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6] 일본, 부여의 아들
- 근초고왕, 야마도 일본의 건국시조인가? -
김운회(동양대 교수)
1. 부여 드라마
드라마 ‘주몽’의 드라마 사상 가장 큰 성과 중의 하나는 부여를 일반인들에게 분명히
각인시켰다는 것이다. 그동안 부여는 고구려의 위세에 가려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했으나 드라마를 통하여 부여의 많은
이야기들이 인구에 회자되게 되었다.
해모수와 금와왕의 우정이 드라마 ‘주몽’을 살려 드라마 초반의 인기상승에 큰 역할을 하였다. 어떤 드라마든지 첫 회가 중요한데 정평이 나 있는
한국의 중견 배우 들(전광렬, 허준호)이 이 드라마의 무게를 실어 주었고 그들의 검투 장면도 드라마를 살리는 동력으로 작용하였다. 그래서
해모수로 분한 배우(허준호)의 카리스마에 반한 많은 시청자들이 해모수를 죽이지 말라고 극심하게 요청하는 바람에 해모수는 자연사(自然死)할 수
있는 행운도 누리게 되고 자기와 유화부인 사이에 난 아들과도 대면할 수 있는 기적도 연출하게 되었다. 한국 드라마에 흔히 나타날 수 있는
해프닝이었다.
지속적으로 친한족 정책을 수행했던 부여에 대하여 다소 부정적으로 묘사할수도 있지만 드라마 ‘주몽’의 작가는 금와왕과 주몽의 우정을 부각시킴으로써
범한국인의 일원으로 부여를 힘차게 끌어안고 있다. 물론 해모수와 금와와의 우정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부여는 한민족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나라이다. 부여는 고조선만큼이나 중요한 국가이기 때문이다. 사서의 기록으로 본다면 부여는
고리국(코리국)에서 나왔으며 이 부여는 후일 제2 코리국 즉 고구려의 모태가 된 국가이기도 하다. 북한의 사학자 리준영은 범한국인의 조상으로
알려진 맥족은 고리국의 구성원이며 이 고리국이 바로 북부여라고 하였고 오랫동안 동북아시아의 고대사를 연구한 북한의 탁월한 역사학자인
리지린 선생은 이 고리국이 바로 동호(東胡)라고 하고
있다(김운회『대쥬신을 찾아서』1, 123쪽). 다시 말해서 동호(東胡)는 후일 거란과 몽골의 선조들로서 결국 이
동호로부터 고구려, 북위, 요나라, 금나라, 몽골대제국, 청나라 등이 나왔다는 말이다.
실제에 있어서도 동호는 요하(遼河) 지역으로 고조선의 유적이 가장 많이 분포되어있는 곳이기도 하고 쥬신족들의 대표적인 주거시설인 온돌(구들)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요나라의 사서는 요나라가 단군왕검(텡그리옹군) 식의 통치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국가임을 보여준다. 백제를 상징하는 구들,
구드리 등도 구들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현재까지도 일본은 백제를 ‘구다라’라고 부르고 있다([특집4] 참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줄기차게 동호는 오랑캐의 대명사쯤으로 가르쳐왔다.
한민족의 뿌리를 찾을 때 알타이에서 출발한 유목민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리고 한족(漢族)의 정체성이 견고화되는 한나라 이후를
기점으로 이들은 황하에서 현재의 베이징 - 요하 방면으로 지속적으로 밀려 나간 것이 기원 전후의 사정이므로 이 시기에 요하에 터전을 잡은 나라나 민족이 우리의 뿌리에 가장 근접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림 ①] 중국 사서에 나타난 맥족의 시기와 장소
(숫자는 이동 순서 : 1은 추정)
2. 험난한 부여의 여정
부여는 그 연원이 깊은 나라지만 자가 분열로 인해 형성된 고구려와 부족국가 또는 부족 연맹체 단계에 있던 다른 쥬신족들의 위협을 끊임없이
받음으로써 AD 2~3세기 이후에는 거의 만성적인 국가위기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래서 부여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한편으로는 친한족 정책을
강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요동 지방(남부여), 태백산지역(장백산 : 동부여), 반도 남부(반도부여), 일본 열도(열도부여) 등으로
끊임없이 보다 안전한 근거지를 확보하려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쉽게 말해서 부여의 분국(分國)이 일본열도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물론 남부여를 바탕으로 반도부여(백제)를 건설했겠고, 반도부여(백제)를 근거로 하여 열도부여(야마도 : 일본)를 건설하기가
쉬웠을 것이다.
[그림 ②] 부여의 영역과 이동
부여는 AD 3세기 초 중엽에 극심한 국가적 위기에 봉착하여 그 주요 세력들이 남하하여 반도부여의 기초를 세우고(부여계의 2차 남하) 다시 4세기 중엽 근초고왕 시기에는 만주에서
백제의 활동이 사라지고(이도학, 『새로 쓰는 백제사』102쪽), 백제는 한반도에서 왕성한 정복활동을 전개되고 있다(전라도, 낙동강, 황해도).
그런데 이상한 일은 이 시기에 벡제의 근초고왕은 20여 년간 잠적하는데 이 시기(349~363)에 일본에서도 활발한 정복사업이 시작되고
있다(부여계의 3차 남하).
백제 관련 연구자들은 “ 4세기 중반 이후에는 만주지역에서 존재하던 백제의 활동이 사라져버렸다.”고 하는데 그것은 아니다. 부여 세력이 반도로
이전해온 것일 뿐이다.
더욱 주목할만한 일은 이 시기(4세기)를 즈음하여 7세기 초까지의 일본에서는 이전과는 달리
대규모의 고분(古墳)들이 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의 사학자들은 근초고왕 24년(369년)에 야마도 정부가
신라와 가야를 정복하고 미마나(任那)라는 식민지 운영을 시작했다고 하고 있고 근초고왕 이후 백제 왕비족이 진씨(眞氏)가 되고
전문가들에
따르면, 이 진씨(眞氏)가 일본의 황족(皇族)이라고 추정된다고 한다.
백제 전문가인 이도학 교수에 따르면, 백제의 왕실 교체가 근초고왕(재위 : 346~375) 때에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이 시기는 백제는
연나라의 침공을 받아 부여왕 현(玄)이 잡히고 부락민 5만 여구를 볼모로 데리고 돌아간 시기(『資治通鑑』 卷97 東晋 永和 2年)와 일치하고
있다. 즉 북만주 지역의 부여는 거의 붕괴직전의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여의 주세력이
한반도로 이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부여계 3차 남하).
이것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무덤양식의 변화가 있다. 서울 석촌동 백제 고분군 지역의 기단식 석실
적석총(계단식 피라미드형 무덤)은 이 지역의 이전 시기 고분들과는 판이한 만주 지역의 고분 양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4세기 후반에 느닷없이
나타났다. 즉 4세기 후반에 만주지역의 무덤양식이 느닷없이 출현하였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백제와 일본과의 관계사를 연구한 홍원탁선생에 따르면 백제의 왕위는 166-346년 기간 동안 4대 개루왕의 큰 아들이라는 초고(肖古)
계열과 작은 아들이라는 고이(古?) 계열의 왕족이 교대로 (각각 네 명씩의 왕을 배출하면서) 승계를 하다가 마침내 근초고왕(346-75)과 그의
아들 근구수왕 대에 이르러 왕위승계가 초고 계열로 정착되었고 고이 계열(부여계의 2차 남하
세력)의 마지막 왕인 계(契)는 초고 계열인 근초고왕이 승계했고, 그 이후 고이 계열은 백제의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졌다고 한다.
그리고 근초고왕부터 강력한 정복국가의 특성이 나타나고 백제왕의 성씨가 부여씨로 확실하게
나타나고 있다. 『진서(晉書)』를 포함한 여러 중국 사서들에서 백제의 경우, 근초고왕(近肖古王)은 여영(餘暎),
전지왕(典支王)은 여비(餘毗), 반유왕(畔有王)은 여경(餘慶), 개로왕(蓋鹵王)은 여융(餘隆), 무령왕(武寧王)은 여명(餘明), 성왕(聖王)은
여창(餘昌) 등과 같이 백제 왕실의 성을 여(餘)씨로 표시하였다가 29대 무왕(武王)부터는 부여장(扶餘璋)으로 부여(扶餘)씨로 기록하고
있다(『수서(隋書)』『당서(唐書)』).
참고로 『삼국유사(북부여)』의 기록에는 “古記(고기)에 이르되 전한서에 宣帝(선제) 신작 3년 임술 사월 팔일에 천제(天帝)가 흘승골성[訖升骨城
: 대요(大遼) 의주(醫州) 경게지역임]에 내려와서 오룡거를 타고 도읍을 정하여 왕을 일컫고 국호를 북부여라 하고 스스로 해모수(解慕漱)라
이름하였으며 아들을 낳아 부루(扶婁)라 하고 해(解 : sun)로 씨(氏)를 삼았다.”고 한다.
더구나 이후 백제의 정치조직 안에는 유목국가에서 흔히 보이는 직제(좌·우현왕제)라든가 ‘어라하’, ‘건길지’ 같은 북방 유목민 계열의 호칭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를 본다면 백제는 부여의 분국 또는 남부여 그 자체라는 것을 알 수 있다([특집3], [특집4] 참고).
3. 일본, 부여의 아들
일본 역사의 가장 큰 미스테리는 진구황후(神功皇后)와 오우진천황(應神天皇 : 진구황후의 아드님)에 관한 것이다. 진구황후와 오우진천황은 일본
역사의 여명기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들로 일본 역사의 가장 큰 비밀을 가지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진구황후의 업적은 근초고왕의 업적과 거의
일치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진구황후는 실존인물로 볼 수 없는 가공의 인물이며 다른 사람의 업적으로 일본에서 창조된 인물이다. 결국 근초고왕이
진구황후의 탈을 썼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그러면 일본의 실질적인 초대천황(오우진천황)은 근초고왕의 아드님이거나 처남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일본 최초의 통일 국가는 4세기 경의 야마도(大和) 왕국으로 그 시조는 호무다(品陀) 즉 오우진(應神)천황이다. 도쿄대학의
이노우에미쓰싸다(井上光貞) 교수는 “오우진천황은 4세기 중엽 이후 일본의 정복자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라고 한다[井上光貞
『日本國家の起源』(岩波書店 : 1967)]. 따라서 오늘날 일본은 오우진 천황에 의해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왜냐하면 흔히 일본인들이
야마도 정신(일본 정신) 또는 야마도의 혼(魂)이라고 하는 그 정신의 기원이 바로 여기에서 출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서기』에서는
진구황후가 신라와 백제는 물론이고 고구려까지 정벌해서 조공을 받을 만큼 대단한 인물로 기록되어있다(그러나 진구황후가 활약한 시기를 비교해보면
다른 사서에서는 진구황후에 대한 기록이 일체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고 진구황후 49년에 진구황후가 이라다께 목라근자 등을 보내어 탁순국(卓淳國
: 대구)에 모여 신라를 격파하였고 남가라(南加羅 : 김해), 비자현(比自炫 : 창녕), 녹국(㖨國 : 경산), 안라(安羅 : 함안),
다라(多羅 : 합천), 탁순(卓淳 : 대구?), 가라(加羅) 등의 7개국을 평정하고 군사를 돌려 서쪽으로 고해진(古奚津 : 강진?)과 제주도를
정벌하여 백제의 근구수왕을 도왔다고 한다. 그리고 비리(比利 : 완산), 벽중(辟中 : 김제) 등의 4읍도 항복하였다.
그런데 이 업적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있는 근초고왕의 업적과 거의 일치하는데다 이 시기가
백제(남부여)의 세력이 현재의 경상도 지방에 미친 시기이고 이들의 집결지가 낙동강 상류로 알려진 탁순(대구?)이라는 점도 진구황후의 업적이
근초고왕의 업적이라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백제전문가 이도학교수에 의하면, 『일본서기』에 근초고왕 당시 전라도 지역에 왜(倭)의 군대가
활동한 것(『日本書紀』神功 49年)도 사실은 근초고왕이 주도한 것이다고 한다. 결국 근초고왕의 요청에 따라 일본의
군대가 이동한 것이라는 말이다. 더구나 이 정복이 매우 신속하게 이루어져 군사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보병전(步兵戰)으로는 불가능하고 대규모의 북방
기병(騎兵)들이 동원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경남 호남 등의 지역은 넓은 평원이 있어 기병전(騎兵戰)에도 적합하기 때문이다.
더욱 결정적인 것은 근초고왕의 업적으로 추정되는 일을 한 사람인 진구황후가 실존인물이라는
증거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일본측의 문헌외에 진구황후에 대한 이야기는 어느 곳에도 나오지 않는다. 가장
가까운 인물로는 3세기 왜 여왕 히미코인데, 히미코여왕의 업적과 진구황후의 업적의 실질적인 공통성은 하나도 없다. 히미코 여왕은 정복군주와는 거리가 멀고 갈등이 심한 각 부족들간의 화합과 조화를 이끌어 내었던 영명한
군주였다.
그런데 전혀 엉뚱하게도 『일본서기』의 진구황후 39년, 40년, 43년의 기사는 히미코의 기사로 대체해두고 있다. 그러면 히미코를 진구황후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터인데 정작 히미코는 진구황후와는 공통성이 없어 이 기록들은 조작되었거나 아니면 다른 왕의 업적을 끌어다 놓은 것이다.
필자는 이 진구황후는 근초고왕 + 히미코 + 사이메이천황 등의 모습을 하나로 형상화한
것으로 보고 있다. 사이메이천황(齊明天皇)은 백제 구원을 위한 국가적 사업을 하다가 중도에 서거한 여자 천황이다.
일본인들이 이를 두고두고 아쉬워했다. 그래서 사이메이 천황을 진구황후로 부활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근초고왕 또는 그의 처족인 부여의 주류 씨족(진씨)이 가야계와 연합하여 일본 열도를
정복하여 고대 일본의 야마도 왕국을 건설했다는 것이다. 이를 좀더 살펴보면 『구당서』에서는 “백제국은 동북쪽으로는
신라와 접하고 있고, 서쪽은 바다를 건너 월주(越州)에 이르고 있고 남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왜국까지 이르고 있다(『舊唐書』卷 199 上
「列傳」第149 東夷)”라고하여 부여 세력이 한반도를 거쳐 일본까지 진출했음을 뜻한다. 그리고 백제와 일본의 기본 통치세력은
남부여계(南扶餘系)이고 이들 남부여계 씨족들은 결혼(結婚)을 통해 더욱 관계가 공고화된다.
[그림 ③] 절대권력의 상징 오우진 능
일본의 저명한 사가 쯔다 소오끼치(津田左右吉, 1873~1961) 교수는 오우진 (호무다) 이전의 천황에 대한 기록이라는 것은 야마도 왕족을
태초로부터 내려오는 지배자로 만들기 위해 모두 조작한 것이라고 하였고 이 분야의 전문가들은 이 진무(神武)와 오오진(應神)은 동일인이라고 보는데
동일인을 굳이 모자의 관계로 둘로 나눈 이유는 당시 오오진이 너무 잔인하게 열도를 정벌해 나갔기 때문에 그것을 감추려는 의도라고도 한다.
미즈노유우(水野 祐) 교수에 따르면, 오우진․닌토쿠(오우진의 아드님) 왕조(카와치왕조)는 외래 민족의 세력으로 일본에 침입하여 일으킨 왕조로
기본적으로 백제국 왕가와 동일 민족계통(부여)으로 대륙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대륙의 사정에 대해서도 매우 소상하게 알고 있었다고
지적한다[水野祐『日本古代の國家形成』(講談社 : 1978)].
그런데 오우진 천황이 백제의 왕비족인 진씨(眞氏)라는 것이다. 야마도 조정의 족보인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에는 오우진계의 씨족 이름이
진[眞, 眞人(마히토 : マヒト)]이라고 하면서 이들이 백제의 친왕(親王)의 후손이라고 말하고 있다.『신찬성씨록』을 체계적으로 분석했던 사람들은
오우진계의 천황들의 성은 백제의 왕비족인 진씨라고 한다[김성호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기원』(지문사 : 1982) 204쪽]. 특히 근초고왕의
직계 후손들은 배우자를 진씨 집안에서만 선택함으로써 진씨 왕후 시대가 열렸다고 한다[이기백․이기동『韓國史講座Ⅰ : 古代篇 』(일조각 :
1983) 37쪽].
참고로 백제의 왕실과 일본 천황가의 계보(系譜)를 참고로 살펴보자. 이 그림은 2십년 이상 백제와 일본의 왕가 계보를 연구한 홍윤기
선생(한국외국어대 교수)의 견해이다.
[표1] 백제왕실과 일본 천황가의 관계도
(홍윤기
『일본천황은 한국인이다』61쪽 재구성)
[표1] 의 계보 표를 보면 개로왕(蓋鹵王 : ?~475)의 아드님이신 곤지왕자(昆支王子)는 두 손자를 한 쪽은 백제, 한 쪽은 일본에서 모두
최고 권력자로 등극시키고 있다. 그런데 곤지왕자가 활약하던 때는 장수왕의 침입으로 부왕(개로왕)이 세상을 떠나는 등 백제가 “회복
불능” 한 상태에 빠지는 시기와 일치한다. 근초고왕 때에도 상황이 비슷한데 근초고왕은 백제(반도부여)를 통치하고 근초고왕 자신
또는 왕비족(王妃族)인 진씨계(眞氏系)는 일본(열도부여)을 경영하였듯이, 개로왕의 죽음 이후도 곤지왕자의 가계를 중심으로 열도부여와 반도부여는 하나의 왕조를 형성하게
된다. 개로왕은 『삼국사기』에는 여러모로 나쁘게 묘사되어있지만 실은 부여의 중흥을 위해 안간힘을 쓴
분이다. 위의 표에서 보듯이 백제와 일본의 왕가는 너무
얽히고설켜 누가 누군지도 잘 모를 정도로 친족관계가 복잡하기 때문에 차라리 하나의 왕실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특히 반도부여의 성왕은 부여의 중흥을 위해 가장 헌신한 분으로
열도부여에서는 성명왕이라고 하여 최고의 존칭으로 부르고 있다. 마치 동명성왕을 부르는 듯하다.
9세기에 편찬된 일본 천황가(天皇家)의 의례집(儀禮集)인 『테이칸 기시키(貞觀儀式)』에는 “일본 천황(天皇)이 신상제에서 제사를 드리는 신은
신라신(新羅神)인 원신(園神) 1좌와 백제신(百濟神)인 한신(韓神) 2좌이다. 즉 모두 세 분의 한국 신을 모시고 카구라(神樂)라고 부르는
제례무악(祭禮舞樂)을 연주하면서 천황궁의 신전에서 제사를 지냈다(『貞觀儀式』「園倂韓神祭」).”고 하는데 이 기록은 이후에도 여러
서적들에게서 나오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신라신은 스사노오노미고도[須佐之男命] 즉 스사노오이고, 백제신은 오오진 천황(應神天皇)과 성명왕(聖明王) 즉 남부여(백제)의
대표적 성군으로 부여의 부활을 꿈꾸다가 산화(散華)한 성왕(聖王)이다. 일본인들은 성명왕(聖明王 : 성왕)을 이마키노가미(今木神)으로 높혀
부른다. 바로 쥬신(Jüsin)의 신목(神木)을 상징하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반도부여의 성왕(백제 성왕)은 일본의 국신(國神)이다. (상세한 내용은 김운회 『대쥬신을 찾아서 』제1권 일본신들의 고향 참고)
이러한 상황은 고고학적 발굴으로도 증명이 된다. 일본 고분문화의 특성은 반도부여가 한반도에 확고한 기반을 다지는 AD 4세기 후반을 전후로 하여 급격히 바뀌고 있으며 그 고분의 성격이 쥬신
즉 만주와 몽골 지역 등지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이 실용적(實用的)이며 군사적(軍事的)이고
귀족적(貴族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시기는 근초고왕이 백제를 지배한 시기와 대체로 일치하고 있고 특히 근초고왕의 행적은
20여 년이 나타나지를 않아서 일본 열도의 정벌전과도 깊은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구체적인 내용은 김운회 『대쥬신을 찾아서』2 「일본이
부여의 분국인 열네 가지 이유」를 참고할 것). 더욱 이상한 일은 이 4세기 후반에 대한 일본 역사의 기록이 없어
흔히 ‘신비의 4세기’라고 한다. 일본의 사가들에게 이 시대의 역사는 말못할 사정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일본의 고분시대(古墳時代)를 시기별로 분류해 보면 그것은 반도부여(백제)의 정치사적 변화와 그대로
일치한다.
반도부여(백제)와 열도부여(일본)의 정치적
교환관계(交換關係)가 단순히 본국(本國) - 지방정권(地方政權)의 수준이 아니라 하나의 국가와 같은 정도의
혈맹적인 특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도 반도부여와 열도부여가 하나의 연맹왕국으로 볼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된다. 쉽게 말하자면 일본(열도부여)과 백제(반도부여)는 범부여 연합국가(USB : United States
of Buyou)라는 것이다.
두 나라는 국가원수의 교체에 있어서도 서로 관여하는 등 거의 한나라 수준의 국가가 아니면 불가능한 정치적인 일체성을 가지고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백제의 진사왕이다. 또한 백제 - 가야 - 일본 등이 하나의 공동운명체(共同運命體)였다는 실제 기록들이 『일본서기』에는 매우 많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일본서기』긴메이(欽明 : 531~71) 천황 2년에 백제의 성명왕(523~554 : 백제 성왕)이 가야에서 온 여러 사람들에게 “과거,
우리의 선조 근초고왕, 근구수왕께서 가야에 계신 여러분들과 처음으로 서로 사신을 보내고 이후 많은 답례들이 오고가 관계가 친밀해져서 마치 부자나
형제와 같은 관계를 맺었습니다.”라고 하고 있다. 그리고 의문스러운 점은 백제의 무왕이나
성왕은 일본의 죠메이천황(舒明天皇 : 628-641) 및 긴메이천황(欽命天皇)과 동일인이라는 여러 증거들이 나타나고
있다[小林惠子『二つの顔の大王』(文藝春秋 : 1991)].
일본(열도부여)과 백제(반도부여)를 하나의 연합국가 범주로 볼 수 있는 또 다른 강력한 증거는 인적 물적 자원의 이동이다. AD 4세기에서 AD 7세기 반도부여(백제)의
멸망 때까지 반도부여(백제)와 열도부여(일본)는 연맹국가 이상 또는 같은 나라 수준이 아니면 곤란할 정도의 생산요소(production
factors)나 국가자원(national resources)의 이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일본의 인류학자인 하나하라(埴原和郎)는 “일본인의 골상과 얼굴, 모습 등을 토대로 당시의 도래인(渡來人)의 수를 컴퓨터로 계산한 결과 규슈
지방의 대부분 사람들이 도래인(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이다. 야요이시대부터 나라(奈良)시대까지 한반도로부터 일본에 건너 온 사람이 약 1백만
명”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東京大學人類學雜紙 1987年 英文版「古代日本 移住者 數 推定」). 당시 교통수단이나 인구의 수준을 감안해 보면 이는
국가적인 이동에 해당한다.
AD 5세기의 경우만 보더라도 반도부여(백제)는 대장장이․토목공사전문가․양조업자․의복재단사 등의 전문직 사람들을 대거 보냈으며 403년에는
궁월군[弓月君 : 하다씨(秦氏) 씨족의 시조]이 무려 120개 현의 사람들을 이끌고 백제로부터 야마도에 도착하였으며, 409년 아지사주(阿知使主
: 아야족의 시조)가 17개 현의 사람들을 이끌고 일본으로 왔으며 463년(유략쿠 7년)에 대규모의 기능공들이 백제에서 야마도 지역으로
이주해오는 등 반도부여의 정치적인 상황에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이주해오고 있다. (구체적인 내용은 김운회 앞의 책을 참고할 것)
뿐만 아니라 반도부여(백제)에서 열도부여(일본)로 이주한 사람들에 대한 예우가 반도부여의
수준에 준하여 이루어졌다는 점 또한 반도부여와 열도부여가 하나의 국가적 동일체라는 범주에 속한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즉 당시의 사정을 감안한다면 엄청난 인원이 일본으로 갔는데 이들은 백제에서 가졌던 지위에 따라 일정한 직위가 부여되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의자왕의 아들 선광(善光)은 백제왕(百濟王)이란 호를 받았고 그의 아들들은 모두 일본 조정의 고위인사들이었다(『續日本記』) 귀족들의
경우도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의 사람들이 일본 조정에서 활약하고 있다. 대략 60여명 정도의 백제 유민이 일본의 조정에 참여했으며 일본의
『고사기(古事記)』(712)나 『일본서기(日本書紀)』(681~620)의 편찬에도 깊이 개입한다.
일본(열도부여)과 백제(반도부여)를 하나의 범주에 둘 수 있는 보다 더 결정적인 이유는 반도부여(백제)가 멸망할 당시
반도부여(백제)를 방어하고 지키려는 일본의 의지가 하나의 나라가 아니면 곤란할 정도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백제가 멸망할 당시에 일본은 마치 국운(國運)을 걸고 군대를 파견하여 백제를 지키려고 하고 있다. 사이메이 천황(齊明天皇)은 원정 해군을
지휘했으며 나카 왕자는 5명의 장군을 파견하여 백제를 원조하게 했으며 풍왕자는 5천명이 넘는 군대의 호위를 받으며 돌아갔다. 그리고 6명의
장군이 2만 7천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신라로 갔으며 당시 백제 부흥운동을 위해 파견된 백제의 좌평 복신(福信)에게는 화살 십만 척, 실 5백
근, 솜 1천 근, 피륙 1천단, 다룬 가죽 1천 장, 종자 벼 3천 석이 주어졌고 다시 피륙 3백단을 백제왕(풍)에
주었다(『日本書紀』「天智天皇」). 이러한 일본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백제․일본 연합군은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에 패배하여 일본의 4백 척의 군함이
전쟁에서 패해 백강(白江) 하구에서 불태워졌는데 그 연기와 불꽃으로 하늘과 바다가 모두 붉게 물들었다고 『삼국사기』는 전하고
있다(『三國史記』「百濟本紀」.).
백제가 멸망하자 『일본서기』는 “백제가 다하여 내게로 돌아왔네. 본국(本國 : 本邦)이 망하여
없어지게 되었으니 이제는 더 이상 의지할 곳도 호소할 곳도 없게 되었네(百濟國 窮來歸我 以本邦喪亂 靡依靡告
:『日本書紀』「齊明天皇」).”라고 하고 있고 백제의 부흥운동이 실패로 끝나고 주류성이 함락되자 『일본 서기』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주류성이 함락되고
말았구나(州流降矣).
어찌할꼬 어찌할꼬(事无奈何).
백제의 이름 오늘로 끊어졌네(百濟之名 絶于今日).
조상의 무덤들을 모신 곳(丘墓之所),
이제 어찌 다시 돌아갈 수 있으리(豈能復往)
『일본 서기(日本書紀)』天智天皇 2년(663) ”
[그림 ④] 반도부여의 슬픈 유적 : 백마강과 낙화암
이상의 논의들을 토대로 본다면 일본은 바로 반도부여를 이은 부여 그 자체라는 것이다. 백제와
일본은 서로 다른 두 개의 나라로 보이지만 결국은 하나이며 그것은 바로 부여(扶餘)라는 보다 큰 차원의 정치적 이데올로기(political
ideology)에 의해서만 해석될 수가 있다.
참고
『대쥬신을 찾아서』제1권
12.일본 신들의 고향
『대쥬신을 찾아서』제2권
17. 일본이 부여의 분국인 열 네 가지 이유
18. 왜 한국인들의 이름 - 한국과 일본 그 끝없는 싸움의 시작.
관련 사이트 : www. ebiz114.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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