 햇살을 피하기 참 좋다. 티베트는 고원지대이고 먼지가 없는 청정지역이어서 햇살과 자외선이 강하다. 햇살은 강렬하다 못해 따가울 정도다.

이른 시간이지만 관광객 뿐 아니라 현지인들도 많다. 세라사원은 관정의식(灌頂儀式-가톨릭의 세례 같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불교에 입문시키려고 아이들을 데려온 가족들이 장사진이다. 코끝에 검은 칠을 하고 돌아다니는 아이들이 그들이다. 관정은 특히 젊은 사람들에게도 인기가 있다고 한다. 고승으로부터 결혼 전 자신의 미래를 점치고 자식들의 이름까지 미리 짓는 등 좋은 업(業, karma)을 얻기 위해서란다.

세라사원 평면도
 

입구 오른쪽에 티베트 전통양식의 불탑인 초르텐(Chorten)과 마니차를 지나 150여 미터 오르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중앙대로 끝 오른쪽에 위치한 대법당(촉첸, Tsokchen)이다. 주변으로 기초교육과정을 담당하는 세라 메(Sera Me Dratsang), 탄트라를 교육하는 세라 응악파(Sera Ngakpa Dratsang), 세라사원의 수호신인 하약리바(Hayakriva, 馬頭金剛-말머리 형상의 관세음보살상)를 모신 세라 제(Sera Je Dratsang) 등 3개 대학과 13개 캉첸(康村-승려 숙소)이 촘촘히 들어서 있다.

촉첸이라 불리는 대법당은 4층으로 된 건물로 사원의 각종 행사가 열리며, 수천 명의 승려가 들어갈 수 있는 크기다. 예전 전성기 때는 세라사원의 모든 승려가 이곳에서 법회를 했다.

최근 세라사원은 법당이나 불상보다는 오히려 승려들의 자연스런 토론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바로 승가대학중 하나인 세라 제(Sera Je Dratsang) 앞마당이 그 유명한 교리문답 토론장이다. ‘최라’(Chora)로 불리는 교리문답(또는 선문답)은 보통 오후 3시부터 약 1시간 정도(일요일은 열리지 않는다) 열린다. 독특한 교리문답 방식은 오늘날 외국인에게 인기 있는 관광 상품이 되었다.

무엇보다 세라사원을 굳건히 하는 것은 불교대학이다. 1959년까지 5000명 넘는 스님들이 거주하는 티베트 최대의 교육전문사원이었다.

이곳에서 승려시험인 게쉐(dGe shes-’정신적 안내자‘라는 뜻) 중 최고 학위 과정인 ‘게쉐 르하람빠(dGe shes Lharampa)’를 개설하고 있다. 티베트에서 ‘활불(깨달음에 도달한 사람)의 명칭을 얻기 위해선 보통 약 2~30년 정도의 수행을 거쳐 최종시험인 ‘게쉐’를 취득해야 한다. 이는 달라이라마나 판첸라마의 경우도 예외를 두지 않았다.

이처럼 승려교육기능에 특화된 세라사원은 다른 사원과 달리 정치무대와는 거리를 두고 학문연구에서 비롯된 종교적 권위로 중국정부를 두렵게 했다고 전해진다.

노점상들이 진을 친 입구를 지나 대법당 쪽으로 오르는 길은 크고 넓은 가로수가 시원스레 햇빛을 가려 주고 있었지만 이름만큼 기품이나 위엄을 느낄 수가 없다. 그럼에도 문화혁명 때 피해가 덜 했던 사원은 원형을 잘 보존한 듯 보인다. 대법당 쪽으로 올라 갈수록 부채꼴 형태로 사원의 진면모가 펼쳐지는데 좁다란 입구에서는 생각지 못한 규모에 놀란다. 더구나 체계적인 계획에 의해 건물이 지어진 것이 아니라는데도 지형에 어울리게 배치하여 건물이 많아도 빽빽하지 않으며 복잡한듯 하지만 어지럽지도 않다. 중심이 되는 대법당이나 탕카(thangka, 주로 면직물 위에 불교를 주제로 그림을 그리고 사원에 걸어두는 티베트 불교화. 한국의 탱화 같은 것)를 거는 구조물도 눈에 잘 띄게 배치되어 전체적으로 짜임새가 있다. 예전 공부하는 승려가 수천 명에 이르렀다는 불교학교의 저력을 보는 듯하다.

승려들의 기초교육과정을 담당하는 세라 메(Sera Me Dratsang)대학 건물
 

사원 정문(正門) 북단(北端)에 위치한 ‘토론의 광장’까지 가려면 은근한 오르막을 150미터 정도 올라야 한다. 일자로 곧게 뻗은 길을 따라 걷는다. 멀리서 보면 신비한 느낌과 함께 고고해 보였던 사원의 하얀색 담벼락이 가까이 갈수록 풍파에 시달린 듯 거무튀튀하여 스산할 정도다. 총카파가 수행했다는 돌무더기산과 승려들의 숙소 동을 지나간다. 다른 사원보다 조용하다. 세라사원은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유명한 것이 ‘변경(辨经-일정한 화두에 대해 경전을 이용한 문답 수행법)’이다. 어쩌면 대부분의 관람객들이 변경원이 있는 세라 제(Sera Je Dratsang)승가대학 광장에 모여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최라는 오후 3시부터 4시 사이에 진행된다. 하루에 딱 한번이라 놓치면 낭패다. 고지대임을 잊고 부리나케 변경 장소로 향한다.

변경이 열리는 세라 제(Sera Je Dratsang) 입구
 

짐작대로 변경 장소인 세라 제 광장은 이미 초만원이다. 가히 이 변경(辨经)의 명성을 짐작할 만하다. 오후 3시, 대법당 옥상에서 토론시작을 알리는 징을 울리자 스님들이 법당에서 봇물 터지듯 밀려 나온다. 그 유명한 ‘최라(chora, 토론의 광장)’에 모여 변경(辨经)을 하기 위해서다. 삼삼오오 스님들이 일사분란하게 정원 바닥에 자리를 잡고, 호기심 많은 관광객들은 사진 찍기 좋은 자리를 잡으려 혈안이다. 정작 티베트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고 가끔 눈에 띠는 티베트 순례자는 관광객들 뒷전으로 밀려 엉거주춤 서있다.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사진촬영이 드물게 허용된 곳이기 때문에, 그동안 여기저기에서 촬영금지로 혼이 나거나 목마른 관광객에게는 최고의 사진 촬영장소가 아닐 수 없다.

변경 감독관의 상석
 

토론을 집도하는 노승이 상석에 자리를 하자 드디어 토론이 시작된다. 마치 싸우듯이 때로는 춤추듯이 세라사원 스님들만의 독특한 변경이 관광객들의 혼을 뺀다. 재미있기도 하고 우스꽝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토론의제가 사전에 설정이 되고 동자승까지도 모두 참가하여 화두에 대해 격렬하게 토론을 하는 소위 문답학습이다. 두 사람씩 짝을 지어, 묻는 사람은 서서 발을 구르며 손뼉을 내리치면서 미리 배웠던 경전의 내용을 질문하면 앉아 있는 이가 답을 하는 식이다. 이런 동작을 어떤 이는, 위에 있는 손이 천당을 상징하고 아래손이 지옥을 상징하는 것이라고도 하고, 어떤 이는 진리와 교리의 충돌을 상징하는 것이라고도 한다. 불교의 교리에 대해서만 묻고 답하는 것이 아니라 불교를 따르는 삶, 생각 등을 수행을 통해 공부한 내용을 서로 묻고 답하면서 한번 더 새로운 깨달음을 받는 특별한 시간이기도 하다.

최라(chora, 토론의 광장)’의 변경(辨经) 모습
 

성적에 따라 승려가 되기도 하고 환속이 결정되는 중요한 학습이다. 토론이 깊어질수록 역동적인 승려들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싶어 하는 관광객들의 행동반경도 넓어져 광장은 아수라장이 된다. 그렇다고 특별히 제재하는 이도 없다. 이미 정례적인 관광 코스가 되어 버린 터에 광장은 쇼 무대가 된다. 무대에 선 승려들의 토론은 화두를 던지는 자의 화려한 액션만 살아 움직인다. 토론을 감독하는 승려는 토론을 제대로 하는지 보다 누가 돈 안내고 사진이나 비디오를 찍는지가 관심사처럼 보인다. 그러는 사이 몇몇 승려들은 딴전을 피우거나 장난질이고 심지어는 관광객과 사진을 찍은 사진을 보며 시시덕거리고 있다. 한때 대뿡사원만큼이나 영향력이 있었다던 불교학교의 모습은 상상 밖으로 세속적이다.

요즘 티베트에서 제대로 된 승려를 보기가 어렵다고 한다. 1960년대 문화혁명 때 철저히 사원을 파괴하고 탄압한 이후 중국정부의 유화정책으로 불교가 다시 살아 난 것은 티베트 사람들 마음속이지 사원이나 승려들은 아닌 듯하다.

승려가 되기 위해서 경전시험을 보아야하는데, 중국정부가 관장하는 승려시험에는 티베트인들이 수용하기 힘든 전제가 있다. 바로 달라이라마를 부정하는 서약서를 써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불신을 받고 있는 것이 요즘 티베트의 승려들이다. 중국정부는 1982년부터 종교의 자유를 허락한다고 선언했으나 정작 학문을 연구하고 불법을 전파하는 것보다 사원을 관리하는 역할이 주 임무로 변질되었다고 한다. 사정이 이러하니 승려들의 자질도 문제. 붉은 가사를 두르고 머리를 짧게 깎았다고 모두가 라마승이 아니다. 라마(喇, lama)가 뜻하는 존경받을 만한 승려가 많지 않다는 뜻이다.

라마승이 되는 것은 생각보다 과정이 길고 험난하다. 보통 티베트의 불교학교는 초등학교에서 대학까지 과정이 있다. 즉, 불교학교를 거치지 않으면 승려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승려는 하나의 제도적인 과정을 통해서 탄생되는 것이라 믿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라싸에는 진짜 승려가 없다는 자조적인 탄식을 하는 것이리라.

이미 경험했던 간덴사원이나 세라사원이나 모두 티베트 불교를 대표하는 사원이었지만 그 속의 승려들까지 티베트를 대표하는지 의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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