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싸는 중국 침략 이후 많은 것들이 훼손되고 바뀌었지만 여전히 티베트의 정신적인 고향이다. 라싸를 뺀 티베트는 생각하기 어렵다. 티베트 제국의 수도였던 태양의 도시 라싸는 포탈라궁(布達拉宮)이 솟아 있는 마르포리(Marpori, 紅山- ‘붉은 언덕’이라는 뜻) 언덕을 중심으로 키츄강(Kyi-Chu, 얄룽장뿌강 지류의 하나, 라싸강(拉萨河)이라고도 함)을 따라 동서로 길게 뻗은 그리 크지 않은 도시다. 어스름 저녁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을 때의 라싸는 포탈라궁만 있는 것처럼 보인다.
처음 보는 이들을 압도하는 규모와 위엄이 거의 압도적이다. 그러나 가로수만한 가로등이 포탈라궁 앞 어둠을 밝혀 주고 있지만 크기나 생김새가 흉물스러워 여간 눈에 거슬리는 것이 아니다. 세계 7대 불가사의라는 문화재와는 격이 맞지 않는 장식이다. 하긴 포탈라궁 앞에 있던 연못을 메워 인민광장이라는 공룡을 만들어 놓은 터에 고작 가로등이 문제랴?
대부분의 외국인 방문객들은 가장 티베트다운 풍경을 만나기 위해 라싸를 찾는다. 그러나 조캉사원, 세라사원, 데뿡사원(드레풍사원) 등 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은 물론 티베트인들이 천년 넘게 삶을 이어 온 구시가의 티베트 전통구역도 4% 정도 밖에 옛 모습이 남지 않았다고 걱정한다. 점령국 중국에 의해 너무 빨리 현대화가 진행된 까닭에 전통과 멋이라는 예스러움을 빼앗겨 버렸다.
1987년만 해도 라싸 인구의 75%는 티베트 원주민이 차지했다. 지금은 한족이 더 많다. 자신들의 영토에서 소수민족이 되어버린 것이다. 어둠이 깊어지면서 하나 둘 켜지는 네온사인 불빛 속에 라싸에는 중국이라는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음을 느낀다. ‘시짱자치구(西藏自治區)’라는 이름하에 자치도 보장되고 출가도 되고, 무너진 사원은 중국정부의 지원 하에 계속 복원 중이라고는 하지만 천년 불교왕국의 정점 라싸는 그 본 모습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이른 아침 포탈라궁(布達拉宮)입구는 벌써 수많은 순례자와 관광객들로 만원이다.
포탈라궁의 외국인들의 입장은 시간대별로 출입인원이 엄격하게 제한됐기 때문이다.
“예약은 하셨나요?”
“녜”
“그러면 티켓주세요”
“가방은 X-ray 검색대에 올리시고, 라이터는 바구니에 넣고 나갈 때 찾아 가세요”
매표소 직원은 태도는 간단명료 그리고 단호하다.
포탈라궁을 보려면 외국인들은 성수기(4~10월)에는 최소한 일주일 전에 예매를 해야 표를 구할 수 있다고 한다. 포탈라궁과 문화재를 보호하기 위해서 하루 입장객(현지인은 누구나 출입 가능하다)수를 제한하고 있기 때문이다. 2006년도에 칭짱열차 개통 후 하루 입장객 정원이 조금씩 늘어나더니 최근에는 2000명까지 늘어 표를 구하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가 되고 있다. 입장료도 슬금슬금 오르더니 2012년 6월 1일부터 200위안(5~10월 성수기, 비수기인 11~4월은 100위안)으로 두 배를 인상했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人民日報)의 자매지인 환구시보(環球時報) 조차 바가지요금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할 정도다. 비싼 것은 둘째로 치고 일정이 빠듯한 외래객이 입장권을 구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현지인에게 부탁이라도 할라치면 수수료도 고려해야 한다.
포탈라궁은 언제 만들어 졌을까?
티베트 건축의 정수로 손꼽히는 포탈라궁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지어진 궁전이다. 7세기경 티베트를 통일한 송첸감포가 라싸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훙산(紅山) 위에 축조했다.
641년에 토번(吐蕃)왕국의 송첸감포 왕이 당나라에서 시집온 아내 문성공주(文成公主)와 살기 위해 처음 지었다고 알려졌으나 이전에 이미 완성된 건물이 있었고 그 이름도 훙산궁전이라 불렸다는 주장도 있다. 당시 문성공주와 네팔의 브리쿠티 데비(Bhrikuti Devi)공주가 사용한 별채 2개는 현재 포탈라궁에 포함되어 유일하게 현존하고 있다.
훙산궁전은 토번왕조가 멸망하면서 파괴되었으나 17세기에 들어서 제5대 달라이 라마가 개축했다. 당시 티베트를 지배하고 있던 몽골제국의 구스리 칸(Gushri Khan, 1582~1655)에게 티베트에 종교, 정치적인 통치를 할 수 있는 권한을 인정받은 후, 수세기 동안 지방으로 분산 되어 있던 티베트의 권력을 중앙으로 집중시킬 수 있었다. 1642년, 제5대 달라이 라마인 아왕 롭상 가쵸(阿旺洛桑嘉措, 1617-1682)를 왕으로 하는 티베트 왕조 간덴왕국이 마침내 성립된다. 티베트 최초로 정교합일(政敎合一)의 권력이 시작된 것이다.
달라이 라마는 원래는 데뿡사원(Drepung Monastery)에 거처했으나 다시 통일되면서 정치, 종교적으로 상징성 있는 포탈라궁의 필요성이 대두된다. 현재의 포탈라궁이 1645년에 개축을 시작하여 1653년에 백궁이 완성되면서 정부를 이전하게 된 것이다.
이로써 포탈라궁이 티베트 권력의 중심이 되었다.
역사적으로 송첸감포를 시작으로 14대 달라이라마가 인도로 망명하기까지 약 1,300년에 걸쳐 9명의 티베트왕과 10명의 달라이라마가 머물렀던 곳으로 명실 공히 티베트의 상징이다.
문화혁명 때 홍위병에 의해서 파괴될 뻔 했으나, 당시 홍위병의 무차별한 문화유산파괴를 저지하는데 큰 역할을 한 저우언라이(周恩來)의 사병들이 지켜서 간신히 파괴를 피할 수 있었다. 이후에도 티베트를 대표하는 건축물로 수많은 방문객이 찾아드는 곳이지만, 티베트 독립운동으로 인해 정치적 풍파에 민감한 곳이다. 관람 시 지정된 코스로만 다녀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근래에는 잦은 소요로 인해 아예 방문이 금지되거나 제한개방이 다반사다.
오로지 흙과 돌과 나무로만 지었다는 포탈라궁은, 동서의 길이가 360m에 이르고 가장 높은 건물이 13층으로 높이가 117미터 이른다. 이 외에 1천여 개의 방이 있다.
크게 두개의 궁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하나는 좌측의 백궁(Potrang Karpo)과 우측의 홍궁( Potrang Marpo)이다. 송첸감포왕이 세웠던 훙산궁전 터에 조성된 백궁은 달라이라마가 거처하는 곳으로 정치의 중심지이다. 홍궁은 역대 달라이라마 여덟 분의 유체가 모셔져 있는 영탑과 달라이라마의 전용사원, 대학, 대법당, 밀실, 식량저장실 등이 다양하게 꾸며져 있다.
멀리서 보는 포탈라궁은 마치 수많은 벽돌이 층층이 쌓여 있어 견고하고 의연함을 느끼게 한다. 하얀 화강암으로 구축된 건물 하단과 짙은 자색의 상단 외벽은 철옹성 그 자체로 백색과 자색만으로 어우러진 포탈라궁은 그 단순함만으로 신비로운 색채를 뿜어내고 있다.
이제 그 전모를 확인해 볼 시간.
포탈라궁 입장은 티켓을 사는 것도 어렵지만 입장도 어렵다. 입구부터 X-ray검색이 철저하다. 앞일이 녹록치 않음을 직감하게 된다. 입장객을 제한해도 통제된 공간과 감시, 빡빡한 일정 때문에 마음 놓고 감상할 수 없다. 가는 곳마다 줄서기는 다반사다. 혹시 제대로 보지 못하면 어쩌지 하는 초조함과 불안감은 관람 내내 마음을 짓누른다.
두 번째 검표지점인 무자비검표점(無字碑檢票点)을 지나자 비석이 하나 서있다. 글자가 하나도 없는 그야말로 ‘무자비(無字碑)’다. 1693년 홍궁 준공을 기념으로 세운 비석이라고 한다. 종파간의 갈등을 없애라는 의미에서 아무런 글자를 새기지 않았다고 한다.
이 무자비를 기준으로 오른쪽 궁으로 올라가 살았던 사람들은 지금으로 치면 4급 이상의 고관대작들이고, 왼쪽 내리막 끝에 조성된 건물은 서민들이 살았던 곳이다. 옛날에는 정부의 부속건물과 조폐창, 감옥, 홍등가도 있었다.
‘중국인들이 티베트의 정신을 말살하려고 포탈라 앞에 홍등가를 세웠다’라는 일부의 주장은, 중국이 점령 한 이후 새롭게 생겼음을 의미한다. 물어볼 일이다.
70미터 쯤 오르막길을 더 올라 4대 금강이 그려진 동대문(東大門)이 바로 홍궁(종교 의식을 치르는 곳)의 시작이다. 4미터 두께의 대문을 지나면 드디어 대궐에 들어선다. 이곳에 역대 달라이라마의 영탑과 탑전(塔殿)들이 모셔져 있다. 이 입구부터 관람시간이 카운트된다. 제한된 시간 50분 동안에 1300여 년의 티베트역사와 달라이라마의 생애를 경험해야 한다.
포탈라궁에는 1천개 이상의 방이 있지만 관광객에게 공개하는 곳은 홍궁(紅宮)의 1, 3, 4층중에 30여개 정도로 아주 제한적이다. 대부분의 방은 관광객들이 들어갈 수 없게 자물쇠로 채워져 있었고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정해진 길을 가는 수밖에 없다. 개인 관람객은 표시된 화살표를 따라가면 큰 무리가 없다. 관광객을 위해 단 하나의 코스만 설계되어 있다. 길 잃을 염려는 없지만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는 자유도 없다.
여행객에게 개방되는 전당(殿堂)과 문화재도 때에 따라 바뀌는데 가장 중요한 몇 개의 궁전은 변함없이 참관 가능하다. 촬영은 전면 금지되어 있다. 예전에는 사진 촬영을 하고 싶으면 각 방마다 따로 촬영료를 내면 됐는데 요즘은 그마저도 금지하고 있다. 빠릿빠릿한 젊은 요원들이 감시하는 바람에 도둑촬영은 엄두를 낼 수가 없다. 관람하는 시간이 최근에는 50분으로 줄었다. 물론 홍궁을 입장하는 순간부터이니 생각보다는 여유가 있다. 그러나 볼 것이 많은 포탈라궁을 하나라도 더 보려면 여간 바쁘게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된다.
홍궁 1층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달라이라마 5세 황금 영탑과 총카파가 모셔진 방, 그리고 큰 만다라가 전시된 방이다. 규모가 크면서도 섬세한 만다라의 세계는 혀를 내두르게 한다. 특히, 안치된 8개의 역대 달라이라마 영탑(靈塔) 중 가장 크고 화려한 것으로 알려진 5세 황금 영탑은 인상적이다 못해 황홀하다. 약 15미터 높이에 황금과 진주와 비취 등 수 만 개의 보석으로 장식됐다. 정교일치의 통치이념을 수립하고 티베트라는 국가의 틀을 다졌을 뿐 아니라 지금의 포탈라궁을 재건축한 달라이라마 5세 '아왕 롭상 갸쵸((阿旺洛桑嘉措, 1617~1682)의 뛰어난 공적을 기리기 위해서라고 한다. 달라이라마나 판첸라마 같은 영적지도자가 죽었을 때 미라형태 또는 화장(火葬)한 뼈 등을 모시는 이러한 영탑장(靈塔葬)은 칭짱고원에만 있는 티베트의 보물이자 유일무이한 세계문화유산이라는 의미도 있다.
티베트의 유산은 지하수장고에도 수십만 점의 불상과 유물이 아직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중국과 정치적인 이해관계로 인해 대부분은 일반에게 공개하지 않고 있다. 사실 300여 년 동안 티베트의 정치, 종교를 관장했던 유서 깊은 곳이지만, 달라이라마 14세가 인도로 망명한 1959년 이후 오랜 동안 폐쇄해 왔다. 박물관이나 관광지처럼 개방(1980년)한 이후에도 달라이라마가 거처하던 백궁은 철저히 문단속을 하고 있다. 티베트인들에게 달라이라마가 어떤 의미인지 잘 아는 중국으로서는 그의 존재가 부담스러울 것이다.
궁의 내부는 미로처럼 얽혀 있어서 어디로 가야할 지 고민하게 된다. 실내의 조명이 어둡고 야크 기름으로 태우는 초들이 연출하는 은은한 분위기가 그럴싸하지만, 무수한 초들이 내뿜는 냄새와 수많은 관광객들과 어쩔 수 없는 몸싸움에 한숨을 짓기도 한다.
관광객들이 가장 선호하는 공간은 옥상이었다. 전망도 좋고 비교적 자유롭게 기념촬영도 할 수 있었다. 지금은 그것도 바뀌었다. 감시원들이 상주하면서 일체의 촬영을 금지하고 있었다. 홍궁의 옥상은 달라이라마 14세가 뛰어놀던 곳이다. 건물 안은 안내문을 걸어놓지는 않았지만 달라이라마가 수행을 쌓던 곳, 어머니를 만나던 곳, 중국의 고위층인사 등 외빈을 맞이했던 자리 등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설명이 없어 그저 그런 곳인가 보다 하고 지나치는 유서 깊은 곳이다.
임자를 잃은 방은 어두침침하고 때 묻은 가구와 빛바랜 비단 침구가 티베트의 현재를 말하고 있었다.
옥상에서 본 포탈라궁은 또 다른 모습이다. 옥상에서는 라싸 시내의 모습이 한눈에 보인다.
성(城)의 해자(垓字-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주위를 둘러서 판 연못)를 매립하고, 베이징의 천안문을 본 떠 만든 커다란 인민광장이 볼썽사납지만 멀리 5천 미터가 넘는 산들이 호위병처럼 라싸를 감싸고 있어 천혜의 요새임을 새삼 느끼게 된다. 눈 아래 라싸시내는 이제는 너무 말쑥이 정비되어 천년고도 라싸의 예전 모습을 짐작하기는 어렵게 되었다. 새롭게 지은 고층빌딩, 울긋불긋한 간판과 광고물들이 범람한 시내는 우리가 짐작하던 라싸와는 사뭇 다르다.
홍궁에서 컴컴한 좁은 길을 따라 한참을 지나면 넓은 마당 앞에 백궁(白宮)이 자리하고 있다. 정치와 종교를 주관했던 달라이라마의 거처다. 인도 라다크(Ladakh)로 망명한 제 14대 달라이라마의 거처이자 접견실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달라이라마의 거처였다는 얘기를 해주지 않는다.
백궁에는 이 밖에도 달라이라마의 생활구역으로 다양한 용도의 방과 회랑이 있는데 불교와 연관된 벽화들이 유명하다. 특히 동대전(東大殿), 일광전(日光殿-달라이라마의 개인 공간으로 공무를 보거나 손님을 접견하던 곳) 등이 있다. 역대 달라이라마들이 정치와 종교를 주관했던 동대전에는 티베트의 건국 신화인 원숭이의 인간 변신 등 수많은 전설이 벽에 그려져 있다.
역사상의 인물, 역사, 종교, 신화, 불교이야기, 건축, 민속 등 다양한 내용을 벽화 몇 장으로 간단명료하게 정리한 것이 인상적이다.
그림 기법이 섬세하고 색채가 산뜻한 벽화는 다른 실내장식과 어울려 거대한 갤러리가 된다. 그러나 포탈라궁 곳곳에는 워낙 감시하는 중국의 보안요원들이 많아서 사진촬영은 물론 달라이라마와 관련한 얘기는 조심스러워야 한다고 주의를 주는 통에 건성으로 보게 된다.
백궁(White palace, Potrang Karpo) 앞의 비교적 큰 마당이 바로 데양 샤(Deyang Shar, 德陽夏)광장이다. 동평대(東平臺)라고도 한다. 예전에는 여기서 법회나 티베트 전통공연 같은 대규모 행사를 했고, 가장 높은 곳에서 달라이라마가 참관을 했었다. 그 시절에는 달라이라마가 거닐었을 법한 마당이다. 이제는 주인 없는 광장. 티베트 전통 바닥다지기인 ‘아가치기’로 다져진 아가투(阿嘎土-지붕이나 바닥 공사에 사용되는 풍화석회암과 황토 등 전통적인 건축 재료를 말함)가 쓸쓸하지만 찬란히 빛나고 있다.
약 50분 동안 이곳저곳을 둘러 본 포탈라궁에는 승려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몇몇 방에서 앉아 있는 승려들을 발견했지만, 관람객들을 등진 채 경전을 외고 있거나 시주를 받고 있는 소수일 뿐이었다.
그 많은 승려들은 다 어디 간 것인가? 그 자리에는 수많은 관광객들이 관광가이드의 설명에 귀 기울이거나 이 방 저 방 기웃거리는 모습만 남았다.
데양 샤에서 큰 북이 달린 대문을 나서면 지그재그의 내리막길이다.
출구인 궁 뒤편으로 가는 길. 사진으로만 보던 포탈라궁 정면과 라싸가 아닌 북쪽의 라싸와 포탈라궁을 보게 된다. 북동쪽에 신축 공사하는 아파트와 빌딩이 거슬리기는 하지만 비교적 티베트 전통양식의 주택들이 빼곡하고 고즈넉하다. 포탈라궁 앞처럼 중국의 입김도 덜하고 도시변화도 더디지만 오래전부터 품고 왔을 티베트의 향기와 추억을 느낄 수 있는 여유가 있다. 궁 바로 밑에는 라싸사람들의 안식처인 호수공원 용담호(龍王潭)가 자리하고 있다. 포탈라궁(布達拉宮)을 지을 때 흙을 퍼간 구덩이에 물이 고여 만들어진 호수다. 오리보트와 같은 위락시설도 있어 멀리서 보아도 행복한 어떤 가족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내려오면서 보는 포탈라궁은 색다르다. 가파른 계단을 돌아 내려와 건물의 외벽을 바라보니 중세 유럽의 성보다 더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보인다.
그 요새를 한 바퀴 도는 순례길에 수많은 티베트인들이 오체투지하고 있다. 너무나도 경건하고 간절하게 돌리는 마니차에서 티베트인들의 한숨을 느껴본다.
포탈라궁을 보고 나니 오히려 허전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제한된 시간 때문에 뭔가를 못 본 듯한 안타까움 때문일까. 위대한 것에 대한 경외심과 기대가 조금은 부족한 듯 아쉬움으로 마무리하게 된다.
포탈라궁을 방문할 여행객이라면 아침 일찍 움직이는 것이 좋다. 개방시간이 짧고 평소에도 관광객과 티베트인 순례자들이 많아 편하게 감상하기 힘들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저작권자 © OBSW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티베트와 나' 카테고리의 다른 글
[헬로! 티베트 23편] 티베트 신심(神心)의 상징- 조캉사원 ② (0) | 2022.08.23 |
---|---|
[헬로! 티베트 22편] 티베트 신심(神心)의 상징- 조캉사원 ① (0) | 2022.08.23 |
[헬로! 티베트 20편] 하늘에 가장 가까운 城 라싸 (0) | 2022.08.09 |
[헬로! 티베트 19편] 송첸감포의 고향 메드로공카(美麗墨竹工卡) (0) | 2022.08.09 |
[헬로! 티베트 18편] 아페이의 마을 콩포기얌다(工布江達) (0) | 2022.08.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