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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가 총카파가 1417년 설립한 최초의 겔룩파 종파의 사원.문화대혁명때 대부분 파괴됐으나 1990년대에 재건이 시작돼 옛모습을
부분적으로 회복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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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탐험대원들의 표정이
유난히 밝다. 화창한 날씨가 기분을 돋구기도 했지만 편도 약40킬로미터 밖에 안되는 짧은 이동거리가 마음을 홀가분하게 했으리라. 그동안 평균
하루 500킬로미터 이상을 달려 왔던 터라 라싸 근교에 있는 간덴(甘丹)사원을 가는 길은 그야말로 소풍길. 라싸시내를 빠져 나와 동쪽으로 길을
잡아 간다. 건물에 가려졌던 포탈라궁이 멀리 보이자마자 라싸를 출입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인 다리가 나타난다. 편도 2차선이 빡빡한 좁은
도로지만 다리 양 끝으로 무장군인이 경계를 서고 있다.
현광민 탐험대장이 습관적으로 촬영금지지역이니 일체의 사진촬영을 하지 말라고
무전을 날린다. 참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다리를 주요시설이라고 통제하는 꼴이 불쾌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티베트독립을 주장하는 세력들의 시설폭파를
우려한 조치라는 현대장의 설명을 들으니 오히려 빙그레 웃음이 지어진다. 물론 그것이 이유의 전부는 아니지만, 탐험 20여일이 지나는 동안
티베트독립에 대한 의지를 어디에서도 확인할 수 없었던 내겐 역설적으로 다리 위의 군인들이 티베트 독립 세력이 있음을 확인 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간덴사원으로 가는 길은 곱게 아스팔트로 포장된 길. 촨짱공로를 통해 수시로 대형화물차들이 아슬하게 우리 탐험대 차량을 위협하듯
지나고, 키츄강(얄룽창포강 지류의 하나, 라싸강이라고도 함)을 따라 군데군데 늘어 선 마을 주변으로는 비닐하우스가 꽤 많이 보인다. 티베트
출신인 뤄부(26세,티베트지역 안내인)에게 들으니 비닐하우스의 주인은 대부분 한족이라고 한다. 그럼 그렇지. 티베트인들의 주수입원이, 유목민은
야크나 양의 고기를 파는 것이고 농사를 짓는 사람은 ‘칭커’라는 보리 농사가 전부인데 그걸로는 아무리 몸부림을 쳐봐야 비닐하우스를 할 만한 돈을
모으기란 요원하다는 것이다. 상대적 빈곤이 심화되고 있어 오히려 몇 년전부터는 유목이나 농사를 포기하고 도시로 가는 등 이농현상이 심해 졌다는
것이다. 빌어 먹어도 도시가 낫다는 것.
중국정부가 자랑하는 기간시설인 도로의 혜택도 결국 한족이 가장 많이 받고 있는 셈이라고 한다.
공들여 지은 하우스 농산물이 이 촨짱공로를 통해 대도시로 공급되고 제대로 값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티베트 인민들의 삶의 질 개선과 경제적인
혜택을 위해서 만들었다는 길에서 조차 티베트 사람들의 암울한 미래가 퍼득 스친다.
1시간 정도 달리자 오른쪽으로 갈라진 비포장 도로에
들어선다. 간덴사원으로 가는 초입.
라싸의 동쪽 외곽에 위치한 우지방은 서쪽의 창지방(시가체지역)과 함께 오랫동안 티베트의 중심무대였다.
이 일대를 흐르는 얄룽창포강에서 통일티베트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한때 창지방으로 정치무대가 옮겨진 적도 있지만 5대 달라이라마가
티베트를 재통일 한 후 라싸로 수도를 천도하면서 근대까지 정치적으로 중심 역할을 해 온 곳이기도 하다. 간덴사원은 바로 그런 시절의 또 다른
정신세계의 중심 역할을 했던 대사원이다.
굽이굽이 먼지를 일으키며 순례길을 찾아 올라가는 탐험대 차량. 고도가 높아질 수록 멀리 키츄강이
모습을 드러내고 평화로운 대자연이 화폭처럼 펼쳐진다. 해발 4천3백미터에 있다는 간덴사원을 향해 오르는 길 옆으로는 야크떼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고 길 바로 위까지 다가 온 구름들이 풍선처럼 매달려 있다. 30여 분 오름질을 더하니 안내인 뤄부가 간덴사원이 가장 잘 보이는 지점이라고
차를 세운다. 차 때문에 생긴 황토먼지가 사라지자 그림처럼 드러나는 사원. 마치 지중해 산토리니섬의 하얀집들처럼 햇살에 번쩍하는 것이 파란하늘과
맞닿아 신비하기까지 하다. 간덴의 의미는 ‘즐겁고 유쾌하다’는 뜻으로 서방정토라는 의미도 있다고 한다.
간덴사원은 겔룩파 종파의
창시자인 총카파가 1417년에 설립한 최초의 겔룩파 종파의 사원이다. 간덴사원을 세운지 2년 후에 총카파가 죽자 그의 제자인,갸찹 제와 케드룹
제가 원장의 역할을 이어받아 전통을 이었다. 이들은 총카파의 사상을 심화하고 체계화시켜 교단의 기초를 잡았다고 한다. 현재 티베트 불교의 실세인
겔룩파(노란모자를 써서 황모파라고도 함)는 그렇게 성장하면서 정교합일의 법왕제인 ‘달라이 라마’제도를 정착 시킨다.그래서인지 간덴사원이 비록
겔룩파 창시자가 설립하고 이 종파의 효시라 해도 간덴의 주인은 달라이 라마가 아니다. 역사상 간덴의 원장은 독립적으로 간덴 트리파(Ganden
Tripa) 로 겔룩파를 대표하는 달라이 라마와는 구별되어 왔다.
그만큼 전통이 있고 막강한 힘도 있었던 유서 깊은 사원인 셈이다.
그러나 그런 경외심은 출입구에서 깨지기 시작한다. 간덴사원의 원경을 찍고자 촬영을 하면서 사원 입구에 다다르자 젊은 승려 한명이 찍지 말라는 듯
손사래를 치며 달려 나온다. 손에 든 입장권을 보이며 돈을 내란다. 입장료 징수가 얼마나 철저하던지 6대나 되는 탐험대 차량의 문을 열어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인원을 헤아린다. 티베트에서 승려다운 승려가 별로 없다해도 조금 너무한다 싶다. 그러나 어쩌랴 세상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어
놓은 걸. 입구에 들어서니 주차장을 꽉 매운 버스가 먼저 보인다. 대부분이 현지인으로 이미 꽤 많은 순례객이 온 모양이다. 대법당으로 가는 길
옆에는 먹거리와 경전 등을 파는 좌판들이 늘어서 있었는데 순례객들과 엉겨 아수라장이다.
우리 탐험대 차량이 신기했던지 어린 꼬마들이
우르르 몰려 왔다가 카메라를 들이대자 일순 와악하니 꽁무니를 뺀다. 멀리서 신비롭게 보이던 사원은 가까이 가자 색이 바래 추래해 보이고 곳곳이
허물어져 있다. 어린 승려들은 삼삼오오 사원 여기저기를 배회하거나 양지 바른 곳에서 하품을 하고 있다. 누가 시주를 했는지 음식물을 안고 후미진
구석에 앉아 열심히 먹고 있던 어린 승려는 우리랑 눈이 마주치자 슬며시 돌아 앉는다.
티베트에서 승려는 단순히 승려만은 아니었다.
사원은 학문의 전당이요 종교라는 신앙의 원천이다. 그래서 그 사원에 있는 승려는 최고의 엘리트이자 존경받아 마땅한 사람들이었건만 중국의 침략과
문화혁명이라는 회오리는 그들을 한갓 오물을 치우고 쓰레기를 줍는 존재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대법당에서의 일이다. 촬영비용으로 중국돈
500원(우리 돈7만원)을 주고 노승 주재하의 법회를 찍을 수 있었다. 수많은 순례객들이 그들의 예불모습을 보고 기도를 드리고 있건만 정해진
시간에 쇼를 하는 동물원의 원숭이처럼 건성건성하는 젊은 승려들에게서 어떤 영감이나 총기를 발견할 수 없었다.
간덴은 문화혁명기에 홍위병의
파괴가 가장 극심했던 사원 중의 하나다. 일부 티베트인들은 간덴사원이 비행기폭격을 당해 파괴되었다고도 한다. 어쨌든 간덴사원이 집중 공격의
대상이 된 것은 사원이 봉건주의와 미신의 상징이라고 매도한 것도 있지만 오랫동안 간덴사원이 정치권력의 중심 역할을 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티베트인 안내인인 뤄부(26세, 티베트대학 영문과 출신)는, “문화대혁명때 이 간덴사원의 승려들이 홍위병들에게 극렬하게 저항했기 때문”이라고
귀뜸한다. 그래서 더 파괴 당했다는 뜻일게다.
1990년 소수민족에 대한 유화정책을 쓰면서 간덴사원도 비로소 재건이 시작돼 옛모습을
부분적으로 복원되고 있으나 아직도 간덴사원의 뒤쪽은 그 옛날의 상처를 증언이라도 하는 듯 폐허의 잔재가 남아 있고, 승려들은 사원을 관리하며
호구지책하는 존재로 전락했다.
티베트의 정신적 지주인 라마교가 예전의 권위와 기상을 되찾기에는 아직은 여러 가지가 힘에 부치는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