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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연재

[스크랩] [역사를 바꾼 대역사 ⑩] 네덜란드 주디치 방조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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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를 바꾼 대역사] 네덜란드 주디치 방조제

자연을 이겨낸 네덜란드의 자부심
1961~1932년까지 32㎞ 둑방 쌓아… 암스테르담 신시가지도 간척지 위에 세워

지구 표면의 70%, 인체의 70%를 차지하고 있는 물은 생명 유지에 없어서는 안되는 필수적인 물질이다. 인간은 유사 이래로 물을 구하기 위한 투쟁을 벌여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큰 강 유역에 문명을 이룩한 것에서부터 관개수로를 건설하고 우물을 판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인간은 물을 자신의 삶의 터전에서 밀어내기 위한 투쟁도 불사했다. 그건 홍수로부터, 해수(海水)의 침범으로부터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한 필연적인 선택이었다. 물의 도시 베네치아는 적군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내기 위해 아드리아해의 개펄(潟湖)에 나무막대를 수없이 박아세운 도시이고, 전체 면적이 4만㎢인 네덜란드는 국토의 40%가 제방을 쌓고 풍차와 펌프로 물을 빼내 얻은 간척지로 이루어져 있으니 이 분야에선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신은 세상을 창조했으나 네덜란드인은 육지를 만들었다”는 말이 따라다니듯이 네덜란드는 단어 자체가 ‘낮은 땅’을 뜻한다. 국토의 27%가 해수면보다 낮고, 또 절반 이상이 해발 5m가 되지 않는다. 제일 높은 곳이라야 321m에 불과하다. 해수면보다 6.5m나 낮은 곳도 허다하다. 많은 도시의 이름이 ‘담(-dam)’으로 끝나는 것도 강에 댐이나 제방을 쌓고 그 위에 거주지를 만들어 도시를 조성했기 때문이다. 암스테르담은 암스텔 강, 로테르담은 로테 강, 에담은 에(Ee) 강에 댐을 쌓아 만든 도시다.

1200년대부터 관개수로 건설
인구밀도는 높고 땅이 좁은 네덜란드는 북해 쪽으로 땅을 넓히기 위해 지난 800년간 사투(死鬪)를 벌여왔다. 이들이 배수용 관개수로를 건설하기 시작한 것은 1200년대이며, 네덜란드 하면 생각나는 풍차는 14세기에 처음 등장했다. 주로 로테르담 남쪽의 제이란드(Zeeland)가 있는 델타 지역에 집중됐다. 그런데 1421년 11월 18일과 19일 사이 대규모 홍수로 10개의 도시가 물에 잠겼다. 이때부터 제방은 해안도시의 필수시설이 됐다. 방조제(防潮堤)를 쌓은 다음 풍차를 돌려 저지대의 물을 퍼냈던 것이다. 그렇게 하여 네덜란드의 간척사업이 시작됐다.

그들은 이렇게 얻은 간척지를 폴더(polder)라 불렀다. 처음에는 풍차를 산발적으로 세웠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여러 개를 나란히 세움으로써 배수능력을 크게 높였다. 한창 때는 1만개도 넘었다는데 지금은 950개 정도만 남아있다. 그 중에서도 풍차가 가장 많이 남아있는 곳은 당시 해수면보다 낮은 레크(Lek) 강의 물을 퍼올리기 위해 세운 로테르담 근교의 킨데르다이크 일대. 개울을 따라 줄지어선 19개의 풍차는 장관을 이뤄 지금 많은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있다.

17세기 초에 조성된 7200ha의 벰스터(Beemster) 폴더는 농사짓기에 적합하도록 길이 930m 너비 185m로 구획됐고 당시 건설된 도로, 수로, 제방은 원형 그대로 지금껏 남아 있다. 깊게 뿌리를 내리는 갈대를 심어 개펄의 물기를 빨아들이게 하다가 감자, 양파 등을 번갈아 심어 땅을 굳혀 계속 목초지로 만드는 방법으로 간척지를 개발해왔다.

현재 이들 폴더에는 수십 년씩 자란 아름드리 나무로 이루어진 숲과 물길 역할을 하는 운하, 젖소가 풀을 뜯는 넓은 목초지가 그림 같은 풍광을 선사하고 있다. 19세기에 접어들자 풍차 대신 증기기관이 간척사업에 투입됐다. 1998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바 있는 바우다(Wouda) 펌프장은 증기기관을 이용한 양수시설로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네덜란드의 근대사는 간척의 역사였다. 제방을 쌓고 또 쌓아 국토를 늘리고 다듬은 결과 국토의 모양이 100년을 멀다않고 변해왔던 것이다. 수도 암스테르담만 하더라도 수많은 운하와 이를 잇는 1000여개의 다리로 이루어져 있다. 물과 싸워야 하는 이 도시의 명물은 수방선(水防線·Defence Line of Amsterdam). 잦은 홍수에 대비해 1883년부터 1920년까지 암스테르담 반경 15~20㎞에 걸쳐 수역학(水力學) 공법을 응용하여 축조한 135㎞의 기다란 원형의 둑이다. 여기에는 45개의 요새도 설치돼 있다. 이런 이유로 델프트 기술공과대학은 수역학 분야에서 세계 선두를 달린다.

수질 악화되자 습지 만들어
자연과 싸워 이긴 것에서 무한한 자부심을 느끼는 네덜란드 사람이 최고의 자랑거리로 여기는 것은 북해의 에이셀(IJseel)만과 마르크만을 막은 주다치(Zuiderzee) 방조제다. 주다치란 그들 말로 ‘남해’(북해의 남쪽에 위치)란 뜻을 가진 조이데르해를 일컫는 말로서, 원래 담수호였던 이곳은 1787년 해일로 북쪽 입구가 휩쓸려 가는 바람에 바다와 연결됐다. 그걸 1916년부터 1932년까지 전장 32㎞의 방조제를 쌓아 다시 담수호로 되돌려놓은 것이다. 그때 플레보란드 등 4개의 간척지도 생겨났다.

방조제는 구간별로 차이가 있지만 해발 8~11m 높이를 유지하며 만조 때에도 수면 위로 10m 정도 솟아 있도록 설계됐다. 방조제 밑바닥 평균 너비는 290m이며 둑 마루의 너비는 최소 4m에 이른다. 방조제 위로는 4차선의 도로가 나 있어 그 위에 서면 망망대해를 보는 듯하다.

지난 70년 동안 단계적으로 개발된 주다치 간척지는 규모가 35만ha로 새만금의 9배에 달한다. 암스테르담 신시가지도 이 간척지 위에 세워졌다. 국가발전과 물 관리의 대표적인 사업이자 네덜란드의 중요한 수자원이라고 말하는 이 주다치 방조제가 1953년 1월 31일부터 2월 1일까지 허리케인급 폭풍우에 급습당했다. 너무 급작스러워 경보발령도 내리지 못했다. 그때 1835명이 사망했고 가축 20만마리가 희생됐다. 7만2000여명의 이재민이 생겼으며 가옥 4만7000여채와 16만여ha의 농지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지난 300년 이래 최악의 재난이었다. 간척지는 이처럼 걸핏하면 홍수를 맞았고 농사도 생각처럼 좋지 않았다. 바다를 통해 부를 축적했고, 17세기엔 황금의 시대까지 누렸던 네덜란드인에게 바다는 다시 최악의 적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재난은 예고없이 온 것이 아니었다. 네덜란드 정부가 간척지에 첨단산업단지를 건설하기로 하고 전문기관에 환경영향평가를 의뢰한 결과 “댐을 세워 담수호를 만든다면 새로운 상수원과 수상 스포츠 센터 등을 건립해 이 지역 산업화에 도움을 줄 것이지만 홍합 굴 바닷가재 등의 양식이 불가능해져 실질적으로 손실이 클 것이므로 농경지나 산업단지로 이용하는 것보다 그냥 습지로 내버려두고 자연생태 관광지로 활용하는 것이 생산성에서 1.6배나 앞선다”라는 조사결과가 나왔기 때문만은 아니다. 결정적인 것은 “해수면이 담수호의 수위보다 높기 때문에 비가 내려 담수호의 물을 빼내야 할 상황이 도래해도 제방의 수문을 열 수 없어 매년 계속되는 수해의 원인”이라는 지적이었다.

바다의 물길을 끊어버리면 바다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현실은 그와는 반대였다. 바다의 반격이 바로 시작됐기 때문이다. 바닷물이 사라지면서 생물은 집단폐사하기 시작했고 수질은 크게 악화됐다. 이를 본 네덜란드 정부는 역(逆)간척 사업을 벌이기로 결론을 내렸다. 제방을 그대로 두어 바닷물과 강물이 간척지에 흐르도록 하여 습지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 중 50%는 국립공원으로 지정했다.

한동안 “간척이야말로 국토를 늘리는 프론티어 사업”이라고 모두들 말했다. 그게 유행이라서 한국도 일본도 열심히 그에 따랐다. 이제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자연이 제 성질을 드러내는 데 좀 시간을 끌었을 뿐 그 성질을 버린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시행착오를 깨달았다. 자연을 우습게 보아서는 안된다는 교훈과 함께.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의 새만금 간척사업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자료출처: 주간조선(권삼윤 역사여행가)] <자료정리: 부동산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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