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쑤성의 마지막 도시 핑량(平凉)을 지나 닝샤후이족자치구(宁夏回族自治区) 남단으로 들어선다. 26개의 성(省)(21개의 성과 5개의 자치구)중 가장 가난한 자치구로 알려진 곳이다. 북서부에 위치해 기후가 혹독하기로 유명하다.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폭염으로 관개시설이 필수적이다. 닝샤후이족자치구에 황하가 없었다면 사람이 살지 못했을 만큼 척박한 곳이다.
인구의 3분의 1이 후이족(回族)이고, 나머지는 한족이다. 소수민족인 후이족은 이슬람화된 한족으로 7세기 당나라 때부터 13세기 원나라까지 중국에 유입됐던 아랍과 이란, 투르크계 상인들의 후손이다.
후이족으로 불리게 된 배경은 중국과 무역하던 이들이 추운 겨울이 되면 따뜻한 중동지방으로 갔다가 날씨가 풀리면 중국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돌아올 회(回)’를 붙여 후이족으로 불리게 되었다. 후이족 대다수는 지금도 이슬람을 고수하고 있지만 장기간 혼혈과 통혼으로 전반적으로는 한족문화에 동화되었다고 한다.
황하의 상류 지역에 위치한 닝샤자치구의 남부는 황토고원(黄土高原)과 리우판산(六盤山)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북부는 황하 유역의 닝샤평원(寧夏平原)이 대부분이다.
기후는 건조하지만 2000여 년 전 진한(秦漢)시대부터 황하의 물을 끌어대는 관개수로가 발달하여 ‘새북(塞北-북쪽 변방)의 강남(江南)’으로 알려질 만큼 오랫동안 농경을 주로 했던 지역이었다.
춘추시대(春秋時代, 기원전 770~403) 때 중원 진출을 꿈꾸던 진목공(秦穆公)을 도와 진(秦)나라를 통일에 공헌했던 백리해(百里奚)는 이곳을 일컬어 "산세는 들개와 같고, 들판은 긴 뱀이 뻗은 것과 같은 이곳(陕西省과 甘肅省 일대)을 주(周)나라는 지키지 못하고 진(秦)나라에 내주고 말았으니 그것이 하늘의 도움"이라며 "주변의 수십 개의 오랑캐들을 복속시켜 그 백성을 모으고 농사를 지어 식량을 조달할 수 있다면 중원(中原)의 어떤 나라와도 싸울 수 있다"며 이른바 서방패권론을 주장했다. 그만큼 그 옛날에도 농사짓기 좋은 곡창지대였고 중원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교두보였다.
실크로드의 주역이었던 이들은 한때 ‘하늘아래 황하의 부(富)는 닝샤에 있다(天下黃河富寧夏)’라고 할 정도로 전성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중국의 주인이 수도 없이 바뀌는 역사의 부침은 후이족에게도 그대로 흥망성쇠가 되었다.
청나라 때는 반이슬람정책으로 박해를 받자 태평천국의 난(1851~1864년)으로 혼란한 틈을 타 이슬람교도들이 종교적, 민족적 반감으로 둥간의 난(東干反亂 1862년-중국계 무슬림인 둥간(東干)과 위구르인들이 일으킨 반란)을 일으켜 반군정부를 수립하지만 1877년 청(淸)의 쭤쭝탕(左宗棠, 1812~1885 : 청나라의 정치인, 군인. 청나라 말기에 이홍장, 증국번과 함께 군사중심의 근대화운동인 양무운동(洋務運動)의 실질적 지도자)에 의해 무참히 진압 당한다. 당시 후이족은 중국 전역에서 1200만 명이 살해당하거나 주변국으로 탈출하면서 급격히 쇠락하고 닝샤는 암흑기를 맞이한다.
식량을 자급할 수 있는 비옥한 토지와 풍부한 광물자원을 보유하고 있으나 불리한 교통여건, 기초 산업기반 미비 등으로 오랫동안 낙후되어 한때는 구이저우(貴州), 칭하이성과 함께 가장 가난한 자치구 중 하나였다.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선 이후, 1958년 빠오터우(包頭)∼란저우 철도가 완공되면서 고립에서 벗어날 기회를 잡았지만 결과는 순탄하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 정부의 꾸준한 지원으로 닝샤후이족자치구(宁夏回族自治区)는 새로운 전기를 맞고 있다.
신실크로드인 일대일로사업이 추진되면서 그 옛날 실크로드의 주인이었던 닝샤지역과 후이족이 새롭게 주목받게 된 것이다.
최근에 건설된 바오웨이철도는 바오지(保鷄)에서 중웨이(中衛)까지 운행한다.
인촨(银川)과 바오지, 란저우 사이에는 고속도로가 있으며, 베이징(北京), 시안(西安), 타이위앤(太元) 등 중국의 주요 도시로 통하는 항공편들이 늘어나는 등 교통편이 개선되면서 서서히 닝샤의 저력이 발휘되고 있다.
십팔리진(十八里鎭) 톨게이트를 지나자마자 란저우로 연결되는 고속도로를 만난다. 500㎞에 이르는 지옥 같은 국도에 지친 사람들이라면 환호성을 지를만하다. 그러나 란저우 가는 고속도로 위에서도 황토고원의 명물 다랑이 논의 파노라마는 끝나지 않았다. 멀리서 보는 계단식 논과 밭에는 능선을 따라, 산길 가는대로 가느다란 길이 나 있다.
산책길 같은 그 길을 따라 농부들은 해발 수 백 미터를 오르내리며 오늘도 농사를 지으러 다닐 것이다. 그 실 같은 길을 보면서 농심을 천심으로 알고 살아가는 이들의 순수와 행복을 느꼈다면 지나치게 감상적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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