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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존재였다. 李映勳(이영훈) 선장. 나이 42세. 신장은 168cm 정도로 큰 키는 아니지만, 그의 체격은 어깨가 딱 벌어져 다부지게 보였다. 『어서 오십시오. 저희 배에 승선하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기자 일행 3명은 지난 10월26일 새벽 1시30분 홍콩港(항)에 접안해 있는 現代상선 소속 「현대 하이웨이(Hyundai Highway)」號에 올랐다. 現代상선 홍보실 팀장인 吳東秀(오동수·47) 상무와 李俊基(이준기·36) 과장이 이번 승선취재를 도와주기 위해 기자와 함께했다. 여권을 선장에게 건네주고 船上에서 간단한 승선절차를 마쳤다. 여권을 선장에게 건네줄 때 야릇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 목숨을 선장에게 의탁했고, 선장은 이제 내 목숨의 담보자라는 생각이 순간 뇌리를 스쳤다. 船內에 설치돼 있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8층에 내렸다. 선박內에서 엘리베이터를 타보기는 처음이었고, 그래서인지 묘한 느낌이 들었다. 좁은 복도를 따라가다 보니 어느 방문 앞에 「월간조선 송승호 기자」라고 쓰인 큰 글씨가 보였다. 세계 제1위의 항구인 홍콩항의 夜景(야경)을 빨리 보고 싶다는 생각에, 짐은 정리하지 않은 채 방안에 들여만 놓고 배의 가장 위쪽(배의 9층에 해당)에 있는 「브리지(Bridgeㆍ船橋·선교)」로 올라갔다. 브리지는 선박의 「조정실」이라고 할 수 있다. 이곳에는 電子 해상도와 속도를 조절할 수 있는 속도조절기를 비롯해 운항에 필요한 각종 첨단 장비들이 갖추어져 있다. 일반 아파트 9층 높이의 브리지에서 바라보는 홍콩항의 夜景은 화려했다. 수많은 불빛이 「디귿(ㄷ)」字 형태로 늘어서서 부두를 밝히고 있었다. 화물 터미널마다 가득 들어찬 선박, 쉴 새 없이 컨테이너를 싣고 내리는 겐트리 크레인의 웅장한 움직임, 트레일러(컨테이너 운반용 차량)의 엔진 소리 등이 홍콩항의 위용을 더하고 있었다. 하이웨이號의 선원들은 모두 긴박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컨테이너를 내리고 싣는 작업이 동시에 진행됐기 때문이다.
하이웨이號가 싣고 있는 컨테이너의 길이는 경인고속도로의 절반
하이웨이號는 한꺼번에 20피트짜리 컨테이너 박스 2200개를 실을 수 있는 컨테이너 전용 운반선이다. 1개 컨테이너의 길이는 6m다. 이 배가 실을 수 있는 2200개의 컨테이너를 일렬로 세워 놓을 경우 총길이는 13.2km로 경인고속도로(24km) 전체 길이의 절반에 해당된다. 기자가 선장에게 『배가 생각보다 크다』고 하자, 선장은 웃으면서 『現代상선이 운영하고 있는 선박 가운데 하이웨이號는 작은 편에 속한다』고 했다. 現代상선이 보유하고 있는 선박 중 주력은 6500TEU(20피트 컨테이너 6500개)급이며, 이미 6800TEU급 대형 선박 8척을 새로 건조하기 위해 발주해 놓은 상태라고 한다. 컨테이너船을 이용해 화물을 수송하기 시작했던 초기에는 대형 컨테이너船이라고 해야 2000TEU급이 주종을 이루었지만, 최근에는 8000TEU급의 선박이 운항 중이며, 조만간 1만TEU급의 초대형 선박도 등장할 예정이다. 現代상선 吳東秀 상무는 『아시아-美洲(미주)지역의 경우 6500TEU급의 선박이, 아시아-유럽 항로에는 5500TEU급의 선박이 투입되고, 아시아 - 中東지역 등 상대적으로 항로가 짧은 지역에는 2200TEU급 선박이 운항 중』이라고 했다. 하이웨이號는 부산港에서 주로 高價인 냉장고·텔레비전을 비롯한 家電제품과 자동차 부품과 같은 기계류, 타이어 등을 싣고 中東지역으로 수송한다고 한다. 최근 고급 텔레비전의 한 대당 수출가격은 약 600달러이며, 컨테이너 박스 1개에 텔레비전 120대 정도를 넣을 수 있다고 한다. 따라서 하이웨이號에 고급 텔레비전만 실을 경우, 약 26만 대를 실을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 텔레비전을 금액으로 환산하면, 총 1억6000만 달러(한화로 1920억원)에 달한다.
35일간 항해로 17억원 수입 하이웨이號가 한 차례 부산항에서 출발해 中東지역을 돌아 다시 부산항으로 들어오는 35일 동안 올리는 수입은 평균 약 145만 달러(약 17억4000만원)라고 한다. 여기에서 1항차에 드는 경비 70만 달러(약 8억4000만원)를 제할 경우, 75만 달러(약 9억원)의 순수익을 올리고 있다는 게 現代상선 吳東秀 상무의 설명이다. 하이웨이號가 벌어들이는 연간 순수익은 108억원에 달한다. 하이웨이號의 앞뒤 길이는 182.12m, 폭은 30.2m다. 배의 바닥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브리지까지의 높이는 53.2m이며, 갑판에서 브리지까지의 높이는 32m다. 말(馬) 2만6740마리가 동시에 끄는 것과 같은 힘(2만6740마력)을 가진 엔진에서 뿜어져 나오는 거대한 동력은 이 배를 시속 21노트(약 39km)의 속도로 앞으로 밀어낸다. 5년 전 취항한 이 배가 하루 항해하는 데 연료(벙크 C유) 80t(약 1200만원어치)이 소모된다. 하이웨이號가 기항지를 거쳐 35일간 운항하는 데 소요되는 연료비는 총 4억2000여만원이다. 이 배는 3대의 발전기를 통해 조명, 전기 등을 위한 電力을 자체 생산한다. 하이웨이號는 10월23일 새벽 0시6분 부산항을 떠나 35일간의 항해에 나섰다. 이 배가 부산항을 떠날 때 싣고 있던 컨테이너는 1383개였다. 부산항을 떠난 하이웨이號는 이날 오전 광양항에 입항해 컨테이너 288개를 싣고, 208개를 내린 뒤 오전 7시20분 臺灣(대만)의 기륭항을 향해 뱃고동을 울렸다. 그러나 도중에 태풍을 만나 기륭항에 접안을 하지 못하고, 곧바로 다음 귀항지인 홍콩항으로 들어온 것이다. 기륭항에 하역해야 할 화물은 홍콩항에 내려 놓았고, 이 화물은 뒤따라 오는 現代상선 소속 다른 컨테이너 선박에 의해 기륭항으로 운반됐다. 하이웨이號는 中國 심천(심천)의 얀티얀_싱가포르_말레이시아 포트 클랑_아랍에미리트 두바이까지 가서 대부분의 화물을 하역한 뒤 다시 파키스탄의 카라치_말레이시아 포트 클랑_싱가포르_홍콩을 거쳐 광양항에 11월25일 귀항한다는 일정을 갖고 있었다(운항도 참조). 하이웨이號는 일곱 시간 동안 홍콩항에서 컨테이너 450개를 싣고, 152개를 내린 뒤 뒤 오전 8시 정각에 다음 입항지인 중국 심천의 얀티얀 터미널을 향해 뱃머리를 돌리기 시작했다. 李映勳 선장은 손에 무전기를 들고 좌측 브리지 날개(일명 「Wing Bridge」)에서 도선사와 함께 부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브리지에서 대기하고 있던 3항사 洪鎭澤(홍진택)씨가 선장의 무전 지시에 따라 선박內 마이크를 통해 『올 스테이션, 올 스텐바이』라고 외쳤다. 이 말은 선박에 승선한 모든 승무원이 출항이나 입항에 앞서 각자 맡은 바 위치에서 입출항에 따른 준비를 하라는 것을 뜻한다고 한다. 1항사는 선박의 앞쪽, 2항사는 선박의 後尾(후미)에서 그곳의 상황을 선장에게 수시로 보고한다. 선장의 무전기도 바빠지기 시작했다. ―1항사, 1항사! 앞쪽의 상황은 어떤가? 『거리는 충분합니다. 오버』 ―2항사 선박 뒤쪽의 상황은 어떤가? 『이상 없습니다』 선장은 선박의 앞뒤쪽에 나가 있는 1, 2항사와 연신 무선교신을 하며 브리지에 있는 CC TV를 통해 선박 및 부두 상황을 체크하느라 바쁘게 움직였다. 브레이크가 없는 자동차를 운전해 주차장에 주차를 하거나 출발을 한다고 생각해 보면, 브레이크 없는 배의 접안과 출항 작업이 얼마나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하는지를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이웨이號와 홍콩항의 거리가 점점 멀어져 갔다.
거만해 보이는 홍콩港
바다에서 바라다본 홍콩항이 거만하게 보이는 까닭은 왜일까? 그것은 홍콩항이 세계 제1위의 항만이며, 앞으로도 도전장을 낼 만한 항구가 별로 없다는 생각 때문인 것 같았다. 터미널마다 빼곡이 들어찬 세계 각국의 선박, 쉴 새 없이 컨테이너를 싣고 내리는 겐트리 크레인의 손놀림, 트레일러의 소음 등이 뒤섞여 홍콩항은 부산하게 生動했다. 홍콩항은 연간 2000만 개의 컨테이너 화물을 처리하고 있다. 제4세대 선박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포스트 파나막스급(파나마 운하를 지나갈 수 있는 선박 중 최대 규모. 약 4500TEU급 이상) 선박 18척의 동시접안이 가능하며, 매주 홍콩항을 드나드는 선박은 440척에 달한다. 홍콩항은 수심 12.5~15m의 화강암반 해저로 이루어져 준설이 필요없는데다 항만 주위가 섬으로 둘러싸여 파도를 막아 준다. 홍콩항은 최근 중국 인근 항만으로부터 거센 도전을 받고 있다. 홍콩항은 매년 컨테이너 처리물량이 증가하고는 있지만, 그 증가폭은 인근 경쟁항만에 비해 낮다. 홍콩항의 연간 컨테이너 처리물량을 보면, 2002년 1860만TEU에서 2003년 10.7%(2000만TEU) 증가했고, 올해의 경우 지난 8월 말 현재 1464만TEU로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10.4% 증가하는 데 그쳤다. 반면 세계 2위인 싱가포르항의 경우, 2002년 8.2%, 2003년 14.5%, 지난 8월 말 기준 14.4%의 증가율을 각각 기록하고 있다.
세계 3, 4위로 떠오른 상해港과 심천港
홍콩항과 싱가포르항을 따라 잡기 위해 급격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는 항만이 中國의 상해항과 심천항이다. 두 항만은 中國 본토 물량의 급격한 증가세에 힘입어 현재 세계 3, 4위의 항만으로 올라섰다. 상해항은 2001년 5위에서 2002년 4위로 올라섰고, 2003년 이후부터는 3위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심천항도 2001년 8위에서 2002년 6위, 2003년 이후 4위로 뛰어올랐다. 반면, 부산항의 경우 2002년 세계 3위였던 것이 2003년 이후부터는 5위로 밀려났다. 이는 정부가 국토의 균형적 개발이라는 명목下에 부산항에 이어 광양항을 동시에 개발함으로써 부산항의 위상이 상대적으로 낮아졌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2003년 태풍 「매미」가 부산항을 강타하면서, 항만의 주요 시설인 크레인 등이 파손돼 상당기간 물량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고, 특히 화물노조의 파업으로 항만작업이 중단되면서 외국의 주요 船團(선단)이 입항지를 변경했다는 점도 부산항의 위상이 실추된 주요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과거 세계 제3위의 컨테이너 항만이었던 日本 고베港이 지진으로 큰 타격을 받았듯이 東北亞 컨테이너 허브港으로서 부산항의 지위는 위기에 처했다.
『풀 어헤드』
하이웨이號가 홍콩항을 어느 정도 빠져나와 大海 입구에 이르자 李映勳 선장은 『풀 어헤드(Full Ahead)』라고 외쳤다. 전속력으로 航進(항진)하라는 의미다. 3항사는 선장의 지시에 따라 『풀 어헤드』라고 복창하며 속도 레버를 앞으로 밀었다. 순간 배는 거친 기계음 소리를 내며 미끄러지듯 앞으로 나아갔다. 선박 조정실의 속도계는 20노트(약 37km)를 가리키고 있었다. 홍콩항도 어느덧 저 멀리 조그마한 점으로 변해 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눈앞에는 바다와 하늘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갈매기조차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그저 망망대해만이 눈앞에 펼쳐졌다. 선박의 가장 위쪽에 위치한 브리지(조정실)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비릿한 바다 냄새와 함께 불어오는 바람이 온몸을 감쌌다. 갑자기 배가 고팠다. 시계는 오전 9시30분을 막 지나고 있었다. 식사를 하고 배정된 방에서 짐을 풀었다. 이 방은 원래 통신장이 사용했었는데, 1년여 전부터 통신장의 직책이 없어지는 바람에 외부 손님이 배를 탈 경우 그들에게 제공된다고 한다. 원래 선박에서는 통신장의 역할이 중요했으나, 최근 인터넷과 전화, 위성 등 통신수단이 급속도로 발달함에 따라 통신장을 별도로 둘 필요가 없어졌다는 게 선원들의 설명이다. 기존 통신장들은 항해사로 직종을 바꾸거나 다른 직업을 택했다고 한다. 방의 시설은 예상 외로 좋았다. 소파와 책상, 텔레비전, 냉장고, 오디오가 설치돼 있는 거실과 침실은 아늑했다. 욕실에는 샤워시설까지 갖추어져 있었다. 李炳玉(이병옥) 기관장은 『매일 50t 가량의 바닷물을 퍼올려 40∼50℃ 이상의 온도에서 증류한 것이기 때문에 불순물이 없는 물』이라며 『물을 아낄 생각은 하지 말라』고 했다.
높은 빌딩들이 숲을 이룬 심천 시내
10월26일 낮 12시30분, 하이웨이號는 中國 심천항의 얀티얀 터미널 1번 선석에 접안을 했다. 배는 어느 새 111km를 항해한 것이다. 이곳에서 컨테이너 화물 423개를 싣고, 173개를 내렸다. 배가 얀티얀 터미널을 출항한 시간이 오후 8시였으니, 이 터미널에서 화물을 싣고 내리는 데 소요된 시간은 7시간 정도였다. 現代상선 吳東秀 상무와, 李俊基 과장, 그리고 기자 3명은 화물을 싣고 내리는 모습을 잠시 지켜본 뒤 얀티얀 터미널을 빠져나가 심천 시내에 들렀다. 中國 중앙정부에 의해 경제특구로 지정된 심천은 홍콩을 방불케 할 정도로 30층 이상의 높은 빌딩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간단하게 심천 시내를 둘러본 우리 일행은 오후 6시경 배로 돌아왔다. 선원들은 화물을 싣고 내리는 작업을 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였다. 선원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복도에서 만나는 선원들은 『심천이 엄청나게 발전을 했죠』, 『심천, 대단하죠? 中國이 얼마나 경제대국으로 급속한 발전을 하고 있는지 잘 아셨죠. 우리도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라는 등의 인사말을 건네며 반갑게 맞아 주었다. 이날 저녁은 오후 6시40분에 먹었다. 밥과 호박국, 그리고 쇠고기 스테이크에다 김, 오이무침, 채소, 고추를 섞은 멸치볶음이 나왔다. 후식으로는 아이스크림 「돼지바」가 나왔다. 조리원인 미얀마 국적의 앙좌우 윈氏는 기자에게 「돼지바」를 권하면서 정감어린 미소를 지었다. 하이웨이號는 10월26일 오후 8시가 조금 넘어서 2712km 떨어진 싱가포르港을 향해 심천 얀티얀 터미널을 빠져나왔다. 심천 얀티얀 터미널∼싱가포르항 간 항로는 선원들이 안심하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구간이라고 한다. 海賊(해적)들이 출몰하는 말레이시아 동남쪽, 즉 베트남 남쪽 해역까지는 특별한 사안이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밤 12시가 넘어가면서 배가 좌우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배는 여전히 시속 20노트의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배는 쉼 없이 좌우로 흔들렸다. 선박의 전후좌우로 빼곡히 쌓인 컨테이너 박스가 옆으로 넘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컨테이너 박스는 배가 흔들려도 넘어지지 않도록 안전장치가 돼 있었으나, 불안한 마음은 지울 수 없었다. 10월27일 오전 7시, 現代상선 李俊基 홍보과장의 전화를 받고 잠에서 깨어났다. 『식당으로 내려오세요. 엘리베이터는 작동하지 않으니 걸어 내려오셔야 합니다』 선박의 안전을 위해 배가 좌우로 10도 이상씩 기울게 되면 엘리베이터를 가동하지 않는다는 게 李과장의 설명이었다. 5분쯤 뒤 5개 층을 걸어 내려가 3층 식당으로 갔다. 吳東秀 상무와 李俊基 과장이 막 식사를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전기밥솥에서 밥공기에 밥을 약간 담고, 국도 담았다. 국은 두부를 잘게 썰어서 끓인 된장국이었다. 흔들리는 배에서 식사를 하자니 조금은 괴로웠다. 남중국海의 파도는 식사시간이라고 해서 봐주지 않고 배를 좌우로 흔들었다. 기자는 1항사 李一九씨에게 『선박의 앞쪽에 실려 있는 컨테이너 박스가 옆으로 넘어지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고 했더니, 한마디로 기자의 우려를 잠재워 주었다. 『배가 좌우로 40도 이상 기울어지지 않으면 컨테이너 박스는 옆으로 넘어지지 않습니다. 컨테이너 박스 1개의 무개는 15~20t 정도인 데 반해, 아래와 위쪽 컨테이너끼리 서로 맞물고 있는 힘은 약 100t에 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배가 좌우로 40도 이상만 기울어지지 않으면, 컨테이너끼리 자체적으로 물고 있는 힘이 있기 때문에 옆으로 넘어지지 않습니다. 물론 선박은 좌우로 70도 이상 기울어지지 않으면 절대 넘어지지 않지요』 10월27일 오전 9시 무렵 배는 中國 海南島 동쪽 해역을 지나고 있었다. 수심은 1700m로 깊어졌다. 3항사 洪鎭澤씨가 당번 근무를 하고 있었다. 洪씨는 童顔(동안)이었다. 기자가 洪씨에게 『애인이 있느냐』고 물었다. 洪씨는 낮은 목소리로 『있다』고 했다. 洪씨는 이 배가 부산항에 입항한 10월22일 밤 선장의 허락을 받아 한 시간 정도 애인을 만났다고 했다. 洪씨는 이 배가 다시 부산항에 입항할 때까지 35일간 애인을 만나지 못한다. 『그래도 우리는 다른 선박의 선원들에 비해 근무여건이 좋은 편입니다. 어쨌든 우리는 35일 동안 부산항을 출항해 아랍에미리트 두바이까지 갔다 오면 再항해에 나서기 위해 화물을 싣는 동안 몇 시간이라도 보고 싶은 얼굴을 볼 수 있으니까요. 유조선 선원들은 韓國에 기항하지 않고 中東과 美洲지역만을 운항합니다. 이들은 최장 11개월 가까이 한국 땅을 밟지 못합니다』 現代상선 측에서는 선원들이 1개월을 근무하면 7일간의 휴가를 준다.
배에 여자가 탄다! 오후 들어 바다는 더욱 기승을 부렸다. 파고는 4m로 높아졌다. 선원들은 아무도 높은 파도를 개의치 않았다. 쇠고기 스테이크를 주 메뉴로 한 점심을 맛있게 먹고 나자 李映勳 선장이 짬을 내 우리 일행들에게 선원들을 소개해 주었다. 하이웨이號의 선원은 모두 20명이다. 선장을 비롯한 士官(사관·해기사)급 이상은 모두 한국인이었고, 인원은 13명이었다. 나머지 일반 선원 7명은 미얀마 국적을 가졌다. 선원명단은 1항사 李一九(이일구·32), 2항사 張珍源(장진원·23), 3항사 洪鎭澤(홍진택·22), 기관장 李炳玉(이병옥·50), 1기관사 徐秉學(서병학·27), 2기관사 蔣鍾尹(장종윤·26), 3기관사 權峯石(권봉석·25), 갑판장 李重九(이중구·47), 조타수 金京撤(김경철·40)·李容赫(이용혁·56), 조기장 康基龍(강기용·48), 조리장 金相鉉(김상현·55) 등이었다. 이 배에는 뜻하지 않은 손님이 타고 있었다. 기관장 李炳玉씨의 부인 金鍾淑(김종숙ㆍ51)씨가 모처럼만에 시간을 내 남편이 일하는 배에 동승한 것이다. 金鍾淑씨는 『올해 두 딸이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해 짬을 낼 수 있었다』며 『배에서 선원들이 일하는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보고 난 뒤 남편이 얼마나 고생을 하는지 알게 됐다』고 했다. 선박의 1층에는 엔진 조정실이 있고, 2층에는 사무실, 3층에는 식당과 일반 선원들의 휴게실, 4층에는 士官 휴게실과 탁구대가 설치돼 있었다. 5층에는 도서실과 헬스장을 갖추어 놓았다.
『차기 대통령은 누가 됩니까?』 10월28일 오후 5시40분께 선장, 기관장과 함께 저녁식사를 했다. 항해사와 기관사들도 자리를 같이했다. 現代상선 측에서 마련한 「기자와 선원들 간 선상대화」 시간이었다. 돼지고기 삼겹살을 반찬 겸 안주 삼아 식사를 하면서 세상 돌아가는 얘기로 대화의 꽃을 피웠다. 소주도 빠지지 않고 식탁에 올랐다. 30여 분간 웃음꽃을 피우며 흥겨운 시간을 보내던 중 갑자기 화제가 연예계 뒷얘기로 옮겨 갔다. 대부분 해양大를 졸업하고 선원이 된 20代가 70%를 차지하고 있으니, 그들의 관심이 연예계 뒷얘기로 쏠린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인기 영화배우인 ○○○씨가 운동선수인 ○○○씨와 특별한 관계라는데 사실입니까?』, 『최근 스포츠 신문에 보도된 ○양은 누구입니까』, 『연예인을 자주 만나는지요』, 『대기업의 며느리인 ○○○양이 이혼한 진짜 이유는 무엇입니까』 등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연예가 뒷얘기와 거리가 먼 처지여서 난감했다. 복잡한 정치적 사안에 대한 질문도 많았다. 『盧武鉉 대통령은 헌법재판소의 위헌 판결에도 불구하고 행정수도를 충청도로 옮길 것처럼 언론에 보도가 되는데, 정말 행정수도가 옮겨 가는 것입니까』, 『차기 대통령은 누가 됩니까』, 『한나라당은 집권할 가능성이 있기는 한 것인지요』, 『최근 수도 이전에 관한 헌법재판소의 위헌 판결로 인해 李明博(이명박) 서울시장이 대권후보로 급부상했는데, 李시장이 정말 한나라당의 大選 후보가 되는 것입니까』 새벽 1시가 조금 넘어서 브리지로 올라갔다. 배는 남중국海의 베트남 동남쪽 해상을 지나고 있었다. 4m를 오르내리던 파도도 다소 잠잠해졌다. 수심은 2700여m. 브리지 문을 열고 「윙 브리지」로 나가니 습도가 높은 더운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이 피부에 와 닿자 끈적끈적한 느낌이 들어 이내 브리지 안으로 들어오려다 우연히 하늘을 바라보았다. 달이 보였다. 달은 구름 사이를 헤치며 한동안 배를 따라오면서 길동무를 해주었다. 10월29일 오전의 날씨는 38℃를 오르내리며 여전히 후끈거렸다. 점심을 시원한 냉채국에다 야채를 곁들인 새우튀김과 함께 고추장을 밥 위에 얹어 비빔밥을 해먹었다. 점심식사를 하고 난 뒤 브리지로 올라가니 창 밖으로 가는 비가 내렸다. 내리는 비가 좋아 브리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비를 맞으면서 바다를 바라보니 갑자기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이라는 노랫가사가 떠올랐다. 「나그네 설움」이라는 유행가다. 물론 하이웨이號는 「정처 없이」 남중국海를 헤매고 있는 것은 아니다. 분명한 목적지가 있다. 그러나 바다와 하늘, 그 사이를 헤쳐 나가는 하이웨이號만이 눈앞에 보이는 물체의 전부이고 보니, 「정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10월29일 오후, 「해적 비상」이 걸렸다
10월29일 오후 4시가 지나면서 갑자기 선장을 비롯한 선원들의 표정이 바뀌었다. 배가 海賊 출몰 지역을 지나가게 된 것이다. 李映勳 선장은 전자 해상도와 망원경을 들여다보면서 연신 앞뒤좌우의 선박들을 파악하기에 분주했다. 말레이시아 동쪽 해안과 말라카 해협이 끝나는 말레이시아 서쪽 공해상 일대는 해적들이 자주 출몰하는 지역이라고 한다. 하이웨이號의 양측 서치 라이트에 불이 켜졌다. 말레이시아 해상안전을 담당하는 부서와의 교신을 위한 무전기에 전원이 들어왔다. 선장과 1항사, 2항사, 3항사의 손에 무전기가 들려 있었다. 조금만 수상한 선박이 보여도 선장과 선원들은 그 선박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분주하게 무전을 날렸다. 하이웨이號에 「해적 비상」이 걸린 것이다. 海圖(해도)에는 최근 해적들이 출몰했던 상황이 자세하게 표시돼 있었다. 지난 10월에만 이 해역에서 3건의 해적 출몰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10월2일에는 해적들이 이 해역을 지나는 컨테이너 선박을 향해 총을 쏴 선박의 유리창이 여러 장 파손됐으나, 선박의 즉각적인 대응으로 인해 해적들이 선박에 올라오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10월3일에도 총으로 重무장한 해적들이 컨테이너 선박을 대상으로 노략질하려다 실패했고, 이 배가 부산항을 떠났던 10월23일에도 이 해역에서 유사한 사건이 발생했다고 한다. 李映勳 선장은 해적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해적들은 자동소총은 물론, 로켓포까지 갖추고 있습니다. 이들은 시속 60노트까지 달릴 수 있는 초고속 소형 선박을 이용해 말라카 해협을 지나는 선박들을 대상으로 노략질을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해적들이 선박에 올라오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重火器(중화기)로 무장한 해적들이 선박에 올라오면, 그때부터는 대응할 방법이 없게 되는 것이죠. 우리는 국내법에 따라 선박에 총기류를 보유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해적들은 일단 선박에 올라오기만 하면, 선장실의 금고에 보관된 운항경비나 선원들의 개인적 물품 등 닥치는 대로 털어 간다고 한다. 심지어는 선박 자체를 납치해 인근의 섬으로 끌고 가 해체한 뒤 고철로 팔기도 한다는 게 李선장의 설명이다.
해적은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 영세민 말라카 해협 일대에 해적들이 들끓는 것은 이 지역에 크고 작은 섬이 많기 때문이라고 한다. 섬에 숨어 있다가 이 일대 해역을 지나는 선박에 접근을 하기가 쉽다는 것이다. 해적들은 대부분 인도네시아나 말레이시아의 영세민들이라고 한다. 重무장을 한 해적들에 대한 선박의 대응방식은 실로 무모하기까지 하다. 해적들이 선박에 올라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선원들의 최선의 대응방식은 물 호스를 통해 이른바 「물대포」를 쏘는 것이 고작이다. 어떤 선박은 해적들을 방지하기 위해 허수아비를 만들어 배의 뒤쪽과 옆쪽에 세워 두기도 한다. 선장들은, 해적들이 선박에 올라왔을 때를 대비해 선장 침실에서 자지 않고 다른 선원들의 침실을 옮겨 다니면서 자기도 한다. 선장 침실에 보관하고 있는 금고를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선장의 침실內에 있는 금고에는 항상 3000만∼4000만원의 운항경비가 보관돼 있다. 10월29일 오후 9시가 넘어서면서부터 말라카 해협을 지나기 위한 선박들의 數(수)가 20여 척으로 늘어났다. 「물대포」를 쏘면서 항해하는 배들도 있었다. 하이웨이號는 1차로 해적들의 출몰지역인 말레이시아 동쪽 해역을 무사히 지나 10월30일 새벽 1시쯤 싱가포르 당국의 경계해역에 도착했다. 싱가포르港 입항을 위해 도선사가 배에 올랐다. 도선사의 지시에 따라 배는 서서히 세계 제2위의 항만인 싱가포르港으로 접어들었다. 새벽 2시쯤 싱가포르港 1번 선석에 배가 무사히 접안하자, 선원들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선원들은 쉴 틈이 없었다. 곧바로 컨테이너를 옮겨 싣고 내리는 작업이 진행됐기 때문이다. 선원들 대부분은 지난 밤 해적들에 대한 경계근무로 지칠 대로 지친 몸을 이끌고서 컨테이너를 옮겨 싣고, 기름을 채우고, 선용품을 공급받기 위해 아침식사도 거른 채 바쁘게 움직였다. 하이웨이號는 싱가포르항에서 컨테이너 430개를 싣고, 133개를 내린 뒤 10월30일 낮 12시 다음 항구인 말레이시아의 클랑港을 향해 닻을 올렸다. 최대 적재량까지 화물을 실은 배는 말라카 해협을 따라 클랑港까지 390km를 운항해야 한다. 말라카 해협은 말레이시아 동쪽 끝에서부터 싱가포르를 거쳐 말레이시아 서쪽 및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전체 해협의 길이는 약 800km에 달한다. 말라카 해협은 세계 총선박 물동량의 25%를 싣고 다니는 연간 5만 척 이상의 각국 商船들이 이용하고 있고, 세계 50%의 原油가 이 해협을 통해 공급되고 있다. 이 해협은 멕시코 파나마 운하와 더불어 세계 2大 해협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사용되는 원유 수입량의 90%가 말라카 해협을 통해 수송되고 있고, 유럽지역으로 수출되는 우리나라의 제품 대부분이 이 해협을 이용해 운반되고 있다. 말라카 해협은 수심이 20m 정도로 얕은데다 해상교통량이 많아 선박들이 운항 속도를 제대로 낼 수 없다. 해적들에게는 이같은 단점이 노략질을 하기에 아주 적합한 장점인 셈이다. 실제 2003년 발생한 세계 445건의 해적사고 중 35%(156건)가 말라카 해협에서 발생했다. 여기에다 최근에는 中東지역 테러세력과 이 지역 해적들 간 연계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이슬람 테러세력이 폭탄을 적재한 船團(선단)을 운영하고 있다는 첩보가 입수되고 있다고 한다.
하이웨이號 선원들의 13시간에 걸친 해적과의 전쟁 하이웨이號 선원들의 「해적과의 전쟁」은 배가 싱가포르港을 떠나 말레이시아 제1의 항구인 클랑港에 입항까지 13시간 동안 계속됐다. 배가 클랑港에 무사히 닻을 내린 것은 10월31일 새벽 1시였다. 배가 싱가포르港을 떠나 말레이시아 클랑港에 도착하기까지 말라카 해협을 이용해 390km를 항해하는 동안 선원들은 단 한 시간도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말라카 해협은 폭이 좁을 뿐 아니라 크고 작은 섬들이 있어 배가 정상속도로 운항을 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이 뒤따른다. 그런데도 李映勳 선장은 배의 속도를 시속 10∼21노트로 유지할 것을 지시했다. 속도가 느려질 경우 해적들의 표적이 될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선원들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말라카 해협에 밤이 찾아오기 시작한 10월30일 오후 6시부터는 본격적으로 해적들과 전쟁을 치를 준비에 들어갔다. 배의 앞뒤좌우에 설치돼 있는 서치 라이트에서 불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배의 뒤쪽과 좌우 측에는 이른바 「물대포」가 설치됐다. 해적들이 船上에 올라오지 못하도록 물을 쏘아대는 게 선원들로서는 최선의 대응책이기 때문이다. 날씨까지 돌변해 거센 빗줄기가 배 위에 쏟아졌다. 배의 뒤쪽과 좌우 측에 설치된 물 호스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줄기와 빗줄기가 뒤엉켰다. 밤을 꼬박 샌 선원들은 파김치가 돼 있었다. 선원들의 작업복에서는 빗물과 바닷물을 흠뻑 머금은 듯 물이 뚝뚝 떨어졌다. 『고생이 많았다』는 기자의 말에 李一九 1항사는 『잠을 못 자서 어떻게 하느냐』며 도리어 기자를 위로했다.
흔들리는 육지 우리 일행은 10월31일 새벽 3시께 잠자리에 들어 오전 6시에 일어났다. 짐을 챙기고 下船(하선)할 준비를 하기 위해서였다. 눈을 뜨고 커튼을 젖혔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선원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선원들은 우리 일행이 잠든 사이에도 화물을 싣고 내리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었다고 한다. 10월31일 오전 7시 짐을 챙겨서 船內 2층 사무실로 내려갔다. 李映勳 선장과 李一九 1항사, 洪鎭澤 3항사 등이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 『이제 헤어질 때가 되었나 보죠?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한국 발전을 위해 우리 선원들도 어느 정도 몫을 하고 있다는 것도 국민들에게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李映勳 선장이 웃으면서 손을 내밀었다. 기자는 선원들과 일일이 작별인사를 한 뒤 배에서 내렸다. 5박6일 만에 밟아 보는 육지였다. 그러나 육지가 흔들리는 듯했다. 이날 오전 7시30분 하이웨이號는 또다시 뱃고동을 울리며 말레이시아 클랑港을 떠날 채비를 차렸다. 우리 일행은 부두內에까지 마중을 나와 준 現代상선 말레이시아 파견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승용차에 올랐다. 선원 몇몇은 뱃전에 서서 부두를 빠져나가는 우리 일행의 승용차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하이웨이號 선원 20명은 이제 다음 기항지인 아랍에미리트 두바이港까지 7일간에 걸친 긴 항해에 들어가게 된다. 운항거리만도 6161km에 달한다. 하이웨이號는 두바이를 떠난 뒤엔 파키스탄의 카라치港을 거쳐 다시 말라카 해협을 지나 한국으로 귀항하게 된다. 선원들은 이때 다시 한 번 해적들과의 전쟁을 치러야만 무사히 귀항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