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have a feeling

일본에 고구려촌이 살아있다

일본에 고구려촌이 살아 있다

고구려 패망 뒤 정착한 유민들이 전통 이어가며 고려신사까지 만들어
메이지유신 뒤 강제 개명 됐으나 최근 한-일 관계 모색의 장으로

▣ 사이타마=글·사진 서재철 녹색연합 자연생태국장 kioygh@greenkorea.org

일본에 고구려가 살아 있다. 지역 전체가 고구려와 관련된 지명이나 유적이 산재한 곳이 있다. 도쿄에서 북서쪽으로 40여㎞ 떨어진 사이타마현 히다카시다. 이곳에는 기차역이 두 곳 있는데 둘 다 고려역(高麗驛)과 고려가와역(高麗川驛) 등 ‘고려’라는 이름으로 돼 있다. 역 주위로 ‘高麗○○’라는 간판이 종종 눈에 띈다. 역 앞 택시 이름도 ‘고려천 TAXI’다. 안내 간판도 온통 고구려 천지였다(‘고구려’를 이곳에서는 일상적으로 ‘고려’라고 줄여 부르는데, 관련 자료에서는 高句麗의 ‘구’(句)자를 제대로 살려놓기도 한다). 고려촌 고마본향, 고려전, 고려치, 고려소학교, 고려중학교, 고려우체국, 고려향, 고려산, 고려고개, 고려원…. 마치 한국의 어느 소도시에 온 느낌이 들 정도다. 한국에 온 듯한 친근함과 정겨움마저 느껴진다.


△ 고려역은 주말이면 인근 도시의 시민들이 고려향과 고려신사를 답사하기 위해 방문하는 곳이다. 붉은색으로 치장한 장승이 이채롭다.

재일동포들, 장승건립축제 열다

고려촌에는 고려신사를 중심으로 지역 곳곳에 고구려의 유적이 흩어져 있다. 이곳 사람들은 ‘고려향’이라 부른다. 고려신사는 현지 발음으로 ‘고마진자’다. 고려신사는 전형적인 일본 지방도시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한적한 곳으로 히다카시의 동쪽 산자락에 자리잡았다. 후지산이 보이는 시골길을 따라 들어가다 맑디맑은 물이 흐르는 고려천을 건너 고려신사가 펼쳐져 있다. 신사는 일본의 다른 유명한 신사처럼 숲을 병풍처럼 끼고 있다. 주변에는 아기자기한 조경이 나타나는데 특히 신사의 뒤쪽에 위치한 고려고택은 일본의 국가중요지정문화재다.

지난 10월23일 재일동포들은 고려신사에서 장승건립축제를 열었다. 신사 입구에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글씨가 또렷이 적힌 대형 장승을 올린 것이다. 전에는 일본 신사 특유의 정문 상징물 ‘도리이’만 있었는데 이젠 신사 정문에 대형 장승이 우뚝 서 있다. 형태는 한반도 중부 이북에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장승인데 재질은 남부지방에서 주로 쓰는 돌로 만들어졌다.

고려촌과 고려신사의 역사는 나라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동아시아 맹주였던 고구려는 668년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멸망했다. 사절단으로 666년 일본으로 온 고구려 왕족 약광(若光)은 고국이 망하자 716년 도쿄 주변 일대에 흩어져 살던 고구려 망명객과 유민 1799명을 모아 무사시노 벌판 일대에 정착했다. 이후 이곳은 고려군이 되었다. 고려군은 고려촌과 고려천촌으로 이뤄졌다. 고려군이 설치된 지 42년 뒤 인근 지역에 신라군도 생겨난다. 고국에서는 대립했던 고구려와 신라였지만, 이곳에서는 동포지간으로서 유대와 교류를 통해 함께 이곳을 개척해갔다. 당시 일본 나라 정부는 고구려·백제·신라 유민들을 환대했다. 고구려인들은 말타기와 농업기술을 전해주고, 신라인들은 건축과 미술에 영향을 주는 등 선진문물의 교량 구실을 했기 때문이다.

약광이 죽자 군민들은 그의 위덕을 기리기 위해 어전의 뒷산에 사당을 세우고 신령을 제사 지내면서 ‘고마명신’이라 불렀다. 이렇게 해서 고려신사가 만들어졌고, 사람이 살지 않던 변방의 무사시노 벌판은 한반도 유민에 의해 메이지 시대에 일본 쌀의 절반을 공급할 정도의 곡창지대가 됐다.


△ 고려향은 풍광도 아름답기 그지없다. 조용하고 전원이 그득한 일본 지방 소도시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러나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 정부는 국수주의를 강화하면서 1896년 한국 관련 지명을 없애버린다. 고려군을 이루마군으로 바꾸고 이를 다시 히다카시, 쓰루가시마시, 한노시의 3개 시로 나눴다. 그래서 지금은 고려촌이 히다카시에 속한 조그만 동네 이름으로 바뀐 것이다. 1898년에는 고려신사의 이름도 다카구신사로 바뀌었고, 약광에 대한 제사도 금지하고 대신 일본 천황신을 제사 지내게 했다. 고구려 후예들인 고려씨는 26대까지는 고구려인끼리만 결혼해 혈통을 보존했다. 그러나 이후 일본인과의 통혼으로 현재는 일본인화됐다.

식민지배 정당화에 이용되기도

고려 가문은 14세기 무로마치막부 때 정권과 반대편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멸문의 화를 당할 뻔했다. 고려 종가만 남고 나머지는 모두 분가해 다른 성씨를 쓰게 됐다. 고려 가문도 근대 이후의 한반도 출신에 대한 차별로 한때 결혼 상대를 찾기 어려울 정도의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현재 고려의 직계 혈통은 50여 명에 불과하다. 현재 약광의 59세손 고마시로모(77)가 신사의 대표 공사를 맡고 있으며 아들 후미야쓰가 뒤를 이을 준비를 하고 있다. 고마시로모는 한국을 방문했을 때 “조국을 잊지 말라는 결의를 다지고 슬기롭고 자랑스러운 한민족의 후예임을 과시하기 위해 고마(고려)라는 성을 지켜온다. 아직까지 고려인들의 족보가 전해져오고 있다”고 밝혔다.

고려신사는 군국주의자들에 의해 악용된 역사도 지니고 있다. 일제는 조선침략기에 고려신사를 ‘외래 민족이 일본에 동화된 전형’으로 선전하면서 많은 이들을 참배시켰다. 이 때문에 새로 부임하는 조선 총독이나 고위 관리들은 이곳을 참배하고 조선으로 떠났다. 방명록엔 사이토 마고토, 고이소 구니아키 등 조선 총독의 이름이 남아 있다. 이후 고려신사는 유명세를 타고 각계 인사들이 방문했고 고려신사를 참배한 와카스키 레이지로, 하마구치 오사치, 사이토 마고토, 하토야마 이치로, 고이소 구니아키나, 시네하라기루코는 훗날 총리가 됐다.

한국인들의 방문도 이어졌다. 이 중엔 친일파 조중응도 있다. 조중응은 국회 민족정기모임이 지목한 핵심 친일파로 구한말 매국망동으로 점철된 인물이다. 명성황후 시해에 적극 가담했고, 이토 히로부미의 지원에 힘입어 이완용 내각의 법무대신이 됐다. 광무황제의 강제 퇴위를 주동한 7적이기도 하다.

신사 입구에는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 부부가 기념식수한 나무가 있다. 한 왕조의 몰락, 마지막 왕손과 정략결혼, 매국노로 이어지는 역사의 질곡을 한 곳에서 읽어낼 수 있었다. 이 밖에 참배전 제명사 방명록에는 독립운동가 33인 가운데 한 명인 최린과 조선 최초 여류비행사인 박경원의 이름도 보인다.

해방 이후 한일협정을 맺은 뒤 정치인들과 정부 관계자들도 이곳에 들렀다. 이후락·김종필 등 정치인, 최근엔 사물놀이의 김덕수, 도공의 후손 심수관, 재일동포 작가 유미리의 이름이 나무패에 써 있었다. 현 나종일 일본대사를 비롯해 대부분의 주일대사들이 이곳을 방문했다.


△ 고려신사의 본전 모습. 이곳은 고구려와 관련된 각종 문화행사가 열리고 있다.

비록 일제의 식민지배에 이용됐던 전력이 있더라도 오늘의 고려신사가 지니는 의미는 여전하다. 36년간의 왜곡 때문에 1300년을 뒤로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고려신사에는 고구려 유민들의 망국의 한이 절절히 배어 있다. 이역만리 일본 땅에서 1300년이라는 시간을 초월해 고구려 후손임을 당당히 밝히면서 고구려 조상을 섬기는 한민족의 저력이 드러나는 곳인 것이다. 일제에 의해 왜곡된 것은 고려신사만이 아니라 우리 땅 여기저기에서도 수없이 남아 있다. 오히려 고려신사의 의미를 제대로 부활하고 키워가는 노력이 대승적인 모습이 아닐까.

역사로 이어지는 한류 열풍을

재일동포 시민운동가 박중현씨는 고려신사에 대해 “비록 신사는 일본의 것이지만 우리 민족이 1300년 전에 일본에 와서 터전을 닦고 정착했던 역사적 의미는 분명하다”며 “특히 재일동포들에겐 우리 민족의 문화와 역사를 보여주는 상징이라는 의미가 크다”고 강조했다.

고려신사에서 열리는 장승제 역시 재일동포 사회와 일본 지역 시민단체가 협력해 ‘다양한 지역주의의 공생’이 행사 테마가 되고 있었다. 민족의 통일, 민족 간의 화해와 공생, 일본 지역사회와의 유대를 찾아나선 재일동포들의 다양한 민족 제의 창조는 한-일 관계와 재일 한민족의 민족 문제에 새로운 지평을 여는 것으로 보였다. 앞으로 재일동포의 정신적 구심점이자, 새로운 한-일 관계를 모색하는 장으로서 고려신사의 새로운 희망도 엿볼 수 있었다.

일본에는 지금 한류 열풍이 절정이다. 당분간 이 분위기는 계속될 것이다. 이런 가운데 한류의 영역이 영화나 드라마 등 예능 분야를 뛰어넘어 문화와 역사로까지 확장한다는 의미에서 고려신사는 나름의 뚜렷한 의미와 가치가 있다. 비록 일제 지배에 이용됐다 하더라도 1300년 전 고구려의 기상은 여전히 일본에서 숨쉬고 있다.


문화답사와 생태기행의 유혹

일본인들이 즐겨 찾는 도보 답사 코스, 한국 관광객들의 관심은 적어


고려신사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고려촌은 문화답사와 생태기행이 어우러진 코스로도 손색이 없다. 주말이면 도쿄 시내를 비롯해 근처 사이타마의 여러 도시에서 일본 시민들이 고려촌과 고려신사를 즐겨 찾는다. 가족이나 연인,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다양하게 답사를 한다. 특히 이곳의 답사는 철저하게 도보로 이뤄진다는 특징이 있다.

사이타마현 히다카시에 조성하고 관리하는 답사코스는 약 10.6km에 이른다. 부지런히 구경하면 3시간 정도 걸리고, 넉넉히 문화유적을 둘러보고 여유를 부리면 5시간 정도 걸린다. 전형적인 일본 지방 소도시의 소담스런 정취와 함께 고구려 유적을 중심으로 한 문화유산까지 함께 꼼꼼히 곱씹어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답사는 고려역을 기점으로 하거나 고려신사를 기점으로 해 출발하는 방법 두 가지가 있다. 어디 쪽으로든 고려촌의 한가운데를 이리저리 휘어돌게 된다. 특히 이 코스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고려가와, 즉 고려천(高麗川)이다. 이곳은 일본의 도심에 자리잡은 하천 가운데 손꼽힐 정도로 맑다. 이 일대 학생들은 여름이면 이곳에서 수영도 하고 물놀이도 한다. 이곳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닌 쓰루문과대학 이타루(19)군은 “고려와 얽힌 우리 지역과 고려천은 아름다운 고향의 자랑”이라며 “특히 고려천에서는 여름이면 수영을 하면서 놀았던 기억이 초·중·고까지의 중요한 추억”이라고 말했다. 고려천은 맨눈으로 봐도 단박에 수질이 최상급임을 알 수 있다.

고려신사와 고려향을 찾는 이들은 아직까지는 일본인들이 대부분이다. 한국에서 일본으로 관광 가는 이들은 꽤 많지만, 고려신사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도쿄의 관광안내 책자나 인터넷 사이트에도 빠져 있다. 하지만 1300년 전 고구려의 역사가 일본에 그대로 살아 있는 현장을 살펴보고 덤으로 일본의 지방 소도시의 참모습을 답사하는 것은 웬만한 이름 있는 관광지 이상의 감흥으로 다가올 게 분명하다. 도쿄 시내 신주쿠역이나 이케부쿠로역 등에서 열차를 타고 고려역과 고려가와역을 찾아갈 수 있어 접근성도 높은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