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천년 고도이자 실크로드의 출발지
시안(西安). 한나라 때 ‘자손이 영원히 평안하기를 바란다(慾其子孫長安)’는 뜻으로 ‘장안’이라고 했으나 명나라 (1369)에 이르러 ‘서쪽이
평안하다’라는 뜻으로 시안(西安)으로 불려진 곳이다. 시안은 거대한 장기판 모양으로 이루어져, 과거에는 길이 36㎞, 높이 5m에 이르는 긴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고 한다. 지금 남아 있는 것은 남쪽 성벽의 일부다.
오늘날의 시안은 예전의 화려함이나 웅장함을 상상하기 어렵다.
현대화의 바람은 3천년 고도 시안도 빗겨 갈 수 없는 광풍이었다. 찬란했던 장안 시절의 위용은 기념물처럼 명맥만 유지한 채 콘크리트 빌딩과
상가로 변한 생채기 투성이다. 비교적 전통이 살아 있다는 ‘베이위안먼(北院門)’의 골목도 온통 먹자판이요 거리악사들의 불협화음만 있을 뿐,
여기가 그 옛날 실크로드의 출발점이자 최대의 교역장소 중 하나였다는 사실을 믿기 어렵다. 구멍가게만한 비단가게 몇 집이 고가의 상품을 진열하는
것으로 실크로드의 흔적이 남아 있을 뿐이다.
과거 전설적인 장안의 서쪽 관문에 위치했고, 수 백 년 동안 대상들이 진귀한 비단을 싣고
서역으로 끝없는 여행길을 시작하던 바로 그 자리에 거칠게 만든 거대한 돌조각 하나가 놓여 있다. 실크로드를 개척했다는 장건을 필두로 실크로드에서
만날 수 있는 여러 민족들이 형상화된 조각상이었다. 그저 심드렁해 보이는 이 무미건조한 현대 조형물이 나흘 째 내리는 시안의 비를 맞고 있었다.
이 조각상을 뒤로 하고 탐험대는 간쑤(甘肅)성의 성도(省都) 란저우(蘭州)를 향한다.
지난 시절 간쑤성은 고대중국에서 가장 중요한
동서교역로에 위치한 까닭에 많은 이익을 보았다. 서안에서 출발했던 길은 간쑤성의 성도 란저우에서 티베트와 몽골방향으로 갈렸다. 교통의
분기점이었던 란저우는 중국 서부 접경지역에 살던 이민족들이 교역을 하기 위해 모였던 곳으로 한 때 부귀영화를 누리던 도시였다.
그러나
실크로드의 영화가 끝나면서 란저우 시대도 막을 내렸다. 대부분이 산이나 사막으로 뒤덮힌 불모의 간쑤성, 그리고 그 성도 란저우는 오랫동안
가난하고 잊혀진 지역이었다.
그런 란저우가 상업의 중심으로 다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중국공산당이 승리한 후 중국의 국가철도망
확장계획에 란저우가 포함되면서부터다. 1963년 완공된 1천892㎞ 길이의 란저우∼우루무치 철도는 간쑤성과 란저우의 고립상태를 상당부분 완화시킨
계기가 됐지만 산업개발과 광산업 등 공업화가 야기한 심각한 환경문제만을 안고 침체됐다.
그러던 차에 ‘서부대개발’은 란저우에 천재일우의
호기를 제공했다. 간쑤성, 청해성, 신장자치구를 가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동서교통의 요충지 란저우는 바로 서부대개발의 ‘뉴 프런티어’가
된 것이다. 불과 10여년 전 인구 수십만의 변방도시 란저우는 서부대개발의 영향으로 인구 300만명이 넘는 서북부 최대의 공업도시로 급성장했고,
최근 란저우-우루무치를 연결하는 1천㎞가 넘는 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서역으로 통하는 현대판 ‘실크로드’의 꿈을 다시 이루게 됐다.
그러나
좋은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지형적 특성도 있지만 1950년대 이후 전략적으로 추진됐던 급속한 공업화 정책이 란저우를 공해도시로 만든 것이다.
환경오염의 심각성은 란저우 일대의 사막화를 촉진하고 있다.
청해성(靑海省)으로 가기 위해 황하대교를 건널 때다. 황하대교 끝에서 시작된
협곡의 민둥산부터 스프링쿨러가 돌아가고, 사방공사와 함께 조림사업을 하고 있다. 이는 도시 코앞에 사막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전에는
서쪽에서 날아오는 모래를 막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지금은 보다 철저하고 거대한 생태복원사업을 시행중이다. 길이 6천㎞, 너비 4천㎞에 이르는
지역에 ‘거대한 숲’을 조성해서 사막의 확산을 막는다는 계획이다.
이 거대한 녹화사업이 성공을 거둘지는 두고 볼 일이다. 녹화사업
자체가 워낙 방대하고 엄청난 프로젝트인 까닭에 성공여부는 중국인들도 반신반의하기 때문이다. 모래산에 나무 젓가락 꽂듯 작은 묘목들이 뱅뱅이 돌아
민둥산에 심어져 있는 모습을 120여 ㎞ 구간에 걸쳐 직접 목격했지만, 그 역사(力事)는 10년은 지나야 결과를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무모한
것 같지만 한뜸 한뜸 꿰어 옷을 짓는 심정으로 산을 가꾸는 중국인들의 느린 걸음이 놀랍고도 존경스럽다.
시안에서 란저우로 가는 길은
중국인민해방군이 훈련을 한다는 이유로 고속도로를 막고 있어 국도로 우회할 수밖에 없었다. 예상했던 대로 국도는 진창이고, 고장난 차들은 장소에
구애 없이 돌멩이 몇 개로 표식을 하고는 제멋대로 정차해 있어 탐험대의 안전을 수시로 위협한다. 가지런한 것은 수양버들 곱게 늘어진
가로수뿐이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국도에서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톨게이트에서 통행료를 징수한다. 가관인 것은 톨게이트 옆에
정부지시문건으로 요금징수의 이유를 커다랗게 입간판으로 해놓았는데, 공로(公路)사업과 도로보수비 충당을 위해서란다. 하긴 이것이 어디 란저우 가는
길 뿐이겠는가?
간쑤성의 마지막 도시 평량(平凉)을 지나 영하자치구로 들어선다. 26개의 성(21개의 성과 5개의 자치구)중 가장 가난한
자치구로 알려진 곳이다. 북서부에 위치해 기후가 혹독,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찌는 듯한 더위로 관개시설이 필수적이다. 영하자치구에 황하가
없었다면 사람이 살지 못했을 만큼 척박한 곳이다.
인구의 3분의 1이 회족이고, 나머지는 한족이다. 소수민족인 회족은 당나라 때 중국에
왔던 아랍과 이란상인들의 후손이다. 아직도 회족의 대다수는 이슬람을 고수하고 있지만 전반적으로는 한족문화에 동화됐다고 한다. 이 지역은 오랫동안
농경지역이었다. 1958년 바오터우(包頭)∼란저우 철도가 완공되면서 고립에서 벗어날 기회를 잡았지만 결과는 순탄하지 않다.
탐험대가
지나 온 수 십 ㎞ 영하자치구 회족마을은 대다수가 아직도 다 허물어진 토담집에서 살고 있었는데, 사람이 산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마치
우리나라 태백의 폐쇄된 탄광촌처럼 짙은 회색으로 뒤덮힌 암울한 회족의 터전에서 21세기 모습을 찾을 수가 없다.
시안에서 약 115㎞
떨어진 감숙성 빈현(彬縣)을 지나면 312번 국도변에 거대한 사원 대불사(大佛寺)가 있다. 당나라 초기(628년) 당태종이 전사한 병사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이 사원을 지나면 산세가 변하기 시작한다. 마치 구름 같은 평평한 산들이 봉긋봉긋 병풍처럼 나타나는데 자세히
보면 산이라기보다는 사방이 온통 계단식 논과 밭으로 펼쳐지고,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황토협곡이다.
어느 한 곳 빈틈없이 모두 사람의
손길이 닿아 있다. 어떻게 이 넓고 높은 산까지 개간을 했을까? 논과 밭 사이로는 수많은 크고 작은 토굴이 보인다. 농작물을 저장하기도 하지만
아직 사람이 살기도 한다. 어느 곳은 폭 1~2m 정도로 논이라고 하기에는 부끄러운 자투리 땅. 그러나 농부에게 땅은 생명과도 같은 것이라 그
곳에도 사람의 손길이 닿은 것이다. 자연은 위대하고 그 자연은 농심에 젖어 있어, 고귀하고 위대한 것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편
서글픔도 있다. 중국 서부대개발의 여파로 결단난 동네도 없지 않다. 개발붐에 편승해 갑자기 넓어진 도로, 끊임없이 왕래하는 차들로 인해 평화롭던
마을이 두 쪽이 됐다. 에코 브리지를 찾는 짐승처럼 가드라인과 중앙분리대를 넘어 누군가를 찾아가고 있는 코흘리개 꼬마가 애처롭기만
하다.
十八里鎭 톨게이트를 지나자마자 란저우로 연결되는 고속도로를 만났다. 500㎞의 지옥 같은 국도에 지친 대원들은 실크로드를
만났노라며 환호성을 친다. 그러나 란저우 가는 길의 명물처럼 되어버린 계단식 논의 파노라마는 거기서도 끝나지 않았다. 멀리서 보는 계단식 논과
밭에는 때로는 능선을 따라, 때로는 산길 가는대로 가느다란 길이 나 있다. 산책길 같은 그 길을 따라 농부들은 해발 수 백 m를 오르내리며
농사를 지으러 다닐 것이다. 그 실 같은 길에서 결코 쉬운 삶은 아니되 농심을 천심으로 알고 살아가는 이들의 순수와 행복을 느꼈다면 지나치게
오만한 것일까.
해는 저문 지 오래고 란저우까지는 아직도 200여 ㎞가 남았다. 시커먼 민둥산 계곡을 빠져나오자 멀리 아치형 불빛이
아른거린다. 황하대교다. 난향 가득한 도시, 란저우는 멀고도 험한 주행 끝에 지친 탐험대에게 땀과 졸음으로 다가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