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즈를 지나 10여 분 쯤 더 가면 빠이(八一镇)에 이른다. 빠이는 린즈 지역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도시다. 도시 초입에 진입하자 가장 먼저 눈에 든 것은 거대한 화강암으로 조각한 야크석상이다. 이 조형물은 예전에는 없던 것으로 압도적인 인상을 준다. 빠이시가 변하고 있음을 직감한다. 빠이시 중앙에 위치한 샤먼(厦門)광장부터 깔끔하고 시원하게 정비된 도시는, 과연 이곳이 티베트 지역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현대적이다. 빠이는 원래 ‘라르가(拉日伽)’라고 하는 조그마한 촌락이었다. 1951년 중국인민해방군이 주둔하면서 발전을 거듭해 지금의 린즈시(林芝市, 2015년 3월 린즈지구에서 린즈시로 행정구역을 개편했다)의 중심도시가 됐다. 그래서 도시 이름도 인민해방군 창군기념일 8월1일을 상징해 빠이(八一)로 정했다. 린즈와 함께 신흥공업도시라고는 하나 질서정연한 도시풍경에서 공업도시라는 느낌은 찾아 볼 수가 없다.
오히려 티베트 남부의 물류와 유통 중심지로 보는 것이 여행자에게는 설득력이 있다.
주변 지역에서 공수된 온갖 특산품과 고원지대에서 생산되는 동충하초(冬虫夏草), 체내 노폐물 제거에 탁월하다는 티베트의 샤프란인 장홍화(藏红花) 등 신기한 약재와 차가 집산되는 곳으로 좋은 상품을 저렴하게 살 수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인구 48,700여명(2017년 기준) 정도가 사는 도시답게 중심가는 번듯한 공안국 건물, 지역 군부대 사령부 그리고 한족이 장악한 시내 식당가가 철옹성처럼 구축되어 있다.
티베트인의 고장 빠이에서 티베트인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다. 한족, 그들만의 도시라는 인상이 훨씬 강하게 변모한 것이다.
라싸로 가는 길에 언제부터인가 니양하(尼洋河)가 에메랄드빛을 반짝이며 따라오고 있다. 라싸로 가는 길의 마지막 고개 미라쉐산(米拉雪山, 해발 4900m)에서 발원한 니양하는 얄룽장뿌강의 5대 지류 중 하나로 촨짱꽁루와 함께 라싸까지 동행한다.
니양하는 광막한 고원의 생김새를 거스르지 않는다. 산과 산 사이는 살같이 흐르다가 넓은 벌판에서는 수줍은 처녀처럼 고요하게 흐르며 정겨운 산수를 만들어낸다.
강을 따라 병풍처럼 늘어선 백양나무의 단풍은 여행객의 피곤함을 잊게 할 정도로 아름답다. 이 니양하를 거슬러 올라가다 만나게 되는 마을이 있다. 바로 니양하를 젖줄 삼아 자리한 콩포기얌다(工布江達, Kongpo Gyamda)현의 아페이마을(阿沛村)이다.
이 마을이 주목 받는 것은, 1954년 인민정치협상회의(政協) 1기 정책자문기구위원으로 선출된 이후 2008년 11기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약칭 政協)의 부주석을 지낸 티베트 출신 ‘아페이 아왕진메이(阿沛 阿旺晋美 -티베트 귀족가문 출신이자 티베트지역 사령관 출신으로 중국인민해방군에 체포된 후에는 자발적으로 공산정부에 협력했다. 소수민족 출신으로 비록 보조적이며 명목상의 위치를 가지는데 불과했으나, 토착지역에서는 권력자였고, 중국정권의 후견으로 때때로 가공할 정치권력을 행사했다.)'의 고향인 까닭도 있다. 아페이는 중국이 침략하기 전 이 지역의 총독이었다.
그러나 1951년4월 중국과 조약을 체결할 당시 달라이라마의 위임을 받은 티베트협상단 대표 5인 중 수석대표였으나 오히려 중국에 협력하면서 배신의 길을 걷는다. 이후 중국정부로부터 영웅칭호와 함께 중국중앙위원회의 위원으로 입신하는 등 티베트인 출신 중에서 가장 성공한 인사가 됐다. 2009년12월, 99세로 사망할 때까지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부주석으로 영향력 있는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아페이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동네사람에게 물었더니, "이 지역에 수력발전소와 다리를 놓아 주어 고맙게 생각한다."고 한다.
예전 아페이의 영주시절과 비교해 가장 많이 바뀐 것이 무엇인가라고 좀 짓궂게 물었더니 한참을 망설이던 젊은 처녀는 "1949년 해방(중국의 티베트 점령) 전까지만 해도 이 일대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코걸이에 족쇄까지 한 노예 신분이었는데 해방 후 그런 것이 사라졌다."고 한다.
그 말 속에 숨은 뜻을 곱씹어 본다. 어쩜 이들은 중국이니 티베트니 하는 국가개념보다도 누가 인민들에게 잘 해주느냐가 더 소중한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모를 일이다. 티베트의 젊은 처녀는, 중국이 티베트 침공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해방'이라는 단어를 전혀 거리낌 없이 쓰고 있었다.
중국인민해방군의 침략 후 피지배자가 된 티베트인에게 공산당체제는 잔혹했을 것이다.
그러나 1959년 이전 티베트 사람들은 95%가 인신매매가 가능한 노예 신분이었다. 대부분의 농민들은 사원에 속한 노예였다. 사원이 그들의 생사여탈권을 갖고 있어서 죄를 지으면 산채로 가죽을 벗기거나 눈과 혀를 뽑는 야만적인 처벌을 했다. 누가 그렇게 했던가? 바로 중생을 긍휼히 여겨야 할 승려들이었다. 승려와 일부 귀족계급들만의 천하였던 티베트는 결과적으로 근대를 경험하지 못하고 절대적 신정봉건국가에서 식민지가 되었다. 사정이 이러하니 티베트 인민들은 오히려 나라를 빼앗은 침략자 중국이 아니라 배고픔과 노예해방을 시켜준 구세주라고 느낄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아페이마을은 우리가 지나 온 수 백 킬로미터에 이르는 동부 티베트 지역에서 느낌과는 확연히 다른 마을이었다. 두메산골의 이 조그마한 마을에는 낯선 빌라식 건물과 마을회관, 포장도로에서 아페이의 그림자가 보인다. 아페이는 어쩌면 티베트 동포와 고향에 진 마음의 빚을 갚으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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