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보며 내다보면] 진실은 TV에 나오지 않는다?
이 강택(KBS 스페셜팀,17대 PD연합회장)
늙은 건설노동자의 수심 가득한 얼굴을 본다. 이미 초국적 자본의 소유가 되버린 원청회사 포스코의 철저한 무시와 배제, ‘파업폭탄’ 운운하며 강경진압 선동에 여념이 없었던 조중동 그리고 상황이 무르익기를 기다려 사실상 강제해산에 성공한 참여정부(!) 3자의 대연정이 짓밟아놓은 그들의 절박함이 사진 한 장에 오롯이 담겨있다.
레디앙 문선영 기자의 기사를 읽으며 58명 지도부의 대량구속과 수 천 억원에 이를 손배가압류를 눈 앞에 둔 그들의 절망과 공포, 회한에 가슴이 아린다. 또다른 인터넷 뉴스사이트 ‘참세상’에선 이 정원 기자의 포토뉴스에 눈길이 끌린다. 김현종, 김종훈을 해임하라! - 범국본, 해임촉구요구서 청와대 접수- 라는 제목 하의 사진들. “4대 선결조건은 단지 편의상 사용한 표현일뿐이며 그것을 입증하는 증거가 나오면 자리에서 물러 나겠다”던 통상관료들의 악착같던 거짓말들이 새삼스럽다.
“4대 선결조건이 있었던 건 인정하지만 부당한 양보를 한 바 없다” 고 우겨대는 대통령의 얼굴에 기타를 치며 흘리던 ‘바보’의 눈물이 오버랩 된다. 애써 일궈냈던 민주주의와 투명성, 참여가 도처에서 무너지고 배반당하고 있다. 이름하여 87년 체제의 종언이다.
하지만 TV는 즐겁다. 서민의 삶보다 중요한 것이 금융시장의 변동이요, 넘쳐나느니 중산층 대상의 교양과 오락이다. 이따금 사회적 의제를 다룬다 해도 표피적 수준을 넘는 것은 흔치않다. 왜 그럴까? 나는 의심한다. 신자유쥬의의 광풍과 전 세계적 대안부재(?)의 상황 아래서 우리가 어느덧 과거 수구세력들이 주창했던 기계적 중립의 틀을 스스로 내면화한 까닭이 아닐까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그 세월들이 길어지면서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에 대한 애정과 탐구, 사회적 정의에 대한 치열한 문제의식을 잃어버리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양심과 진실에 근거해 검은 것을 검다하고 흰 것을 희다고 말하려는 소명의식마저 약화된 게 아닌가 혐의를 둔다. 과거 선배들처럼 심하게 욕을 먹지도 않으면서도 적절히 누릴 수 있는 안온함에의 굴종이 그 배경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여 프로그램을 논하되 시각의 적실성과 내용의 새로움이 토론에서 배제되고, 실험정신을 말하되 표현기법의 영역 안에 스스로 자폐하는 ‘민주화된 방송의 역설’, 작고 말랑말랑한 소재를 세련되게 다듬는 (부정적 의미에서의) 미니멀리즘? 문화주의의 득세를 목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도대체 내용상의 치열함에 기반하지 않는다면, 아니 최소한 그것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형식의 실험성이 마스터베이션 이상의 의미를 지닐까?) 그리하여 환경감시 기능이 거세되고, 공공성이 차차 배제되고, 최소한의 진보적 의제설정 기능이 사라져 마침내 방송이 언론이 아닌 한낱 상업문화도구로서 존재할 날을 우리 스스로 앞당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흔히 2-3년 내에 방송계에 격변이 몰아쳐올 가능성이 높다고들 한다. 필자 또한 그러한 예측에 동의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 상황에 대비해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에 있다. 요즘처럼 TV에 진실이 나오지 않는다면, 몇몇 인터넷 언론에 그 역할을 맡겨놓는다면 어떠한 전망도 세울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초국적 자본과 재벌, 수구정치세력의 대공세가 몰아칠 그 시점에서 과연 누가 공영방송의 가치를 말해줄 것이며, 방송노동자들을 위해 나서줄 것인가?
무슨 낯으로 시민사회에 손을 벌릴 것이며, 무슨 변명으로 우리의 진정성을 믿어달라 할 것인가? “시작(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도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나가는 것이다.” 옛 시인이 갈파한 바 더 늦기 전에 우리의 자세를 가다듬을 때다.
이 강택(KBS 스페셜팀,17대 PD연합회장)
늙은 건설노동자의 수심 가득한 얼굴을 본다. 이미 초국적 자본의 소유가 되버린 원청회사 포스코의 철저한 무시와 배제, ‘파업폭탄’ 운운하며 강경진압 선동에 여념이 없었던 조중동 그리고 상황이 무르익기를 기다려 사실상 강제해산에 성공한 참여정부(!) 3자의 대연정이 짓밟아놓은 그들의 절박함이 사진 한 장에 오롯이 담겨있다.
레디앙 문선영 기자의 기사를 읽으며 58명 지도부의 대량구속과 수 천 억원에 이를 손배가압류를 눈 앞에 둔 그들의 절망과 공포, 회한에 가슴이 아린다. 또다른 인터넷 뉴스사이트 ‘참세상’에선 이 정원 기자의 포토뉴스에 눈길이 끌린다. 김현종, 김종훈을 해임하라! - 범국본, 해임촉구요구서 청와대 접수- 라는 제목 하의 사진들. “4대 선결조건은 단지 편의상 사용한 표현일뿐이며 그것을 입증하는 증거가 나오면 자리에서 물러 나겠다”던 통상관료들의 악착같던 거짓말들이 새삼스럽다.
“4대 선결조건이 있었던 건 인정하지만 부당한 양보를 한 바 없다” 고 우겨대는 대통령의 얼굴에 기타를 치며 흘리던 ‘바보’의 눈물이 오버랩 된다. 애써 일궈냈던 민주주의와 투명성, 참여가 도처에서 무너지고 배반당하고 있다. 이름하여 87년 체제의 종언이다.
하지만 TV는 즐겁다. 서민의 삶보다 중요한 것이 금융시장의 변동이요, 넘쳐나느니 중산층 대상의 교양과 오락이다. 이따금 사회적 의제를 다룬다 해도 표피적 수준을 넘는 것은 흔치않다. 왜 그럴까? 나는 의심한다. 신자유쥬의의 광풍과 전 세계적 대안부재(?)의 상황 아래서 우리가 어느덧 과거 수구세력들이 주창했던 기계적 중립의 틀을 스스로 내면화한 까닭이 아닐까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그 세월들이 길어지면서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에 대한 애정과 탐구, 사회적 정의에 대한 치열한 문제의식을 잃어버리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양심과 진실에 근거해 검은 것을 검다하고 흰 것을 희다고 말하려는 소명의식마저 약화된 게 아닌가 혐의를 둔다. 과거 선배들처럼 심하게 욕을 먹지도 않으면서도 적절히 누릴 수 있는 안온함에의 굴종이 그 배경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여 프로그램을 논하되 시각의 적실성과 내용의 새로움이 토론에서 배제되고, 실험정신을 말하되 표현기법의 영역 안에 스스로 자폐하는 ‘민주화된 방송의 역설’, 작고 말랑말랑한 소재를 세련되게 다듬는 (부정적 의미에서의) 미니멀리즘? 문화주의의 득세를 목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도대체 내용상의 치열함에 기반하지 않는다면, 아니 최소한 그것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형식의 실험성이 마스터베이션 이상의 의미를 지닐까?) 그리하여 환경감시 기능이 거세되고, 공공성이 차차 배제되고, 최소한의 진보적 의제설정 기능이 사라져 마침내 방송이 언론이 아닌 한낱 상업문화도구로서 존재할 날을 우리 스스로 앞당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흔히 2-3년 내에 방송계에 격변이 몰아쳐올 가능성이 높다고들 한다. 필자 또한 그러한 예측에 동의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 상황에 대비해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에 있다. 요즘처럼 TV에 진실이 나오지 않는다면, 몇몇 인터넷 언론에 그 역할을 맡겨놓는다면 어떠한 전망도 세울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초국적 자본과 재벌, 수구정치세력의 대공세가 몰아칠 그 시점에서 과연 누가 공영방송의 가치를 말해줄 것이며, 방송노동자들을 위해 나서줄 것인가?
무슨 낯으로 시민사회에 손을 벌릴 것이며, 무슨 변명으로 우리의 진정성을 믿어달라 할 것인가? “시작(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도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나가는 것이다.” 옛 시인이 갈파한 바 더 늦기 전에 우리의 자세를 가다듬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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