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싸에 있는 동안 티베트를 알기
위해 무척 애를 썼지만 웨이하이부터 동행한 중국 감독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민접촉하는 것을 가장 예민하게 받아 들이고 있다는
탐험대장의 충고는 내내 고민이 아닐 수 없었다. 하긴 티베트 땅에서 달라이 라마 사진을 볼 수 없다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래서
자주 찾은 곳이 사원이었다. 이미 관광지화 됐지만 티베트 사람이 대부분인 사원에서 그들의 면모를 찾아 볼려고 했기 때문이다. 간덴사원이나
조캉사원에서는 그들의 심오한 역사와 신심을 확인 할 수 있었지만 중국 점령 이후 티베트를 생각하는 티베트 사람들의 진면목을 볼 수는 없었다.
라싸 체류 3일째 되는 날도 학문연구로 유명했던 세라사원(色拉寺)을 찾았다. 다른 사원과 달리 오직 순수한 불교연구에만 정진했던 사원으로 소위
엘리트 승려가 많이 배출되어 그 힘이 정부를 두렵게 할만큼 막강했었다는 사원이다. 티베트에 대해 새로운 모습을 발견할 수도 있겠다는 기대였다.
라싸의 3대 사원 중 하나인 세라사원은 라싸 시내에서 북서쪽 8킬로미터 쯤 세라우쯔산기슭에 자리하고 있어 찾아가기가 쉬웠다.
세라사원은
겔룩파의 창시자 총카파의 수제자인 샤카 예쉐가 스승의 뜻을 받들어 1419년에 창건 되었다고 한다. ‘세라’는 티베트어로 ‘싸락눈’이라는 뜻으로
사원을 건설하는 동안 계속 싸락눈이 내렸다고도 하고, 산기슭에 지천으로 자란 들장미의 이름을 따 명명하였다고 전해진다.
불교학교로
유명했던 곳으로 이 곳 역시 티베트 최대의 불교학교라던 드레풍 사원에 견줄만 했던 때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약 250명의 승려가 있을
뿐이라고 한다. 그나마 고승은 없고 젊은 승려들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노점상들이 진을 친 입구를 지나 대법당 쪽으로 오르는 길은 크고 넓은
가로수가 시원스레 햇빛을 가려 주고 있었지만 이름만큼 기품이나 위엄을 느낄 수가 없다. 그럼에도 문화혁명때 비교적 피해가 덜 했다는 사원은
비교적 원형을 잘 보존한 듯 보인다. 그러나 사원을 정비하거나 복구하는데는 여력이 달리는 뜻 조금은 남루해 보인다. 대법당 쪽으로 올라 갈수록
부채꼴 형태로 사원의 진면모가 펼쳐지는데 좁다른 입구에서는 생각지 못한 규모에 놀란다. 더구나 체계적인 계획에 의해 건물이 지어진 것이
아니라는데도 지형에 어울리게 배치하여 건물이 많아도 빽빽하지 않으며 복잡한 듯하지만 어지럽지도 않다. 중심이 되는 대법당이나 탕카를 거는
구조물도 눈에 잘 띄게 배치되어 전체적으로 짜임새가 있다. 예전 공부하는 승려가 수 천명에 이르렀다는 불교학교로서의 저력을
보는듯하다.
대법당을 돌아 보다가 우연히 윈난성에서부터 왔다는 한국의 젊은 배낭여행객들과 만났다. 혹 우리랑은 다른 경험을 했을까 싶어
대화를 나눠봤지만 그렇게 아무 생각없이 티베트를 예찬하리라고는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작금의 한국에서 티베트는 달라이 라마와 중국의 침략과
독립저항이라든가 하는 함수 속에 티베트를 상당히 우호적으로 보고 있는 젊은이들이라 일반적인 지식도 있으리라 믿었건만 전혀 아니었다. 순박하다느니
미소가 아름답다느니 경치가 죽여 준다거니...심지어는 “티베트는 원래 중국 땅 아니예요?” 한다. 티베트에 대해 몰이해하는 것은 그렇다쳐도
지나친 환상(아름다운 경치와 싼 물가, 인심이 대부분)으로 꽉 차 있었다. 정치적인 환경은 모르거나 전혀 고려하지 않아 보였다. 굳이 티베트에
대한 단상이 있다면 다람살라에 대한 환상이 티베트에 대한 생각으로 대체된 듯 보였다. 윈난에서 동부 티베트를 거쳐 라싸에 이르기까지 3개월 여를
티베트에 있었다는 여행객들의 수준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중국이 주장하고 선전하는 서부대개발의 혜택에서 한참이나 벗어나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밖에는 살지 못하는 티베트 사람들. 거부할 수 없는 가난과 식민지배의 고통 속에서도 잃지 않은 그들의 시골 인심 같은 후덕함과 때에 쩔은
얼굴에서 초롱초롱 빛나는 아이들의 눈에서 자신들의 유토피아를 꿈꾸는 어리석은 여행자들이었다. 아니면 50여년 동안 티베트는 철저히 외면 당하고
잊혀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오후 3시가 되자 대법당 옥상에서 노승이 토론시간을 알리는 징을 울리자 스님들이 한꺼번에 대법당에서
밀려 나온다. 바로 그 유명한 ‘토론의 광장’에 모여 논강을 하기 위해서다. 삼삼오오 스님들이 정원 바닥에 자리를 잡고 앉으면 호기심 많은
관광객들이 뺑 돌아가며 사진 찍기 좋은 자리를 잡는다. 정작 티베트 사람은 찾아 보기가 힘들 정도고 가끔 눈에 띠는 티베트 사람인 듯 싶은
순례자는 오히려 관광객들 뒤에 엉거주춤 서있다.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드디어 토론을 집도하는 노승이 상석에 자리를 하자 드디어 토론이
시작된다. 마치 싸우듯이 때로는 춤추듯이 세라사원 스님들만의 톡특한 논강이 관광객들의 혼을 뺀다. 재미있기도 하고 우스꽝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엄연히 티베트 불교의 수업방식이자 깨달음을 얻어가는 수행과정이라고 한다. 토론의제가 사전에 설정이 되고 동자승까지도 모두 참가하여 화두에
대해 격렬하게 토론을 하는소위 문답학습이다. 두사람씩 짝을 지어, 묻는 사람은 서서 발을 구르며 손뼉을 내리치면서 미리 배웠던 경전의 내용을
질문하면 앉아 있는 이가 답을 하는 식이다. 이러한 학습을 거쳐 성적에 따라 라마승이 되기도 하고 세속으로 돌아가기도 하는 등 신분이 결정되는
중요한 학습인 셈이다. 그러나 토론이 깊어질 수록 역동적인 스님들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싶어하는 관광객들의 행동반경도 넓어져 광장은 아수라장이
된다. 그렇다고 특별히 제재하는 이도 없다. 이미 정례적인 관광의 한 코스가 되어 버린 터에 광장은 쇼무대가 된다. 무대에 선 스님들의 토론은
건성건성으로 화두를 던지는 질문자의 화려한 액션만 살아 움직인다. 토론하는 스님들을 감독하는 스님은 토론을 제대로하는지가 관심이 아니라 누가 돈
안내고 사진이나 비디오를 찍는지 감시하느라 눈을 더 번뜩였다. 그러는 사이 몇몇 스님들은 딴전을 피우거나 장난질이고 심지어는 관광객과 사진을
찍은 사진을 보며 히히덕 거리고 있다. 한때 드레풍 사원만큼이나 영향력이 있었던 불교학교 세라사원의 모습은 상상 밖이어서 적잖이 놀랄 수 밖에
없었다.
하긴 요즘 티베트에서 제대로된 스님을 보기 어렵다고 한다. 문화대혁명때 철저히 사원을 파괴하고 불교를 탄압한 이후 중국정부의
유화정책으로 불교가 다시 살아 난 것은 티베트 사람들 마음 속에 불교가 있는 것이지 사원이나 승려들에게 부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만큼
불신을 받고 있는 것이 요즘의 승려들이다. 중국의 티베트 불교말살정책은 어느 정도 고착이 되어 승려는 학문을 연구하고 불법을 전파하는 것보다
사원을 관리하는 역할이 주임무로 변질되었다고 한다. 사정이 이러하니 승려들의 자질도 문제. 붉은 가사를 두르고 머리를 짧게 깎았다고 모두가
라마승이 아니다. 라마승이 되는 것은 생각보다 과정이 길고 험난하다. 보통 티베트의 불교학교는 초등학교에서 대학까지의 과정이 있는데 그
과정속에서 공부뿐 아니라 다양한 경험이 쌓여야 비로서 승려가 될 수 있다. 즉. 불교학교를 거치지 않으면 승려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승려는
하나의 제도적인 과정을 통해서 탄생되는 것이라 믿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라싸에는 진짜 승려가 없다는 자조적인 탄식을 하는
것이리라.
이미 경험했던 간덴사원이나 세라사원이나 모두가 티베트 불교를 대표하는 사원이었지만 그 속의 승려들까지 티베트를 대표하는지는
예단키 어려운 복잡한 심경을 가지게 된다./글·사진 백민섭 경인지역 새방송 창준위
지원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