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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와 나

중국 서부 극지를 가다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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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출고시간 :2005-11-08 오후 7:33:07
URL : http://www.itimes.co.kr/News/Default.aspx?id=view&classCode=401&seq=230786
대자연에 압도되어 탄성도 잃어버려
(3)란저우(蘭州)∼시닝(西寧)∼마두어(瑪多)
 아침부터 기분 좋은 소식이 있었다. 란저우(蘭州)-시닝(西寧)간 고속도로가 개통됐다는 것. 오전 11시경 여유 있게 고속도로를 즐기고 있을 즈음 마창(馬强, 중국체육총국 감독관)씨로부터 화급한 무전이 온다. 칭하이(靑海)성 여유국장이 시닝 톨게이트에서 우리 일행을 기다린다는 것이다. 탐험대는 솜이불 같은 아스팔트에서 한껏 속도를 올린다.
 란저우에서 시작된 녹화사업은 끝없이 펼쳐지고, 수천 수만 년 힘겹게 숨을 쉬고 살았을 법한 황토산들도 생긋 미소짓는 듯하다. 협곡 멀리 드문드문 스쳐가는 토담집의 굴뚝에서 아침을 준비하는 흰 연기가 피어오르고, 한집 건너 커다란 위성안테나가 보인다. 그 사이를 뚫고 해발 2천m가 넘는 산등성이 여기저기로 고압선 철탑이 퍼져나 있다. 뭔지 모르지만 중국은 지금 거대한 숨쉬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란저우에서 칭하이성까지 240㎞에 이르는 고속도로는 작년에 개통되었다고 한다. 이 오지에 막대한 비용을 들여 고속도로를 놓은 이유는 무엇일까? 시닝이 그동안 전략적 요충지임에도 도로가 좋지 않아 어려움이 많았고, 시닝 일대의 막대한 지하자원과 생산물이 도로사정으로 유통이 안돼 경제적 손실은 물론 지역개발이 더딘 결정적 이유로 작용해 왔다는 설명이다.
 향후 관광지로서 발돋움하고 서부개발의 요충지로서 거듭날 기회를 노리고 있는 칭하이성으로서는 새로운 전기를 맞은 것은 분명하다. 칭하이성으로 가까이 갈수록 황하는 점점 그 몸체가 가늘어지고, 협곡은 크고 깊어져 간다.
 시닝 톨게이트에서 칭하이성 여유국장 일행과 만났다. 관광사업의 총책임을 맡고 있는 칭하이성 담당자 입장에서는 4륜구동 차량 넉대를 이끌고 나타난 우리 탐험대가 귀빈이 아닐 수 없다. 호텔로비에 마련된 환영식장에는 칭하이성 여유국 직원과 호텔직원, 그리고 취재진까지 몰려들어 환대해 준다.
 시닝은 칭하이성의 성도이자 유일하게 큰 도시다. 중국에 의해 오래전에 건설된 이 곳은 16세기부터 군사요새와 무역중심지 역할을 해왔다. 요즘은 칭하이-티베트 길을 다니는 외국여행객들의 출발지이자 경유지다. 버려진 골짜기에 자리한 역사만큼 우울했던 시닝도 요즘 한창 활기를 띠고 있다. 다운타운을 중심으로 고층건물과 대형 슈퍼마켓, 아파트 등이 들어서며 제법 대도시의 형태를 갖추었고 곳곳에서 일고 있는 건축 붐에 사람들도 무척 세련되고 여유로워 보인다.
 다음날 아침. 드디어 ‘중국 서부 극지 대탐험’이 본격적으로 시작 되는 날.
 지난 9월 28일 산둥(山東)성 웨이하이(威海)에서 출발, 서북부 칭하이(靑海)성의 성도 시닝(西寧)까지 2천500여㎞를 달려 오늘에 이르렀다. 오늘의 목적지는 마도우(瑪多). 해발 4천200m의 고원지대다. 조금은 걱정이 된다. 해발 2천300m 정도인 시닝보다 무려 1천900m가 높은 곳. 그 때문에 어젯밤 현광민 탐험대장은 장시간에 걸쳐 대원들에게 정신무장을 시켰다. 고지적응에 실패한 사람은 무조건 후송, 귀국시킨다는 것이 요지였다.
 시내를 벗어나자 이내 시골 마을이 나타난다. 들판에는 이미 추수를 끝낸 볏단들이 곱게 서있고 부슬부슬 비가 내린다. 그 비는 해발 3천m 농업구에서 유목구로 넘어서자마자 눈으로 변한다. 칭하이후(靑海湖)로 가는 일월산 고개에서는 도로가 이미 눈으로 얼어붙어 본격적인 탐험에 나선 대원들의 들뜬 마음이 일순 긴장으로 바뀐다. 출발부터 시험 당하고 있었다. 주위는 온통 눈밭. 평소에도 만년설이던 멀리 봉우리마다 새 옷을 갈아입느라 바쁘고 서서히 물들어 가는 백양나무 노란 단풍은 유별나게 아름답게 다가온다.
 가끔 도로를 점령하는 양떼와 야크 떼를 피하며 광활한 초원방목지대를 달릴 때 탐험대원들은 그저 멍하니 대자연에 압도되어 단말마적인 탄성만 지른다. 초원 여기저기에 노니는 야생조랑말과 황양들. 중국의 야생보호종이라는 수식어보다는 그들이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사는 이 자연의 주인이라는 사실이 부러웠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그런 환상도 잠시 차이다무(紫達木) 분지에 올라서자 탐험대는 비포장도로에 들어선다. 차를 세워 물어보니 비포장상태가 200㎞ 정도 된단다. 그러나 노면상태가 비교적 괜찮아 탐험대는 시속 70㎞로 일정을 진행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200㎞나 되는 도로공사를 한다면서 중장비 등은 별로 보이지 않고 사람이 공사를 한다는 점이었다. 알고 보니 중국의 도로공사는 일단 길이 나면 약 2년 동안 길다짐이라 해 얼었다 녹았다 진창이었다 말랐다하는 과정을 충분히 거쳐 지반이 다져지면 포장을 하기 때문에 애써 많은 장비와 인력을 투입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는 또 막대한 비용절감 효과도 있다고 한다. 나름대로의 방법이긴 하지만 중국인들이 하는 일이란 종종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많다. 그 넓은 초원에는 양 목축업자 이외에는 인적을 찾아 볼 수가 없지만 도로공사를 한다는 도로주변에는 허름한 천막들이 군데군데 숙영지처럼 설치되어 장기체류하고 있었는데 도로공사를 한다는 사람들이 삽 몇 자루만 가지고 흙을 퍼 올리고 있었다.
 차이다무 평원을 3시간여쯤 달리자 멀리 하얀 눈을 뒤집어 쓴 난산산맥이 보인다. 저 산맥을 넘어야 오늘 잠을 잘 수 있는 마두어에 도착할 수 있으리라. 초원제일진(草原第一鎭). 초원의 첫째 마을이라는 입간판이 서있지만 사실은 마지막 마을인 허카. 난산산맥을 넘기 위해서 잠시 들른다.
 마을 한가운데로 대로가 나있어 대형차량들이 수시 왕래하고, 마을은 마을대로 여기저기 집을 짓느라 시끌벅적하다. 젊은이들은 할 일이 없고 아이들은 마땅히 놀 곳이 없어 모두 마을 상가주변에서 구경하고 배회하고 다 헤진 양복에 상표스티커까지 붙어 있는 선글라스를 쓴 할아버지, 오토바이를 탄 라마승, 구걸하는 사람들. 뭐하나 정비된 것 없이 마을은 좌충우돌하고 있다. 그들이 우리를 구경 왔다. 고속도로처럼 왔다 갔다 하는 콧물을 단 꼬마부터 언제 씻었는지 짐작조차 안 되는 떠꺼머리 총각, 그리고 라마승까지. 그들과 함께 어울려 본다. 처음엔 쭈빗쭈빗하던 사람들이 이내 움찔하는 특유의 미소로 다가 온다. 아이들에게는 사탕을 나눠주고 총각과 라마승에게는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 주고. 신기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한가보다.
 해발 3천900m가 넘는 하커산을 넘고 또 해발 4천m대의 고개를 몇 개나 넘고 내려가기를 반복해서야 지긋지긋한 난산산맥을 벗어날 수 있었다. 해발 4천200m에 위치한 첫 숙박지 마두어(瑪多)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10시가 넘었다. 파김치가 된 대원들에게 제공된 숙소란 이름하여 ‘초대소’. 우리로 치면 깡촌의 여인숙이 딱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문제는 대원들 몇몇이 고소증세(고산병)가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 특히 쌍용 자동차 연구원 황일평 대원과 내가 심했다. 나는 몇 번의 고산등반 경험이 있었으므로 의외였는데, 난산산맥을 넘으면서 차량 주행장면을 찍기 위해서 썬루프에 몇 차례 올라가 촬영하는 동안 머리를 차게 식힌 것이 결정적이었던 것 같다. 여기서 적응하지 못하면 다시 시닝으로 후송할지 말지를 심각하게 고민해야하는 상황. 가면 갈수록 오도가도 못하는 고립무원지대로 들어가기 때문에 유사시 대책이 없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본격적인 탐험이 시작된 첫날 이 모양이라니. 무연탄 난로에 세숫대야에 물을 데워 써야하는 첩첩산중 초대소는 갑자기 바빠졌다. 난로에 불을 지피고 물을 데우고 침낭과 고산병 예방약 등,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동원하기 위해 대원들은 이리 뛰고 저리 뛴다. 그러나 정작 환자들의 상태는 차도가 없다. 두통은 심해지고 사고능력은 떨어지고 일순 두려움까지 밀려온다. 대원 둘이 나자빠지면 탐험은 그야말로 일장춘몽이 된다.
 이런저런 걱정이 두통에 더해진다. 마다 초대소의 하룻밤은 그저 죽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럽고 무기력한 시간이었다. 그 고통을 표현하자면 치통보다 10배쯤 더 아프다고 보면 된다. 다음날 아침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황일평 대원과 나는 미음 같은 가벼운 쌀죽을 몇 수저 뜨고 위수수(玉樹)로 긴급후송 됐다. 그 지역일대에는 위수밖에 병원이 없기 때문. 333㎞를 어떻게 왔는지 모를 정도로 산 넘고 물건너 옥수에 도착하자마자 병원에 입원했다.
 전장의 야전병원 같은 ‘옥수의원’은 진료기란 구식 혈압계가 전부. 손톱 때가 꼬질꼬질한 담당의사는 이제 23세가 됐다는 수련의. 이쯤 되면 차라리 진료거부가 낫겠다 싶을 정도다. 링거를 맞아야 한다고 한다. 결국 포도당과 이뇨제 등 수액을 4병씩이나 맞아야 했다. 놀라운 것은 수액이 들어가는 만큼 우리가 컨디션을 회복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병원에서 수액을 맞은 다음에야 탐험대는 새로운 출발을 준비할 수 있었다. 그 사이 난 이틀을 잃어버렸다. /백민섭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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