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하이(靑海)성 체육국 직원들이
호들갑이다. 그동안 탐험대는 가능하면 티베트의 전통장례식인 ‘천장(天葬)’을 볼 수 있게 알아봐 달라고 여러 차례 부탁을 했었는데 ‘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희소식. 그러나 확답은 할 수 없고 오늘 천장이 하나 예정돼 있으니 무조건 현장에 가보자는 것이다.
더 재고 말 것도 없이
일행은 급히 천장대를 찾아 나섰다. 사원 입구에 들어서니 인적은 없고 산등성이에 있는 타르쵸와 룽다가 어찌나 세차게 바람에 날리는지 퍼덕이는
소리만이 싸하게 긴장으로 다가 온다. 그러나 사원 정문 모퉁이를 돌아서자 어디서 나타났는지 순례객들이 쉴 새 없이 왔다 갔다 하고, 어울리지
않게 몽골식 간이천막이 쭉 늘어선 장터에는 락 음악을 크게 틀어 놓고 장사판을 벌이고 있었다.
허참, 그렇게 보기 힘들다는 천장을
이곳에서? 틀렸구나 싶었는데 그 넓은 사원 여기저기를 뒤지던 칭하이성 체육국 직원에게서 무전이 날아든다. 지금 천장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급히 찻길을 돌려 야트막한 언덕길에 올라서자 멀리 산중턱에서는 얼핏 봐도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체육국 직원의 안내대로
살금살금 다가가 조심스레 카메라부터 들었다. 어느 것을 어떻게 찍을까 망설이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뭐라 큰소리를 치더니 대뜸 카메라 앞을 가로
막는다. 찍지 말라는 것. 알고 보니 오늘 천장을 하는 이의 동생이었다. 다행히 체육국 직원이 사정을 얘기하니 그러면 자기 형이 좋은 곳으로 갈
수 있게 부조를 하라는데 부조의 내용인즉 자기 형을 위해 소의 간과 콩팥을 사서 독수리에게 보시를 해달란다. 그래야 좋은 곳으로 갈 수 있다고.
순간 어안이 벙벙하다. 갑자기 어디 가서 소의 간과 콩팥을 구한단 말인가. 다행히 중국 경험이 풍부한 현광민 탐험대장이 장기를 사는 대신 선뜻
부의금을 내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러는 사이 천장은 계속되고 있었다.
천장은 흔히 ‘조장(鳥葬)’이라고도 하는데, 죽은 시신을 토막내거나
살을 찢어 새가 먹기 쉽게 만들어 육신은 독수리에게 공양하고 남은 뼈는 추스려 화장을 하는 것을 말한다. 이 장례식을 주도하는 라마승을
‘돔덴(domden)’이라고 하는데 죽은 자의 육신을 해체하기도 하지만 죽은 자의 시신이 완전히 없어질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는다. 새들이
육신을 먹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며 명복을 빌고 다른 세상에서 더 나은 생을 살기를 축원한다.
이 끔찍한 조장은 왜 하는 것일까?
서역고원에서 사람이 죽으면 딱딱한 땅을 파서 묻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화장을 할 땔감도 부족한 유목민에게 장례는 쉽지 않은 일. 그래서 티베트
사람들은 살은 새들에게 공양하고 나머지 뼈 중 일부만 화장을 하는 그들만의 장례식을 하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행위는 윤회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티베트 사람들은 죽음 뒤에 있는 또 다른 세상에 육신이 함께 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영혼만이 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라고
한다.
내가 본 천장도 바로 그런 식이었다. 라마승 2명이 집도하는 천장대는 피 냄새를 맡은 수백 마리의 독수리떼가 방금 하늘에서 내려
앉아 눈을 번뜩이며 장례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선 커다란 통나무 도마 같은 원목대 2개가 놓여 있고 그 옆에 시신을 담아 온 듯한 보자기가
놓여 있다. 집도하는 라마승과 유가족이 애도하는 장례식장은 엄숙하면서도 덤덤한 분위기다. 마른 침을 삼키기도 전에 라마승은 익숙한 솜씨로 시신의
일부를 떼어내 도마 위에 올려놓고 토막내거나 크고 작은 해머를 이용해 다져 독수리에게 나눠준다. 장기들은 뚝뚝 끊어서 던져 주고, 마지막으로
남은 두개골은 도끼로 쪼개 뇌수를 준 뒤 뼈는 잘게 부셔서 한 점 남김없이 독수리에게 나눠 주는 것으로 천장이 끝이 났다.
한참은
멍했다. 참관했던 대부분의 탐험대원들은 끔찍하고 혐오스럽다고 하고. 장기 덩어리를 독수리 떼에게 던져 주는 모습도, 마지막으로 두개골이 커다란
해머에 산산이 부서져 가는 모습은 생전 처음 보는 나에게 분명 충격적이고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이 뒤통수를 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잠깐이었다. 생각해 보니 난 그 전 과정을 아무런 거부감 없이 촬영하면서 모두 지켜보질 않았던가. 그랬다. 티베트인은 그 천장을 가장 존귀한
장례식으로 여긴다고 했고 나는 그것을 인정한 것 뿐이다. 아주 간단한 문제였던 셈이다.
티베트 사람들 모두 천장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장례식에는 몇 가지 종류가 있는데, 땅 속에 묻는 매장부터 화장, 강물에 떠내려 보내는 수장, 그리고 조장이다. 전염병으로 죽거나
어린나이에 질병을 얻어 죽으면 수장을 하는데, 그래서 티베트사람은 민물고기를 먹지 않는다. 가장 안 좋은 것은 매장이라고 한다. 환생을 믿는
티베트 사람은 매장이야말로 환생을 못하게 하는 저주받은 장례라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별다른 질병이나 큰 허물없이 살다가 죽은 사람들이 하는
가장 일반적인 장례가 조장이다. 티베트의 전통장례식이라 할 수 있는 조장은 1950년 중국의 침공 이후 철저하게 금지됐던 것이 1980년대 초
다시 허용된 것으로 알려졌다. 소수민족에 대한 중국정부의 정책이 유화적으로 바뀌면서 전통을 되찾은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천장에 대해서 여러
가지를 금기시하며 통제하고 있다고 한다. 장소제한은 물론이며 외부인의 관람, 사진촬영 등도 극도로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있고 동영상 촬영은 절대
금지하고 있는 실정. 얼떨결에 우리의 천장 촬영을 제지하지 못했던 중국 감독관은 촬영내용에 대해 내내 궁금해 하더니 급기야 공개를 안했으면
좋겠다는 요청을 하기도 했다.
이런 때는 일단은 피하는 것이 상책. 우리는 재빨리 천장대를 빠져 나와 문성공주 묘(文成公主 廟)를 찾아
나섰다. 당나라 태종의 양녀였던 문성공주가 정략결혼의 희생양이 되어, 토번국(지금의 티베트)의 왕 송첸감포(松贊干布)에게 시집가게 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송첸캄포는 티베트에 최초의 강력한 통일왕조를 세우고 세력을 확장했던 인물이다.
문성공주는 당시 당나라의 도읍이었던
장안(지금의 西安)을 출발, 시닝(西寧), 마더우(瑪多),위수(玉樹)를 거쳐 라싸(拉薩)로 가던 길에 이 위수에서 1년을 머물다 갔다고 한다.
그때 이곳 사람들을 구휼히 여겨 농사기술과 방직, 자수기술을 등을 가르쳐 가난을 면하게 해주었다고 한다. 문성공주묘는 그가 죽은 후 은혜를 잊지
않은 이곳 사람들이 공덕을 기려 세운 사원이다.
우리가 이곳을 찾았을 때는 정부의 보조금으로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하고 있었다. 도대체
문성공주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서 들어가려니 젊은 라마승이 가로 막는다. 지금은 공사 중이고 또 관람을 허락할 수 있는 노스님이 출타 중이라
볼 수 없다고 한다. 그러잖아도 문성공주상이 있는 법당 문을 자물통으로 채웠으니 달리 방도도 없었다. 저녁 6시 무렵. 선참급 승려들이 삼삼오오
사원을 빠져 나가고 있었다. 기회다 싶어 그 젊은 라마승에게 인터뷰 요청을 했다.
근조아랑이라는 이 젊은 라마승은, 집안에 한명씩은
라마승이 되어야 하는 관습 때문에 1년전에 불교에 귀의했다고 한다. 올해 나이는 이제 16세. ‘사람이 죽으면 어떤 세상에 가게 되고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어서 귀의했다’고 또렷이 말하는 소년의 얼굴에서 그동안 보아왔던 길거리의 어린 라마승이나 티베트인과는 조금 다른 인상을 받았다.
적어도 오늘까지 그처럼 조리있고 자신있게 말하는 티베트 사람을 보지 못했으니까. 그런 소년 라마승도 문성공주와 관련해서는 우리가 자료를 통해서
알고 있는 내용과 별반 차이가 없는 도식적인 답변만 한다. 더구나 인터뷰 내내 밖을 힐끔힐끔 쳐다보며 눈치를 보고 있었다. 우리와 동행했던 중국
감독관들이 신경이 쓰였나보다. 짐짓 장난기가 발동했다. “티벳인들이 왜 (한족인) 문성공주를 사랑하느냐?” 했더니 조금은 당황한 듯 “환경도
맞지 않는 이국땅에서 다른 민족인 티베트 사람에게 헌신했기 때문”이라고 얼버무린다.
중국이 해방이라고 말하는 50여년 세월동안 보이지
않게 통제하고 그 통제에 압박당하며 살아 온 티베트 사람들의 일그러진 삶의 비애를 느끼는 순간이다. 실제로 우리 일행이 문성공주묘의 부감을 찍기
위해 맞은 편 언덕에 올라갔을 때 사원 구석에서 두 손을 뒤로하고 고개를 숙인 채 중국 감독관 앞에 서있는 소년 라마승의 모습을 목격했다. 아주
심각하고 험악한 취조를 받고 있구나 하는 느낌에 미안함과 함께 안타까움이 그 곳을 떠나서도 한 동안 머리 속을 쉽사리 떠나지
않았다.
탐험대는 가을이 깊어져 노랗게 물이 든 황금빛 초원을 지나 이름도 알 수 없는 산 구비를 뱅뱅 돌아가고 있었다. 워낙 외져
인적이라곤 찾아 볼 수가 없는 곳이라 딱히 가는 사람도 없는 그런 곳을 가고 있다. 해발 4천500m를 수직상승과 하강을 거친 탐험대 차량이
바튼 숨을 몰아쉬며 당도한 곳은 ‘레이바거우(勒巴溝)’마을이다.
현지인들만 겨우 알고 있다는 이 곳에는 수 ㎞에 이르는 마니석이 있다.
좁은 계곡으로 들어서자 깎아지른 절벽의 바위벽면을 시작으로 2~3㎞에 이르는 협곡에 수많은 경전과 티베트의 육자진언인 ‘옴마니반메홈’을 새겨
놓았다. 그 규모나 수량에도 놀라지만 크고 작은 돌 하나하나에 글씨를 양각한 정성과 신앙심을 생각하면 혀를 내두를 수밖에. 도대체 누가 이러한
불심을 그려 넣었는지 그저 경이롭기만 하다. /백민섭 전 경인방송
프로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