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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한 여성 가장과 기부문화

성공한 여성 가장을 소개하는 TV에 프로그램에 패널로 출연한 적이 있습니다. 나중에 방송을 보니, 제가 너스레를 떨었던 내용들(이런 걸 방송하는 사람들은 ‘애드립’이라고 하던데...)은 대부분 편집 당했더군요.

예를 들어, 어렵게 성공한 여성 가장들의 사업을 소개하는 코너에서 저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마치 명문대학교에 합격한 소년 소녀 가장들을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해마다 입시철이 되면 명문대학교에 합격한 소년 소녀 가장들을 특집으로 보도하곤 합니다. 개그맨들이 찾아가서 인터뷰도 하고 그러지요. 그런데 그렇게 성공한 소년 소녀 가장들을 보면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렇게 되지 못한 소년 소녀 가장들이 수만 명이나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찬가지로 성공한 여성 가장들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하게 됩니다. 이 분들은 어렵게 성공한 정말 드문 여성 가장들입니다. 그동안 피눈물 나는 노력을 해서 성공하신 분들입니다. 이렇게 훌륭하게 성공한 분들을 보면서 동시에 생각해봐야 할 것은 이렇게 되지 못한 여성 가장들이 우리 사회에 훨씬 더 많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성공한 분들을 보면서 열등감을 느끼는... 이렇게 되고 싶지만 결코 될 수 없는 수 많은 여성 가장들도 이 분들처럼 성공할 수 있도록 우리 사회의 제도적인 뒷받침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이 분들이 이렇게 성공하기까지 그동안 겪었던 고통이란 보통 사람들은 전혀 짐작할 수도 없을 만큼 극심했을 것입니다.”

제 이야기는 여기서 짤렸습니다. 그 뒤에 제가 한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제가 얼마 전에 한 놀이방에서 초등학생들과 중학생들에게 노동문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제가 주로 강조한 내용은 ‘여러분들의 부모님들처럼 열심히 일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나라가 돼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날 그 놀이방 선생님이 저에게 편지를 보내셨더군요.

‘그날 13명의 아이들이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13명의 아이들 중에서 부모가 다 있는 아이들은 6명뿐이었습니다. 그 아이들 중에서도 부모가 안정적인 직장에 다니고 있는 아이들은 별로 없었습니다. ’열심히 일하시는 엄마 아빠‘ 금방 머리에 떠오르지 않는 아이들이 더 많았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힘 없고 약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알 만큼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저로서는 정말 부끄러웠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저 분이 저만큼 성공하기까지 겪었던 삶이란 보통 사람들은 전혀 짐작할 수가 없을 만큼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정말 훌륭하십니다. 정말 장하십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는 동안 그 여성 가장 출연자는 고개를 숙인 채 잠시 동안 말을 못했습니다. 다음 말을 하기 위해 고개를 숙인 채 애써 호흡을 삼키고 있던 그 출연자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선합니다.

저는 제가 한 이야기들 중에서 “이렇게 성공하기까지 그동안 겪었던 고통이란 보통 사람들은 전혀 짐작할 수도 없을 만큼 극심했을 것입니다.”라는 공자님 같은 말씀보다, 뒤에 한 이야기들이 훨씬 더 애착이 가는데, 그런 너스레들이 주로 편집 당했더군요. 아마 방송 전문가의 시각으로는 제한된 시간 안에 그런 이야기까지 다 담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했던 모양입니다.

그날의 출연자는 영등포에 있는 ‘하자’ 센터에서 ‘그래서’라는 독특한 이름의 카페를 운영하는 대표이사였습니다. 여성 가장으로서 온갖 어려움들을 딛고 이제는 카페를 경영하는 사장님이 된, 그래서 성공한 여성 가장의 모델로 TV에까지 출연한 그 여성에게 프로그램이 다 끝나갈 무렵 진행자가 물었습니다.

“요즘 한 달 수입이 얼마나 되시나요?”

그 출연자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한 달에 60만원쯤이요.”

사회자나 패널들이나 모두들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 가장 중에서 성공한 사람, 그래서 TV 프로그램에까지 출연한 사람이 버는 수입이 한 달에 60만원입니다.

그만한 돈도 없어서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이가 아파도 병원에 갈 돈 몇 천원이 없어서, 아파트에서 아이들을 던져버리고 뛰어내릴 수밖에 없었던 엄마를 잊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제 날씨가 추워지면 그 사람들은 더욱 살아가기가 팍팍해집니다.

허리케인 카트리나 때문에 미국에 상상을 초월하는 인명 피해가 발생하는 등 세계 최강대국의 이미지에 먹칠을 하는 결과를 초래한 것은 “미국식 극단적 개인주의, 자유주의의 폐해”라고 비판하는 지적이 있습니다. 물론 옳은 지적입니다.

그런데 미국은 사실 우리나라보다 훨씬 더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많은 나라입니다. 부자의 권리가 가장 잘 보호 받는다는 전형적인 자본주의 국가 미국에도 시민사회에는 ‘기부문화’라는 정서가 자리잡혀 있습니다. 부자는 아니지만 굶어죽지 않을 만큼 사는 사람이 자기보다 훨씬 더 가난하고 고통 당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인권단체에 돈 한 푼도 내지 않고 자원봉사 활동도 하지 않고 살면 아주 천박하고 무지하고 상종할 수 없는 인간 취급당하는 그런 문화가 있습니다. 그런 미국식 기부문화를 우리나라에 정착시킨 단체들이 이를테면 ‘경실련’이나 ‘참여연대’일 것입니다.

유학이 자유화되고 나서도 우리나라의 똑똑한 수재들이 미국 명문대학교에 입학하지 못한 이유는 그 때문입니다. 면접할 때 교수들이 물어봅니다. “지금까지 헌혈 몇 번했습니까?” “자원봉사 활동은 어떤 곳에서 얼마나 했습니까?”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고 답하면 그 사람들 시각으로는 거의 인간이 아닌 겁니다. 어떻게 그 나이가 되도록, 피가 없어서 사경을 헤매는 사람들을 위해서 한 번도 헌혈을 하지 않고 살 수가 있나? 어떻게 그 나이가 되도록 자신보다 불행한 사람들을 위해서 한번도 땀 흘려 보지 않고 살 수가 있나?

어쩌면 부시 같은 놈이 두 번씩이나 대통령을 해도 그 나라가 지탱되는 중요한 이유는 그런 건전한 시민정신이 바탕에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강의할 때 이런 얘기를 했더니 나중에 뒤풀이 자리에서 공무원노조 간부가 저에게 따끔하게 지적했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그 얘기를 듣는 사람들이 미국을 마치 좋은 나라처럼 오해할 우려가 있습니다. 미국을 좋게 이야기하는 것은 조선일보가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하 소장님 같은 분까지 나서서 그렇게 말씀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앞으로는 그런 표현을 좀 더 신중하게 사용해주시기 바랍니다."

일리 있는 지적입니다. 저는 항상 부끄러움을 통해서 배웁니다.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완전히 구겨져버린 강대국 미국의 사태를 보면서, 우리들이 사회적 약자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그들의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에 대한 배려의 차원이 아니라 공동체의 유지 발전과 정의의 실현이라는 측면에서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