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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로 가는 뚜벅이

프랑스-셋째날;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몽마르뜨까지 ( 유럽 프랑스 )

[ 유럽배낭 여행기 ] 프랑스-셋째날;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몽마르뜨까지 ( 유럽 프랑스 ) 이종원

(셋째날 :베르사이유 궁전-정원-벼룩시장-몽마르뜨)

1) 베르사이유 궁전

아침에 호텔에서 CHECK OUT하고 짐을 맡겼다. 파리 북역에 스위스 기차를 예약하고 지하철을 타고 베르사이유로 향했다. 기차로 40분 정도의 거리다. 요금은 3천원정도. 세느강변을 따라 달리는 전철인데 시내를 벗어나니 아파트촌이 보이고 파리 중산층의 가정집을 볼 수 있다. 파리는 도시 자체가 거대한 박물관이므로 고도제한이 되어 있어 10층이상의 건물을 찾아 볼 수 없다. 로마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시민들 대부분은 이렇게 교외에 거주하고 있는 것이다.

기차엔 많은 쌍쌍들이 타고 있었다. 특히 프랑스 여자들은 너무나 예쁘다. 작은 얼굴에 오똑한 코, 그리고 푸른 눈은 남자를 매혹시킨다. 더구나 담배연기를 내 품는 모습은 모델 그 자체다. 시선을 너무 주니 아내가 경고 한다. "너 죽어" 그러나 곳곳에서 한국여자들이 살 맛났다고 거리에서 담배를 물고 활보하는데 기분이 그렇게 좋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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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철에서 궁전까지는 1킬로 정도 셔틀버스를 타라고 유혹하지만 걷기로 했다. 돈을 아껴야지.
부르봉왕가의 하늘 높은 줄 몰랐던 세력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역사의 현장 베르사이유.., 일본만화 '베르사이유의 장미'로 더 친숙한 바로 그 곳이다. 태양왕 루이 14세가 자신의 권력과 재력을 총동원해 무려 50여년이라는 긴 세월에 걸쳐 만들어낸 궁전과 광대한 정원이다.

이곳은 원래 늪지대로 건물이 들어설 만한 땅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냥광 루이 14세가 자기가 즐겨 찾는 사냥터 근처에 궁전을 세우고 싶어했고 20여년에 걸쳐 흙을 메웠는데, 이는 순전히 인력만으로 막대한 양의 흙을 운반해 늪지를 메우고, 그 위에 숲을 조성한 뒤 분수와 운하를 만들기 위해 세느강의 흐름까지 바꿔놓은 것이다.

상상을 초월한 규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으며, 이 막대한 토목공사로 인해 왕가의 재정파탄, 그리고 서민생활의 피폐로 이어져 프랑스혁명을 불러일으키는 최대의 근거를 제공했다. 이곳에서 궁중생활을 한 대부분의 인물은 꽁꼬드 광장에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민중의 수탈은 기득권세력의 몰락을 역사적 사실에서 볼 수 있다. 중국의 자금성과 이화원을 보면서 청의 몰락을 그리고 경복궁을 증축을 통해 조선의 몰락을 역사적 사실에서 볼 수 있겠다.

어쨌든 프랑스왕가의 붕괴는 당연한 일이며, 웅장한 건물에는 민중의 핏땀이 서려 있어 서글픔마저 들었다. 이 궁전의 문화가 전 유럽의 문화를 주도 했기에 '에티켓'이란 말도 여기서 나온 말이 란다. 거제도의 외도의 정원도 베르사이유 정원을 참조했다고 하니까 그 역사적 의미는 매우 크다고 생각된다.

궁전입구는 황금의 문으로 치장되어 있고, 조금 지나면 태양왕 루이 14세의 기마상을 접할 수 있었다. 한참을 줄을 서서 '프티트리아농'에 입장했다. 눈에 띄는 것은 '거울의 방'이며 길이 75미터, 폭 10미터, 높이 12미터고, 578개의 거울로 장식 되어 있다.

17개의 커다란 창문으로 비치는 햇살이 이 방을 찬란하게 한다. 더욱 빛을 발하기 위해 모든 집기와 가구등을 순은으로 만든 것을 사용했다. 1919년 1차대전의 종말을 알리는 '베르사이유 조약'이 이 방에서 체결되었다. 무수히 많은 그림들은 어제 루브르 미술관에서 지겹도록 접했기에 눈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대리석과 금도금으로 장식한 왕실 예배당은 너무나 화려했다.
'침실의 방'은 역대 왕비들의 출산장이기도 했는데 왕비가 낳는 아이들은 '만민의 아이'라고 하여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공개분만 되었다고 한다.

2) 정원

베르사이유 궁전의 백미는 역시 정원이다. 궁전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는 거울의 방에서 펼쳐진 정원이 한눈에 펼쳐졌다.

충격이었다. 여의도보다 훨씬 큰 규모의 운하가 저 멀리 펼쳐져 있으며 수 백년된 조경수가 군대조직처럼 늘어져 있다. 인간이 이렇게까지 만들 수 있구나 하는 의구심 마저 든다. 북경의 자금성과 만리장성을 보았을 때의 충격, 호주의 40킬로까지 늘어선 골드코스트과 더불어 내가 느낀 가장 큰 감동들이었다.

그리스 신화를 토대로 한 '라톤의 샘'. 신의 저주를 받은 사람이 파충류로 변해가는 모습을 그렸고, 그 밑에는 '아폴론의 샘' 이 우릴 맞이한다. 인간과 말의 모습이 역동적으로 보인다, 그리고 끝없이 펼쳐진 운하가 한눈에 들어오는데 도저히 걸을 엄두가 나지 않아 자전거를 빌려 타고 돌았다. 한 바퀴 도는데 중간에 쉬지 않고 1시간 정도 걸렸다. 별궁인 그랑뜨리아농과 쁘띠뜨리아농은 아얘 시간이 없어 보지도 못했다.
궁전을 뒤로 한 채 중국식당에 들어갔다. 그래도 서양에서는 중국식당이 우리 입 맛에 맞는다. 볶음밥으로 창자를 채우고 파리로 돌아온다. 그 40분동안 잠을 잤다.

3) 쌩우황 벼룩시장

파리에서 가장 오래 되고 규모가 가장 큰 곳이다. 19세기 말부터 장이 서기 시작했다고 한다. 가구, 골동품, 도자기, 장신구, 중고 의류등 없는 것이 없다. 사람도 무진장 많다. 너무 늦게 도착하고 비가 쏟아져 철시하고 있는 곳이 많다. 파리의 어느 지하철보다 더 지저분하고 왠 흑인이 이렇게 많은지.. 아프리카 흑인은 모두 이곳에 머무나보다.

4) 몽마르뜨의 슬픈 기억

빠리는 몽마르뜨에서 시작했으니 몽마르뜨에서 마감하자.
성당과 까페를 둘러보고 광장에 앉았다. 여기서 기억하기 싫은 일이 발생했다. 벼룩시장에서 산 맥도날드 햄버거를 먹으며 파리의 석양을 감상하고 있었다. 젊은 청년들이 기계체조를 하며 묘기를 부리고 있다. 너무나 멋이 있어 넋이 빠져 있는 상황에서 아내 옆에 놓여있는 캠코더를 누가 집어 갔다. 몽마르뜨를 조심하라고 얼마나 경고를 들어왔던가? 지금 생각해보니 그 청년들이 의심이 간다. 우리의 혼을 빼고... 상주하고 있는 패트롤카에 신고했다.

거기서 인근 경찰서를 가르쳐 준다. 경찰서에서 확인서를 받아야 보험금을 받기 때문이다. 몇 번을 헤메서 찾아간 경찰서에서 "시간이 없다. 내일 오라...담당이 퇴근했다." 아니 2시간 후면 프랑스를 떠나야 하는데.. 막 따졌다.
"다시는 프랑스에 오지 않겠다."
그랬더니 한참 후에 담당을 찾아 확인서를 발급 해 주었다.
이것을 통해 보험사에서 30만원 보험혜택 받았다.
파리의 좋은 기억이 이렇게 아픔으로 변할 줄이야...

5) 파리여 안녕

3일간의 파리여행을 마쳤다. 베르사이유와 오르세, 에펠 등을 담은 테이프가 너무나 아깝지만 이제는 캠코더에 신경 안 쓰기로 했다. 비디오에 담으려는 욕심 때문에 미술품을 접하는데 제약이 따랐는데 오히려 잘 됐다. 아내는 너무나 미안하게 생각한다.

이럴때 남편의 넓은 마음을 보여주어야 하는데...... 아내를 위로했다.
열차에 올라탔는데 너무나 피곤해서 침대차로 다시 바꾸었다. 유레일 패스로 추가부담(2만원)만 하면 편안히 누워서 갈 수 있다. 유럽의 열차는 대부분이 '컴파트먼트'라고 해서 6개의 의자가 3개씩 마주하고있는 룸으로 구성되어있다. 쿠셋은 컴파트먼트를 개조하여 4개의 침대가 한 세트다.

우리 룸에는 아내 말고 프랑스인 한사람이 더 있었다. 캠코더를 잃어버린 것을 얘기했더니 자기 나라에서 일어난 일이어서 창피해 했고, 또한 위로도 해 주었다.
발을 닦고 잠을 청하려는데 너무나도 발 냄새가 진동했다. "저 놈 발도 안 닦고 자나?" 애꿎은 프랑스 젊은이를 원망했다. 그 프랑스인이 화장실에 갔는데도 불구하고 냄새가 너무 심해 아내 발 냄새를 맡아보니 너무나 지독했다.
"야, 당장 발 닦고 와.."
아내와 5년을 살면서 여자는 발 냄새가 없는 줄 알았다.
하긴 얼마나 걸었으면 ..
'젊은이 미안해. 내가 오해해서..' 반면 그 프랑스인도 얼마나 나를 의심했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파리여 안녕.

내일이면 알프스 소녀 하이디의 스위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