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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연재

신 실크로드를 가다 2-베트남

[新 실크로드를 가다] 2. 베트남
입력: 2006년 01월 11일 17:55:37 : 3 : 0
 
길이 일방 통행로일 수는 없다. 가는 길과 오는 길이 따로 있을 수 없다. 아시안하이웨이가 본보기로 삼기로 한 고대의 비단길(실크로드)은 동양의 비단과 제지술만 서양으로 전해준 것이 아니었다. 동서간에 다양한 종교와 문화, 상품과 기술이 오고간 왕복 교역로였다. 이에 비해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 속의 ‘길’은 제국의 수탈을 위한 일방 통행로였다. 일제가 한반도에 놓은 철도와 신작로도 이 로마로 통하는 길이었다.

베트남 하노이 재래시장의 활기찬 모습. 호안끼엠 거리의 이 시장은 수도 하노이에서 거래 규모가 가장 큰 곳이다. 김관수 기자


한반도 지도에서 서쪽을 지운 채 동쪽만 남북으로 길게 남겨둔 형상을 한 베트남. 탐험대는 지난해 말 중국을 거쳐 아시안하이웨이가 통과할 북부 동당에서 남부 호찌민에 이르는 2,000여㎞를 따라갔다. 베트남전쟁이나 대(對)중국 국경분쟁의 상처는 외견상 찾아볼 수 없었다. 큰 길을 내기 위한 발파음과 관광객들의 행렬은 베트남의 최북단 오지까지 들뜨게 하고 있었다.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 곳곳에 들어선 서구식 패스트푸드점과 PC방, 교통체증과 매연, 도시 외곽의 신도시 건설과 대규모 토목공사 현장, 슬럼화와 달동네 등의 풍경은 한국이 이미 경험했거나, 겪고 있는 그것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일직선으로 쭉 뻗은 아시안하이웨이의 예정 도로를 따라 동하, 다낭 등의 도시를 거쳐 남쪽으로 갈수록 새로운 길을 내거나 신도시를 짓는 요란한 소리로 우렁찼다.

최남단 호찌민시에 이르자 박자 없는 건설 소음이나 삐걱거리는 기계 소리는 잦아들었다. 그 대신 높이 솟은 고층 빌딩들, 신호체계를 따라 질주하는 차량들, 시민들의 활기찬 표정 등은 패티김과 길옥윤의 ‘서울의 찬가’의 경쾌한 리듬을 떠올렸다. 개혁·개방 이후 산업화와 도시화가 본궤도에 올랐음을 느꼈다. 세계 최강국을 쫓아낸 민족통일전쟁 혹은 인민해방전쟁을 치른 자긍심은 적어도 거리에서는 느껴지지 않았다.

“호찌민 시내만 둘러보고 베트남을 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호찌민 근교에서 일용직 노동자로 일하는 콩 크팡(23)은 베트남 북서부 고산지대의 소수민족 출신이다. 베트남 인구(약 8천1백50만명)의 87%가량을 차지하는 비엣족을 제외한 50여개 소수민족의 하나인 캉족이다. 그가 2003년 떠나온 고향 뀐 냐이 근처의 마을은 10년 전만 해도 오지였지만 지금은 큰 길이 뚫리면서 교통이 편리해져 도시로 쉽게 나갈 수 있다. 고향 사람들은 전화와 TV, 라디오의 보급 덕분에 대처 생활을 훤히 알고 있다.

콩은 돈을 벌려고 호찌민으로 왔지만 고향에 두고 온 부모형제 걱정에 밤잠을 설치기 일쑤다. 콩은 “1995년만 해도 캉족의 인구가 4,000명이 넘었는데 요즘 3,000명가량으로 줄었을 것”이라며 “민족과 언어가 사라질까 걱정”이라고 말했다.

그의 고향 사람들이 먹거리를 구하면서 의지해 온 숲은 전쟁에 이은 개발 바람으로 볼썽 사납게 파괴돼 가고 있다. 급격한 산업화는 도시로의 인력 유입을 부채질했고, 대처 생활의 편리함을 널리 알렸다. 너나 할 것 없이 산을 뚫고 새롭게 놓인 넓은 도로를 따라 대처로 나갔다.

베트남 북서부의 소수민족 충차족인 일용직 노동자 뚜 까이(22)도 4년 전 돈을 벌러 호찌민 근교로 왔다. 그의 민족은 1995년에는 1,400명쯤 됐지만 지금은 1,000명도 안 된다. 젊은이들이 도시로 떠나고 있기 때문이다.

뚜의 안내로 탐험대가 충차족의 한 마을에서 만난 촌장 뜨앙 찬(51)은 “교통과 통신의 발달이 젊은이들을 유혹해 대처로 내몰고 있다”며 “농사는커녕 대를 이을 사람도 줄었다”고 말했다. 그는 수년 전 개통된 왕복 2차선 도로를 가리키며 “내 아들이 저 길을 따라 떠난 지 2년이 넘도록 소식이 없다. 저 길을 따라 버스가 올 때마다 이웃의 젊은이들이 바람이 난다”고 걱정했다.

충차족만 존멸의 기로에 서 있는 것이 아니다. 또 다른 소수민족 오두족은 인구가 100명도 안 된다.

탐험대에게 베트남의 산업화 풍경은 그다지 낯설지 않게 다가왔다. 1970년 ‘코리안하이웨이’ 경부고속도로가 놓이고 그 ‘상행선’ 길을 따라 농촌 사람들은 무작정 서울로 왔다. ‘하행선’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한국이 먼저 겪은 상황을 대입하면 답이 아련히 보이지만 똑 부러지게 제시하기는 어려운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산업화와 도시화는 왜 소수민족들의 생존 방식을 인정하려 들지 않을까. 동·식물의 멸종에 해당하는 사멸의 백척간두에 선 소수민족들에게 산업화와 도시화가 닦아놓은 반듯하고 널찍한 길은 일방 통행로로 여겨졌다.

베트남 북쪽의 산악지대인 리오카이에서 원주민들이 모내기를 하고 있다.
베트남의 오지 사람들은 자신들의 고립된 전원생활을 마냥 낙원으로만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 듯했다. 다만 자신들의 의사와 무관하게 뚫리고 가설된 도로와 통신매체가 이젠 생존을 보장받고 흐트러진 정신을 되찾는데 유용하게 쓰이는 왕복 교통로가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다낭시 중서부의 한 오지에서 만난 주민 응 떠윈(61)은 “1975년 전쟁이 끝난 이후 고엽제 살포 탓으로 추정되는 병으로 고생하거나 죽은 사람이 여럿 있다”며 의사가 달려와 주기를 기다렸다. 오지 사람들은 젊은이들의 야반도주가 멈추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그 대신 새롭게 난 길을 통해 전쟁이 남긴 지뢰를 치우고, 고엽제로 망가진 숲을 되살리고, 질병과 문맹을 다스리고, 조상들이 남긴 무용담과 전설을 후손에게 전해줄 수 있는 교육 환경을 마련하는 서비스가 달려오기를 희망했다.

탐험대는 베트남을 떠나면서 이의근 경북도지사 일행이 지난해 봄 이 나라의 초청으로 타이응우엔 지역을 찾아와 새마을운동의 ‘성공 비결’을 전하고 의료봉사활동을 펼쳤다는 얘기를 들었다. 베트남이 산업화를 먼저 겪은 한국의 경험담을 들으면서 새마을운동의 성과에 못지 않게 일방 통행의 후유증과 부작용에도 귀를 기울였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탐험대는 머지 않아 완공될 아시안하이웨이가 특정 국가에 의한 일방 원정길이 되면 곤란하다는 상념에 젖은 채 태국행 여정을 위한 짐을 꾸렸다.

〈호찌민|김판수기자 pansoo@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