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권짜리 장편대하소설 『태백산맥』을 영화화한 임권택의 <태백산맥>은 밋밋하기 그지없다. 원작이 보여준 구수한 사투리의 말맛도 없고, 영화는 책처럼 해방 전후사에 대한 치열한 역사 인식을 담아내지 못한다. 하지만 그것을 모두 임권택의 잘못만으로 미루는 것은 온당해 보이지 않는다. 한 사람의 내면과 시대정황을 보여주는 데 있어서 애당초 영상은 문자에 미치지 못한다. 내레이터가 등장해 이러쿵저러쿵 인물의 내면심리를 서술하고 묘사하는 소설에 비해, 인물의 표정이나 배경을 통해 인물과 인물간의 갈등의 깊이나 복잡한 인간의 심리적 굴곡을 드러내기는 역부족이다. 미니시리즈나 연작물을 통해서는 어느 정도 원작의 메시지를 충실히 전달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영화는 기본적으로 내레이터가 등장할 수 없는 장르다. 시시콜콜 인간의 심리와 정황에 대해 설명을 할 수 없는 것이 영화의 태생적 한계다. 이런 태생적 한계 때문에 사건이 전개가 느리고 관념적 서술이 많은 소설을 영화화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가령 하나의 문장의 길이가 한 페이지가 넘고, 관념적 서술이 몇 페이지에 걸쳐 지속되는 박상륭의 소설 『죽음의 한 연구』를 재미있게 읽은 독자가 이 소설을 영화화한 <유리> 또한 재미있게 보는 일은 아주 드물다. 박상륭의 소설에 재미를 들린 사람들은 그 소설이 가지는 도저한 관념성과 언어의 감칠맛에 빠진 이들이다. 이들이 영상의 언어에 같은 만족을 느끼기는 힘들다.
댄 브라운의 『다빈치코드』를 펼쳐보라. 댄 브라운의 『다빈치코드』는 스피디한 사건의 전개보다는 시시콜콜 설명적이고 지적인 내레이션이 독서의 재미를 더해주는 책이다. 뭔가 근사한 지식을 주입받고 있단 느낌, 바로 이 느낌이 댄 브라운이 우리에게 주는 인식의 즐거움이다. 이런 설명적 내레이션을 영상의 언어로 전환하는 데서 론 하워드 감독은 극심한 피로를 느꼈을 법하다. 특히 랭던이 크립텍스의 암호를 풀기 위해 고도의 사유를 전개하는 대목을 읽어보라. 그 과정을 영상으로 구현한다는 것이 쉬운 일인가. 백과사전식의 방대한 양의 지식을 가진 사람의 두뇌에서 전개되는 고밀도의 사유와 관념을 영상으로 번역해내는 일이 만만할 리가 없다. 많은 평자들이 론 하워드의 <다빈치코드>가 댄 브라운의 『다빈치코드』를 밋밋하게 영상으로 옮겨 놓았으며, 심지어 어떤 부분에서는 원작의 주장마저 훼손했다고 혹평을 했다. 혹평은 나름대로 정당하지만 론 하워드의 고충도 충분히 이해는 간다.
원작에서 예수가 마리아 막달레나와 결혼해 후손을 뒀고, 성배(聖杯)란 마리아를 뜻한다는 주장을 예시하기 위해 펼쳐졌던 방대한 예술작품은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다. 아쉬운 대목이다. 그러나 그 많은 작품들을 영화에서 보여주었더라면 영화는 오히려 EBS에서 방영해야 할 교양물이 되지 않았을까.
소피와 할아버지인 시온수도회 수장 자크 소니에르가 빚는 갈등의 핵심적인 내용이었던 성교. 이를 상징하는 비밀 제의에 대한 의미는 단 두 컷으로 처리되었다. 이 비밀 제의는 <다빈치 코드>를 이해하기 위한 핵심적인 코드다. 성교는 단순히 쾌락을 위한 도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히에로스 가모스’라는 의식이었다. 역사적으로 여자와 남자가 성교를 통해 신을 경험하는 행위였다. 댄 브라운은 이 의식이 영화 <아이즈 와이드 셧>에도 등장한다고 말해준다. 신과 접촉하기 위해 인간이 성을 이용하는 것은 초기 교회의 권력 바탕에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고 한다. 바로 이런 이유로 예수의 아내였던 막달라 마리아가 기독교 역사의 비밀창고로 숨겨졌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장영란의 『신화 속의 여성, 여성 속의 신화』의 한 부분을 상기시킨다. 장영란은 그리스 신화의 ‘헤라’의 경우 본래는 아나톨리아 지방의 대지 모신(땅의 어미신)이었으나, 가부장 문화를 지닌 그리스인들이 들어오면서 그를 제우스와 결혼시킴으로써 지극히 보조적이고 주변적인 캐릭터로 전락시켰다고 한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과거에 중심적인 존재였던 여신이 주변적인 존재로 전락했지만 기독교에서는 아예 여신을 배제했고, 그 배제의 과정에서 성(性)마저도 타기해야 할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온수도회의 비밀의식 중 성교 장면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지만 영화에서는 할아버지와 손녀의 갈등의 기원으로만 단순하게 묘사했다. 연출가의 입장에서 어려움은 있었겠지만 어떤 식으로든 영화적 언급이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론 하워드는 대충 지나쳤다. 안이한 연출이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소니에르가 소피의 친할아버지였던 원작과는 달리, 극중 소니에르는 소피와는 아무런 혈연관계도 없이 예수의 후손을 보호하기 위한 시온 수도회의 수장으로만 설정됐다. 그러니 봉인된 크립텍스의 암호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상세히 묘사됐던 할아버지와 손녀의 애틋한 관계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예수는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했다, 막달라 마리아는 창녀가 아니라 왕족이었다,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 사이에서 낳은 후손이 살아있다, 고위 성직자들은 그 모든 사실을 비밀에 부쳤다, 월트 디즈니의 경우 성배 이야기를 다음 세대에 전하기 위해 일생을 바쳐 일한 사람이었다는 등, 영화 <다빈치 코드>가 전하는 메시지는 다분히 충격적이다. 그러나 보수적인 기독교 단체가 걱정하듯 영화가 주는 충격이 기독교인들의 믿음을 흔들 수 있을까.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의 ‘인지부조화 이론’ 챕터를 읽다 보면 보수적 기독교 단체들의 걱정이 한낱 기우임을 알 수 있다.
1950년대 초반 미국의 한 사이비종교 교주가 중대발표를 한다. 자신은 수호신들로부터 신탁을 받았는데, 조만간 큰 홍수가 날 것이고 진짜 신도들만 홍수 전날 자정에 비행접시로 구출될 것이라고 선언을 한 것이다. 그 종교의 열성 신도들은 직장을 정리하고 퇴직금을 이 종교단체에 기탁했다. 그들은 자신들만 구원받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며 많은 사람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려 애썼다. 마침내 지정된 구원의 날 자정, 모두들 모여서 비행접시를 기다렸다. 하지만 정해진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비행접시도 오지 않았고, 홍수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교주가 나타나서 다시 중대발표를 한다. “여러분들의 믿음에 대한 보답으로 결국 전 세계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신실한 교도들의 믿음에 감동한 수호신들이 홍수로 지구를 멸망시키는 일을 연기했다는 것이다. 이 발표에 신도들이 반발할 것이라고 예상하기 쉽지만 모인 사람들은 놀랍게도 기뻐하며 축제를 벌였다.
대체 왜 사람들은 이 부조리한 상황을 받아들였을까. 미네소타 대학의 심리학 교수인 레온 페스팅거 교수는 이 상황에 대한 면밀한 관찰을 통해서 ‘인지부조화 이론’을 발표하게 된다. 사이비종교의 신도들은 이미 직장도 관뒀고, 저축했던 돈도 다 써버렸다. 주변 사람들 앞에서 큰소리도 땅땅 쳐댔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게 다 가짜였다.” 고 하자면 아주 심각한 ‘인지부조화’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진실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느냐, 차라리 거짓을 받아들이고 안정된 삶을 누리느냐, 양자택일의 상황에서 사람들은 진실보다는 안정을 택하더라는 것이다.
물론 <다빈치 코드>가 말하고 있는 것이 모두 진실이라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것이 말하는 내용이 진실이든 아니든 사람들은 여전히 기존에 지녀왔던 믿음을 고수하게 될 것이란 이야기다.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이 반길 만한 또 하나의 책이 있다.
『우연의 법칙, 세상을 움직이는 열린 가능성의 힘』의 저자, 슈테판 클라인은 뇌의 전달물질인 도파민과 신경세포의 작용으로 뇌는 주변의 사물과 사건에서 일관된 틀을 인식하려는 강한 본능을 갖는다고 설명한다. 뇌는 상황에 맞는 것만 보려는 ‘선택적 인지’ 경향을 띤다는 것이다. 때문에 인간은 명확한 근거가 없어도 어떤 이론을 믿고, 우연을 필연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인간의 뇌는 상황에 맞는 것, 기존의 믿음 체계에 부합하는 것만을 보려고 하는 보수적 성향을 갖는다는 것이다.
론 하워드의 <다빈치 코드>는 스릴러가 주는 긴박함이 없다. 원작이 주는 인식의 즐거움도 주지 못한다. 그러나 론 하워드의 <다빈치 코드>는 원작이 보여주지 못하는 것을 보여준다. 바로 크립텍스의 모습이다. 백문이 불여일견, 크립텍스의 실제적 질량감을 맛보려거든 영화를 보는 편이 낫다. 또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이란 그림에서 예수의 오른 쪽에 앉은 인물이 여자라는 사실, 두 사람이 거울에 비친 듯한 색 배치로 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 또한 두 사람이 반대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두 사람 사이에는 V자 모양의 공간이 생기는데, 이 V자는 성배와 잔, 여자의 자궁을 나타내는 상징이라는 것을 영화는 소설보다 훨씬 강력한 영상의 언어로 보는 이를 설득한다.
칼럼니스트 김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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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일 씨는 "시사랑", "시네마천국" 등 온라인 동호회를 시작으로, 여러 온ㆍ오프라인 매체에 책이나 영화에 대한 글을 써오고 있는 칼럼니스트입니다. 현재 리더스가이드 북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며, 배문고등학교 국어 교사이기도 합니다. 지은 책으로 『나는 상식이 불편하다』가 있고, 올해에는『한국의 교양을 말한다』를 출간할 예정입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