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한강의 재발견] |
송림과 바람 놀던 곳 회색 아파트 숲으로 |
300년 전 겸재 붓 끝의 한강 풍경과 오늘 … 개발 논리에 아름다움은 상처받고 파괴 |
산세와 물길이 완전한 조화를 이루는 곳은 많지 않다. 옛사람들은 서울에서 이 조화의 극치를 보았다. 삼각산 백악산(북악산) 인왕산 관악산 등 유려한 산세가 도시를 감싸고, 한강이 다시 주위를 둘러 흐르며 이뤄낸 절경. 한강 줄기가 산속 굽이굽이 흘러 들어가 빚은 깊은 계곡과 완만한 산등성이, 탁 트인 벌판과 모래섬들은 어느 곳을 둘러보나 한 폭의 그림이 되는 조화의 절정이었다. 그래서 조선 선비들은 외지로 발령받아 서울을 떠날 때면 “언제 어느 곳에서 이 같은 아름다움을 다시 볼 수 있으랴”며 한탄했다 한다. 하지만 넓은 도로와 아파트 숲에 둘러싸인 지금 서울에서 이 같은 절경의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다. 간송미술관 최완수 연구실장은 “조선 왕조가 멸망한 후 바로 일제 강점기가 이어지면서 서울의 아름다움이 도외시되고, 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무차별적으로 파괴돼버린 것”이라며 안타까워한다. 다행스러운 점은 ‘조선의 것이 세계 제일’이라고 믿었던 조선 후기 진경시대(1675~1800)의 화가들이 ‘세계 제일의 절경’ 서울의 아름다움을 꼼꼼히 화폭에 기록해두었다는 것이다. 특히 당대 진경산수화의 최고봉이었던 겸재 정선은 자신이 나고 자라 평생을 살았던 백악산과 인왕산 일대를 중심으로 한양의 아름다움을 사생해 남겨두었다. 최실장이 겸재의 작품을 모아 자세한 해설과 함께 펴낸 ‘겸재의 한양진경’(동아일보사 펴냄)에는 대가의 붓 아래 재현된 옛 한강의 아름다움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최실장의 설명으로 겸재의 ‘경교명승첩’에 실린 300년 전 한강 풍경과 오늘을 비교해본다. 광진
첫 작품은 ‘광진(廣津)’이다. 산기슭의 운치 있는 기와집들이 워커힐 호텔과 워커힐 아파트로 바뀌었을 뿐, 층진 아차산의 경관과 그 앞을 흐르는 한강 줄기의 모습은 지금과 다를 바 없다. 오늘날 한강 유람선이 지나는 수면에는 당대의 유람선이었을 나룻배와 돛단배들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당시 광진은 한양과 충청, 강원, 경상도를 잇는 나룻배들이 오가던 큰 나루터. 교통의 요지이면서 동시에 아차산과 한강이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경치로도 유명했다. 그래서 당대의 권문세가들은 이곳에 별장을 짓고 풍류를 즐겼다. 겸재의 그림에서 노송에 둘러싸인 채, 혹은 잡목림을 두른 채 저마다 화려함을 자랑하고 있는 기와집들이 대개 이들의 별장이다. 숙종시대 문인 김시보는 이곳의 풍경을 ‘돛단배 바람 따라 굽이굽이 돌아가니, 가는 손 오는 이 함께 이별 아낀다. 술잔 들고 뒤채어 놀랄 적에 광나루 다가오고, 어린 종은 벌써 물가 갈대밭에 서 있구나’라는 시조로 읊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이 절경 앞에는 1936년 준공된 뒤 최근 새로 건설된 광진교와 76년 만들어진 천호대교가 나란히 놓여 차량 행렬만 가득하다. 나룻배 두 척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던 겸재 시대와 비교하면 격세지감이다. 송파진
두 번째 작품은 ‘송파진(松坡津)’이다. 송파나루는 지금의 석촌호수 동쪽 호숫가에 있던 나루터. 조선시대 이곳은 남쪽에서는 수원 용인의 물이 북류해 탄천으로 흘러 들어오고, 북쪽에서는 청계천과 중랑천이 한데 모이는 낮은 분지였다. 각지에서 모이는 토사의 양이 엄청나 수많은 모래섬이 만들어졌다 사라지기를 되풀이했다고 한다. 뚝섬, 무동도, 잠실은 이렇게 만들어진 섬. 하지만 1970년 송파나루 앞 한강 본줄기를 매립하고 성동구 신양동 앞의 샛강을 넓혀 한강 본류를 삼으면서 일대는 상전벽해의 변화를 겪었다. 멀리 보이는 남한산성의 웅장한 성벽과 녹음 짙은 능선은 지금도 그대로지만, 송파나루의 정취는 이제 석촌 호숫가 한편에서 겨우 짐작이나 할 수 있을 뿐이다. 겸재는 마치 비행기를 타고 본 듯 시점을 높이 띄워 한 폭에 한강 양 기슭을 모두 그렸다. 사진이라면 넓은 한강의 양안이 이처럼 세밀하게 표현될 수 없었겠지만, 그림인 덕에 후대 사람들은 웅장한 남한산성과 반대편 기슭의 나루터를 함께 감상할 수 있게 됐다.
남한산성의 맞은편, 배에서 내려 차양을 쳐놓은 모래사장에 앉은 이들은 한강의 절경을 즐기며 쉬고 있는 듯한 모양새다. 지금은 이 물줄기가 모두 메워진 위로 고층건물 숲이 들어섰고, 유유히 떠가는 돛단배 대신 승용차의 물결이 흐르고 있지만, 강가에 앉아 한강의 정취를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만은 지금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듯하다.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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