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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건국이야기를 다룬 드라마 <주몽>이 5월부터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다. 재미있는
드라마이지만, 역사적 사실과 동떨어진 상황설정과 지나친 극적 구성으로 실제 역사를 심각하게 왜곡하고 있다. 이에 한민족사의 잃어버린
고대사의 고리를 고스란히 복원시켜주는 『환단고기』의 내용을 중심으로, 드라마 <주몽> 시대의 역사를 알아보고 한민족 상고사의 국통맥을
간추려 소개한다.
글 : 나의택 (damulkan@hanmail.net)
어린시절 주몽은 겁쟁이?
왜곡의 한 예로, 고구려를 창건한 주몽의 인물됨을 살펴보자. 『삼국사기』 『삼국유사』에서도, 주몽은 ‘기골(氣骨)이 뛰어나 범인과
달랐으며, 불과 일곱 살이 되어 스스로 활을 만들어 백발백중의 실력을 자랑하였다’고 나온다. 그래서 ‘(동)부여에서는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 불렀기에(善射者謂朱蒙) 그를 또한 주몽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그런데 드라마에서 주몽은 나이 스물이 되도록 활은 고사하고 칼 한번 들어보지 못한 겁쟁이로 나온다. 극적 전개를 위한 각색이라고 해도,
고구려 창업군주의 인물됨을 왜곡하는 명백한 오류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드라마 <주몽>이 한민족의 상고사 특히 부여사를 어떻게 왜곡하고 있는가를 살펴본다.
천제지자(天帝之子) 고주몽
근래 TV 사극은 옛사람들의 정신의 맥과 한민족의 문화를 소개하는 측면보다는, 권력과 재물을 둘러싼 야비한 다툼만을 부각시켜서 드러내는
경향이 짙다. <주몽> 역시 고대 인물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전제로, 우리 역사를 지나치게 정치사, 전쟁사로 몰아가는 문제점이 있다.
고대 인물들이 현대인들과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고 살았을 것이라는 생각은 참으로 위험한 발상이 아닐까.
주몽에 대하여서는 잘 알려진 이야기가 있다.
주몽이 영특하고 대범하고 영웅적인 기개가 있으니, (동)부여국 왕자들이 주몽한테 왕위를 뺏길까봐 그를 죽이려고 했다. 그래서 주몽의
어머니 유화부인이 (동)부여를 떠나라고 한다. 주몽이 도망을 가다가 엄리대수(淹利大水), 즉 지금의 송화강에 다다랐다. 강을 건너야
되는데, 뒤에서는 (동)부여 군사가 주몽을 잡아 죽이려고 쫓아온다.
그 때 주몽이 수신(水神)에게 말하기를, “아시천제지자(我是天帝之子)”,
“나는 천제의 아들이다”라고 외친다. 이 말은 ‘나는 천제 즉, 상제님의 아들이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나는 천자다.’ 이런
뜻이다.
그 때까지만 해도 우리 민족에게 상제 문화, 천자문화가 생생히 살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호태왕 광개토열제의 비문에도 우리 고주몽 태조께서는 ‘천제지자(天帝之子)’요 ‘황천지자(皇天之子)’라고 쓰여 있다. 그 말은,
당시까지만 해도 하나님의 아들로 여겨지는 하나님의 진정한 대행자만이 황제가 될 수 있다는 인식이 넓게 자리잡고 있었다는 말이다.
잃어버린 한민족사의 고리, 부여(夫餘)사
이제 구체적인 역사 내용을 논해보자.
가장 중요한 것은 부여사의 왜곡으로 인해 드라마 <주몽>의 등장인물간의 인척관계가 대단히 잘못되어 있다는 점이다.
고주몽은 해모수의 아들이 아니다 | 고주몽은 해모수의 둘째 아들인
고진(高辰)의 손자인 불리지(일명 고모수高慕漱)와 유화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드라마에서는 유화부인과 해모수가 부부인연을 맺은
것으로 설정하여, 유화부인이 시증조할아버지와 관계를 맺은 것으로 왜곡하고 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에서 이런 역사왜곡의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
‘부여’는 하나가 아니라 여럿 | 드라마에서는 주몽이 태어난 나라를
부여라고 한다. 우리 민족의 흥망사를 살펴보면, (원시)부여, 대부여, 북부여, 동부여, 졸본부여, 서부여, 남부여 등 수많은 부여가
있다. 하지만 드라마에서는 이에 대한 언급이 없어 시청자들의 혼동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주몽이 태어난 나라는 ‘동부여’이다. 주몽은 ‘북부여’의 건국자인 해모수 단군의 고손자로서 황손(皇孫)이다.(『삼국유사』도 분명히
해모수가 북부여의 건국자임을 밝히고 있다.) 광개토열제의 비문에 ‘황천지자(皇天之子)’라고 했던 것은 이를 말하는 것이다.
중국사가들의 역사왜곡과 국내사가들의 중국사 베끼기 | 그런데 왜 우리는
이것을 잘 모르고 있을까? 가장 큰 이유는 중국의 역사가들에 의해 조직적으로 이루어진 역사왜곡에 기인한다. 구체적인 내용은 여기서 다
언급하기 힘들지만, 중국은 한(漢) 무제 때 『사기(史記)』를 쓴 사마천 이후로 동방의 천자국(天子國), 스승의 나라, 조선(朝鮮,
고조선)의 역사를 일부러 자세히 기록하지 않았다.
조선은 세상에서 아는 것과 달리 하나의 국가로만 존재했던 것이 아니다. 하나의 주체국 아래 수많은 제후국을 거느리고 있는 일종의
연방체제로 이루어진 대제국이었다. 조선이란 이름을 거명하지 않고, 단지 제후국의 이름만 거론하면 조선은 역사 속에서 오리무중으로 사라지게
마련이다.
후세의 김부식과 같은 우리의 역사가들은 중국인들이 써준 역사를 베끼기에 급급했던 탓에 우리의 역사, (고)조선사는 실체가 없는 신화로만
남게 된 것이다.
(고)조선사를 역사 속에서 지우는 가장 쉬운 방법은 부여사 또한 지우는 것이었다. 조선의 역사 계승은 해모수가 세운 북부여를 거쳐서
열국시대와 사국시대(고구려·백제·신라·가야), 남북국시대(대진국·신라)를 거쳐 고려 조선에 이르게 되는데, 북부여를 역사 속에서 지우면
뒤에 생겨난 국가들은 (고)조선과 전혀 관계없는 역사의 미아가 될 것이라는 것을 중국인들은 노렸던 것이다.
읽어버린 부여사
그럼 구체적으로 부여의 정체를 풀어보자. 이것이야말로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다빈치코드>보다 더 큰 파장을 불러올 동양 한민족사의
실체에 얽힌 중대한 비밀코드를 풀어내는 열쇠이기도 하다.
(고)조선의 역사 | 부여의 원뿌리는 (고)조선(朝鮮)이다.
(고)조선은 마흔일곱 분의 단군이 나라를 다스렸다. 또한 나라를 크게 진한(辰韓, 후기엔 진조선) 번한(番韓, 후기엔 번조선)
마한(馬韓, 후기엔 막조선) 셋으로 나눠, 진한은 단군이 직접 통치하고, 번한 마한에는 부단군을 두어 일종의 연방체제로 국가를
운영하였다. 그리고 삼한 안에도 더 작은 제후국들이 존재했다.
대부여의 등장 | 44대 단군은 구물(丘勿)단군이다. 그는 본래 43대
물리단군 때 상장군(上將軍)이었다. 43대 단군 때 사냥꾼의 두목 우화충이 사냥꾼들을 모아 반역을 저질렀다. 그들이 수도를 점령하고
물리단군이 피난 중에 죽자, 이에 맞서 반란자들을 제압한 이가 바로 상장군 구물이었다. 이에 5가(우가 마가 구가 저가 양가; 5인으로
구성된 조정의 주요 대신(大臣)들) 제신들은 그를 44대 단군으로 추대하게 된다.
구물단군은 나라의 혼란을 수습하고, 국력을 쇄신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수도를 장당경(藏唐京; 지금의 개원(開原), 단군
44대~47대까지 188년간의 수도)으로 옮기고 국명 또한 ‘대부여(大夫餘)’로 바꾸기에 이른다. (고)조선의 종통은 보전하고 나라
이름을 바꾼 것이다.(‘부여’란 명칭은 초대 단군왕검의 넷째 아들의 이름인데, 초대단군은 아들 부여를 제후국 국왕으로 봉했다. 그 나라의
이름이 ‘부여’라는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학자들은 이를 ‘원시부여’라 부른다.)
요컨대 (고)조선의 국호가 부여(대부여)로 바뀐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명심명심 또 명심해야 한다. (고)조선의 국통은 다름 아닌
부여를 통해 계승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일제식민사학을 답습한 국사교과서에서는 (고)조선과 부여가 어떤 관계이며, 또 부여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로 어떻게 국통맥이 이어졌는지를 전혀 알 수 없게 되어있다.
북부여의 등장 | (고)조선 말기인 대부여로 오면서 진조선 번조선
막조선의 군권이 독립되고, 진조선의 중앙통제력이 약화되면서 지방의 군웅들이 할거하며 나라는 점점 혼란스러워졌다. 47대 단군 고열가(高列加)는
50여년에 걸친 치세에도 결국 이 혼란을 바로잡지 못하고, 5가 대신들에게 나라를 맡기고 산으로 은거하게 된다.(BCE 238) 이로써
2,096년간의 (고)조선은 막을 내리고, 5가(五加)에 의한 과도기의 공화정이 실시된다.
이 무렵 (고)조선의 종실(宗室) 사람 해모수가 웅심산(熊心山)에서 일어나(BCE 239) 세력을 키우면서 6년간 계속된 공화정을
철폐하고 5가 제신들의 추대로 단군조선의 대통을 이어 다시 ‘북부여(北夫餘)’를 건국하게 된다(BCE 232). 이렇게 대부여의 국통은
북부여로 이어진 것이다.
해모수는 국가 체제를 그대로 보전하고 나라 이름만 북부여라고 한 것이다. 해모수도 ‘단군’으로 호칭했으므로, 해모수 단군이라 불러야
마땅하다. 해모수가 ‘북부여’라고 나라이름을 정한 데에는, 북부여가 ‘대부여’ 곧 단군 (고)조선의 정통정신과 법통을 그대로 계승하였다는
역사의식을 나타낸 것이다.
북부여를 계승한 고구려 | 그러면 북부여의 국통은 어디로 이어졌는가?
고구려로 계승되었다.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은, 해모수의 둘째 아들 고구려후(高句麗侯) 고진(高辰)의 3대손이다.
광개토대왕비에서도 “옛날 시조 추모(주몽)왕이 나라를 세웠는데, 왕은 북부여 천제의 아들이다(唯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出自北夫餘天帝之子)”
하여 강한 북부여 계승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단군의 (고)조선-북부여-고구려’로 이어지는 한민족사의 국통은 삼신문화가 전수된 정신사적인 정통맥일 뿐만 아니라, 직계조상과
후손으로서 혈통줄을 타고 계승된 것이다.
드라마 <주몽>에서 보이는 부여는 엄밀히 말해서 동부여이다. 그런데 해부루가 다스렸던 동부여는 드라마에서 이야기하듯 중국의
전한(前漢)과 국경을 맞대고있지도 않았고 중국과 외교관계를 가질 수도 없었다. 동부여는 가섭원 부여라고도 하는데 지금의 만주 흑룡강성
통하현(通河縣)에 위치하고 있어 북부여에 의해 막혀 한나라와 교류를 할 수 없었다. 드라마가 상정하는 그 자리에는 사실 북부여가 자리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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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서 사라진 인물, 동명성왕 고두막한
또 드라마에서 볼 때 전한(前漢)이 매우 강성하여 부여 국내에까지 침입하여 노략질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당시 역사적 상황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동부여를 떠나온 고주몽은 북부여의 국통을 잇게 되는데, BCE 58년 고무서 단군이 죽자 고주몽이 유명(遺命)을 받들어 즉위하여
고구려를 세웠다. 주몽은 북부여의 6대 단군인 고무서(高無胥)의 둘째딸 소서노와 혼인하여 두 아들 비류와 온조를 낳는다. 잘 알려진
것처럼 후일 소서노는 그의 아들 온조와 함께 백제를 건국한다
그러니까 소서노는 드라마에서처럼 거상 연타발의 딸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시조 온조왕」조 본문에서조차 주몽이
‘(졸본)부여왕의 둘째 딸과 결혼 후 비류와 온조를 낳았다’고 명시하고 있다. 단지 일설로만 연타발의 딸일 가능성을 주를 달아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이는 나라의 국통맥을 치졸하게 끊어놓는 것이다. 연타발은 고구려의 창업공신으로 고주몽을 도와 나라를 세우는데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BCE 200년경 유방이 한나라를 일으킨 후, 연나라 사람 위만이 한의 세력에 쫓겨 (고)조선의 분국인 번조선의 변방으로 피난을 와
있다가 BCE 194년 번조선 왕조를 강탈하게 된다. 이후 위만의 손자 우거왕 때 한나라 무제의 침입과 내부 분열로 인해 번조선
위만정권도 막을 내리게 된다.(BCE 108년)
한 무제는 계속해서 번조선 일대와 북부여의 서쪽변방으로 침략을 하는데, 이 때 서압록(요하) 사람 ‘고두막한(高豆莫汗)’이 의병을
일으켜 한나라 군대를 가는 곳마다 격퇴하여 민심을 크게 얻게 된다. 고두막한은 또한 (고)조선의 마지막 단군 고열가의 후손이라고 하는데,
그는 민심과 혈통을 바탕으로 북부여 4대 고우루 단군을 이어 제위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나라 이름을 ‘동명(東明)’이라고 개칭하게
된다.
세상에서 말하는 ‘동명성왕(東明聖王)’은 고주몽이 아니다. 또한 북부여를 창건한 해모수도 아니다. 고두막한이 바로 ‘동명성왕’인
것이다. 그가 바로 북부여 5대 단군이며 고주몽의 장인이 된 6대 고무서 단군의 아버지가 된다. 그러니까 소서노의 할아버지인 셈이다.
물론 주몽이 ‘동명부여’(졸본으로 도읍을 옮겼기에 졸본부여라고도 함)를 계승하였으므로, 주몽을 ‘동명왕’이라고 부를 수는 있을
것이다.(참고로, 북부여 4대 단군 고우루를 이어 그의 동생 해부루가 5대 단군으로 먼저 즉위하였으나, 고두막한에 쫓겨 동쪽의 가섭원이란
곳으로 나라를 옮기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동부여의 시작이다.)
고두막한의 태양 같은 의기와 충의에 힘입어 사실상 한나라는 조선의 고토에서 세력을 떨치지 못했다고 봐야 한다. 한나라가 번한의 영토
부근에 한사군(낙랑, 임둔, 현도, 진번)을 설치한 것은 사실이나 고두막한을 필두로 한 민중의 뜨거운 저항으로 조기에 무너지고 만다.
지금의 국사 교과서에서도 이제 이 한사군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 혹자들이 한사군이 한반도에 설치된 것으로 기술하는 것은 명백히
잘못이라 할 수 있다.
민족사의 맥은 정신사에서…
이상의 내용은 주로 한민족의 정통도가사서를 묶어 편집한 『환단고기』 내의 「단군세기」, 「북부여기」, 「고구려국본기」의 내용을 바탕으로
전개한 것이다. 이런 사서들은 한양조선 시대조차 중국에 사대하는 풍토로 인해 금서로 묶여 있었다. 흔히 강단 사학자들이 기존의 역사
서술구도와 맞지 않다는 이유로 맹목적으로 부정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조선 시대의 역사 서술의 사정을 무시하는 것이다.
한민족의 참역사는 정신사를 알아야 한다. 왜 고주몽 성제는 최초의 연호(年號)를 ‘다물(多勿)’이라고 했던가? 다물이란 말은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회복하다’, ‘되물리다’는 뜻을 가진 한민족의 고어(古語)이다. 고주몽 성제는 (고)조선의 역사적 문화적 영광을
회복하고자 한 것이다. 그의 혈통적 정신적인 연계성을 따지지 않고, 무턱대고 고구려와 고조선이 별개의 나라인 것처럼 서술하는 현재의 역사
기술 풍토는 마땅히 시정되어야 한다.
한민족의 참 역사는 고조선이 나라를 다스렸던 근본정신에서 찾아야 한다. 한민족 역사는 단순히 청동동검과 빗살무늬토기와 같은 유물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오늘날과 같이 스테인리스 그릇이 아닌 토기에 음식을 해먹었더라도 오히려 오늘날 인간보다 훨씬 더 수승(殊勝)한
인간적 덕성으로 살고 있었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선사(先史)시대라 하여 반 짐승과 동일한 인간으로 보는 현대의 역사 인식도 또한
마땅히 시정되어야 할 것이다.
드라마 <주몽>! 무척 재밌다. 하지만 그 내용이 역사의 진실을 온전히 드러낸 것은 아니다. <주몽>을 보되, 우리 민족의 참 역사를
재발견하는 기회로 삼는다면, 더욱 값진 시간이 될 것이다.
출처 : 월간개벽 2006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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